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무언가(無言歌)
무언가(無言歌)
1.
따뜻한 컵을 한 손에 쥐었다가 펴면, 손에는 온기가 남습니다. 그 손을 다시 볼에 가져다 대면 두 볼에도 역시 기분 좋은 온기만이 남습니다. 열려있는 출입문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실내임에도 움츠러드는 느낌이 싫지 않습니다. 신촌에서 가장 자주 방문하는 공간은 아마 카페일 것입니다. 어떻게 식당보다 카페를 더 많이 갔냐 물으신다면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이야기라 지루하게 들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제가 카페에 오면 잊지 않고 하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다이어리 정리하기. 신촌 생활을 하며 얻은 고질병이라고 해야 할까요. 시간을 나누어 일정을 정리해두지 않으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주 까먹고는 합니다. 시간을 아껴 쓰려는 움직임이 아닌 시간 속에 유의미한 나를 지우지 않으려는 움직임. 저에게는 기록이 그런 의미입니다.

신촌의 오전과 오후, 그리고 나의 스크랩 기록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다시 다이어리를 꺼내들었습니다. 아침에 해야 할 일, 오후에 해야 할 일을 부지런히 정리해야 하기에 아침 일찍 일어나는 걸 선호합니다. — 사실 맛있는 아침밥을 먹으려는 이유가 더 크긴 하지만요. — 다이어리를 다 쓴 후에는 멍하니 밝아오는 해를 맞이합니다. 아침 공기가 차가워지니 정신을 차리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여러분에게 기록은 어떤 의미인가요? 다이어리를 쓰며 매번 기록의 쓸모를 생각합니다. 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일까 아님 나를 구속하는 장치에 불과한 것일까. 어느 쪽이든 나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아, 이쯤 되니 손으로 쓰는 기록만을 기록이라 여기는 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의 기록은 우리의 걸음이 닿는 곳마다 존재합니다. 지금 당장 여러분의 손에 쥐어진 핸드폰 속 전화 기록과 사진 앨범에서부터 어딘가를 방문한 기록, 병원의 진료 기록, 사이버 캠퍼스의 출석부, 책상 위 놓인 일기장까지. 기록은 어느 곳에나 우리 곁에 머물고 있습니다. 기록은 우리의 일상을 이루고 있습니다.
시곗바늘은 어느새 여덟시 오십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번 학기는 유독 아침 수업이 많기에 서둘러 집을 나섭니다. 학교까지는 걸어서 20분. 발아래에선 미처 치워지지 못한 가을의 흔적들이 느껴졌고, 성큼 다가온 겨울바람이 두 뺨을 스칩니다. 신촌에서 맞는 두 번째 겨울입니다. 올해는 어떤 겨울을 보내게 될까요? 작년 겨울은 일하던 카페에서 겨울의 모든 요소를 즐겼습니다. 눈, 크리스마스, 겨울 플레이리스트, 온기.. 그 시절을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이 멈추지 않습니다. 추억은 주책입니다. 갑작스레 찾아와서 눈시울을 붉어지게 만드니 말입니다. 수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발걸음을 더 서둘러야겠습니다.
무언가(無言歌)
2.

신촌에서 마주하는 계절의 변화와 사랑의 기록
일상은 가사 없는 노래와도 같습니다. 기록의 나열이 악상을 이루고, 여러 기호가 그려진 악상은 하나의 음악으로 연주됩니다. 특별한 가사와 부가적인 설명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기록이 만들어 낸 소리를 고요히 듣고 있는 것만으로 그이의 하루가 상상되기 때문입니다. 신촌은 모르는 이의 노랫소리로 가득합니다. 저마다의 속도, 크기, 리듬을 가지며 흘러갑니다. 여러 선율이 섞여 발생하는 소리는 곧 신촌이라는 이름을 빌려 무언가(無言歌)가 됩니다.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익숙하게 들리던 노랫소리가 끊기고 곧 낯선 음이 섞여서 들리겠죠. 서늘한 공간에는 금세 더운 열기가 차오를 것이고 앙상했던 나뭇가지에는 분홍빛 꽃이 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반복. 변화하는 풍경과 더불어 사람들 사이에도 파도가 일렁입니다. 새로운 해가 떠오르면 신촌을 떠난 이들의 빈자리가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지고 다시 북적이다가 고요해지기를 반복하겠죠. 변화와 반복을 거듭하는 신촌이 이젠 익숙하기만 합니다.

