211. 에디터 수풀씨의 일일.
에디터 수풀씨의 일일.
- 신촌에서, 르바게트 메종, 다시 신촌으로.
춥다, 그래도 좋다.
발길 닿을 곳 있다면.
해치워야 할 일이 많고, 속은 언제나 잡념으로 들끓고, 모르는 새 잘근잘근 씹는 입술에는 이빨 자국이 스며 있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내고, 내 생각은 어디까지나 나 혼자서 정리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혼자 있기는 싫은 이기적인 마음씨는 심장을 뒤숭숭하게 만든다.
그런 마음씨는 내비치고 싶지가 않아 잠바 지퍼를 더욱이 꼭꼭 여민다.
으 추워, 으 추워,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것을 보면 그건 사실 추워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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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이 넉넉한 웃옷 안으로 코까지 들이밀어 놓고, 오들오들 떨며 북적이는 신촌 거리를 바삐 걷는다. 정신 없는 발걸음을 문득 멈추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빵집이다.
대충 보아도 이 층은 되는 큼지막한 건물, 그럼에도 단정한 모양새, 어쩌면 이 거리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갖춰진 분위기.
감추어 둔 코와 입을 빼고 천천히 간판을 올려다보며 한 글자 한 글자를 입 안에서 맴돌듯이 뱉어 보았다.

르… 바게트, 메종….
무엇 때문이었을까, 목적지는 다른 곳이었으나 홀린 듯 밤색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탁 트여 있지만 따뜻하고 아늑한 분위기. 옆으로 눈을 돌리면 대충 보아도 빵 종류가 무지하게 많았다. 빵은 가게 이름답게 전부 바게트다. 한 구석에 샌드위치와 음료도 진열되어 있었지만, 바게트 종류만 어림 잡아도 열 개가 넘다 보니 바게트에만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늦은 시간이지만, 저녁 식사를 거른지라 배가 고팠다. 고픈 속을 채워줄 빵을 고르기 위해 이리저리 눈을 돌렸다. 에그 바게트, 연유 바게트, 소금 바게트, 황치즈 바게트. 바게트, 바게트, 바게트의 향연. 그리고 마침내 집어든 것은 진한 녹색의 말차 바게트다.
말차 맛 바게트라니…. ‘난 원래 바게트 안 좋아하는데, 이런 바게트면 맨날 먹지.’
…하는 생각을 잠시 떠올렸다 접어두고 카운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단밤! 음료 메뉴를 몇 초 간 들여다 보다 고민 없이 골랐다. 단밤은 밤베이스에 밤크림, 연유, 에스프레소가 들어간, 이곳의 시그니처 음료다. 단밤 옆 조그맣게 쓰인 ‘sweet night’를 마주하고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먹으면 잠이 잘 오나 보지?

주문을 마친 후 이 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올라가는 계단 곳곳에도 각종 꽃과 바구니 같은 장식품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뭐 하나 대충 꾸며 놓지 않은 곳이다.

올라가자마자 눈이 닿은 것들에서는 모두 저만의 모양새와 색감이 만개했다. 우드톤의 의자와 탁상, 거울, 바게트 장식, 그리고 천장에 걸린 바구니들. 사이사이에 놓인 초록빛 화분들은 아늑하면서도 건조한 이 공간에 생기를 더했다.
조금 둘러보다 소파 자리에 가 앉았다. 아니, 그보다 몸을 뉘였다는 표현이 적절할 터인데, 이 널찍하고 여유 있는 소파를 본다면 누구나 몸을 누이고 싶어질 것이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배경음 삼아 이 층을 다시 천천히 둘러보았다. 내 자리 바로 앞으로는 감성 있게 꾸며진 또 하나의 작은 공간이 보였다. 바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이름 모를 식물이 눈에 띄었다. 편안함을 주는 장식들 덕에, 우연히 들르게 되어 살짝 낯설었던 이 곳을 이제 나는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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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혼자 있기 싫은 날도 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 이는 다른 일이 있어 오기 힘들 것을 안다. 그래도 기다렸다. 그러다 보니 기다리는 마음은 서투른 미움과 까슬까슬한 속상함으로 변모했다. 이기적인 마음씨의 내가 싫었지만 그 마음을 뒤로 하고 오지 않는 그 사람도 미웠다. 그렇게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대기를 몇 십 분이 지났을까, 문득 애 같은 스스로가 징글징글해져 밉다는 마음을 부리나케 접어두었다. 꼭꼭 감추어 내 눈에도 띄지 않도록.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멍을 때렸다.


멍 때리는 시간이 길어질 때쯤, 주문한 음료와 바게트가 나왔다. 방금 전 들끓던 잡념은 뒤로 하고 설레는 마음만으로 단밤과 바게트를 갖고 올라왔다. 잔뜩 기대하는 마음으로 음료부터 한 입 했다. 단밤 맛이 진하게 느껴진 탓에 눈이 번쩍 띄었다. 맛있다, 나 단밤 좋아했네….

말차 바게트도 먹기 좋게 잘라 입에 넣었다. 생크림과 말차 맛은 조화롭게 어울렸다. 겉은 버석하고 속은 보드라운 것이 내 취향에 딱 알맞았다.
바게트 한 입, 단밤 한 입, 바게트 한 입, 단밤 한 입… 하는 사이에 복잡한 생각은 조금씩 녹아내렸다. 휴대전화도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던 터라 주머니에 고이 넣어 두고 디저트와 음료의 맛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문득 문득 내가 기다리던 이가 생각 났지만 그래도 달달한 단밤과 바게트의 맛은 그를 잠깐이나마 머릿속에서 녹아 없어지게 해 주었다.

얼마나 먹었을까, 멍을 때리느라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귀여운 냅킨이 갑자기 선명하게 보였다. Dear Guest… 어쩌면 입에 묻은 단밤, 손에 묻은 바게트 크림만 슥 닦아내고 사람 손을 떠나게 될 냅킨 하나까지 섬세하게 신경 쓴 모습. 이 공간 속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그릇과 잔을 깔끔하게 비운 후, 나를 집에 데려다 줄 빨간 버스가 언제쯤 오는지 확인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켰다. 얼마 남지 않은 배터리가 제발 닳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25분 뒤! 극악의 배차 간격으로 나는 또 기다려야만 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버스까지, 오늘은 기다림의 날인가 보다. 그래도 기다림의 미학을 찾으려 애를 썼다. 아니, 애를 썼다기보다는 자연스레 좋게 좋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 버스가 늦게 오니까 좀 더 여유롭게 나갈 수 있어. 금방 온다면 또 헐레벌떡 뛰어 나가야 했을 거야. 또 버스가 늦게 오니까 추운 몸을 좀 더 녹이고 나갈 수 있겠지.
…
오랜 기다림까지 긍정하게 된 데는 달콤한 디저트가 한 몫을 했다.
버스가 신촌 오거리로 점점 다가올 때쯤 나갈 채비를 했다. 탁상 위를 정리하고, 가방 문을 잠그고, 잠바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고…. 지퍼를 더욱 꼭꼭이 여민 것은 아까와 똑같았지만 그래도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뒤숭숭한 심장은 제자리를 찾아갔고, 이기적인 마음씨는 어느새 점점 옅어져갔다. 밖으로 나와 으 추워, 으 추워, 소리를 연신 해댔다. 품이 넉넉한 웃옷 안으로 몸을 숨긴 것은, 아까와는 달리 내 마음을 감추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추워서…라고 해 두자.
춥다, 그래도 좋다.
마음 녹일 곳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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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바게트 메종
서울 서대문구 명물길 28 1층
매일 11:30~23:00, 22:30 라스트 오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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