등굣길, 이화여대 캠퍼스와 강의실 기록
제게 신촌은 타오르는 젊음의 초상과도 같았습니다. 젊은이들의 열기가 타오르며, 뭐든 해낼 수 있고, 원하는 걸 자유로이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긍정의 공간. 여전히 제게 신촌은 그런 의미로 다가오긴 합니다만… 요즘은 왠지 젊게 살려다 다 늙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십 대라는 나이가 주는 기회, 열정, 포부, 자신감 등을 생산적인 일에 써야 한다는 당찬 다짐은 시간을 거듭할수록 저를 압박해 왔습니다. 남들만큼 해야 한다는 압박은 실체 없는 감정에 불과한 고민거리 정도였지만, 기록이라는 도구를 빌려 점차 형체를 갖추어 갔습니다. 다이어리에도, 모든 전자기기의 메모장에도 학기 중 해내야 하는 목표를 빼곡하게 채워갔습니다. 이제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지도 잘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제게 흐르는 선율이 듣기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판단하지 못하겠습니다. 선율을 따라 부드러이 흐르는 게 아니라 선율에 쫓기는 듯한, 선율로부터 도망치고 있는듯한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요.
무언가(無言歌)
3.
신촌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 기록
| 왼쪽 위부터 차례대로 1. 해피앤피스클럽, 2023-2 첫 웹진 글 2. 카페 YAY, 2023-1 마지막 웹진 글 3. ECC 돌계단, 봄을 즐기는 공간 4. 이디야 커피, 카공하러 가는 공간 5. 내사랑, 2023-1 실물잡지 vol.3 <각자의 신촌> 6. 이화여대 기숙사, 1학년 때 가장 좋아한 공간 7. 컴포즈 커피, 작년 겨울 기록 8. 낮과밤, 좋아하는 밥약 공간 9. 좋아하는 음료인 카페라테와 ECC 둥근 테이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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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직 신촌을 좋아하냐 물으신다면 그렇다고 답하고 싶습니다. 모든 사랑의 기록들이 남아있는 공간을 어떻게 쉽게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신촌은 우울과 기쁨의 교집합에 있습니다. 동그란 두 원 사이, 타원형의 외딴섬에는 사랑해 마지않은 무언가인 ‘신촌’이 존재합니다. 신촌의 골목마다 소중한, 사랑하는, 고마운, 보고 싶은, 그리고 약간은 미안한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의 기록이 존재합니다. 여러분도 신촌에서 함께한 사람을 떠올리면 앞에 어떤 수식어가 붙으시나요? 제 경우에는 긍정적인 단어 뒤에 꼭 미안하다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관계는 깊어질수록 더 아쉬움이 남는 법이기에 양가적인 감정이 섞이는 것 같습니다.
마음을 표현하는 일은 아직 어렵지만, 신촌에서 생활한 뒤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감정을 표현하는 일에는 익숙해졌습니다. 감정을 숨기는 것보다 표현하는 게 득이라는 것을 배우는 요즘입니다. 특히 사랑은 표현할수록 더 커집니다. 반복하여 내뱉을수록 선명해지는 게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것을 기록하고 남겨두지 않는다면, 우리의 사랑은 수증기 찬 버스 창문에 그린 하트처럼 쉬이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신촌에서 시간을 함께한 사람들과의 기록
| 왼쪽부터 순서대로 1. 카페코지 2. 이화여대 대동제 3. 홍대개미 4. 타이완소야 5. 컴포즈 커피 6. ECC 둥근테이블 7. 미스타교자 8. 파운더리 베이크샵 9. 낮과밤 |
사람들은 오래된 유적에도, 남산의 자물쇠에도, 허물어져 가는 오랜 술집의 벽면에도 기록을 남깁니다. 사랑은 특히 날아가기 쉬운 무언가입니다. 다른 맹세에 비해 쉽게 사라지기 때문에 물리적인 무언가에 사랑을 새기는 것이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긴 내 마음의 반을 나누어주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 말입니다. 저 역시 작년 가을 영원한 우정을 기리며 술집 한편에 친구들과 이름을 적어두었습니다. 이름이 남겨진 술집은 방문한 지 오래되었고, 모두 바쁜 탓에 모이는 게 쉽지 않지만, 여전히 우리의 사랑은 그곳에 남아 있습니다. 네임펜으로 꾹꾹 눌러쓴 다른 이들의 추억이 우리의 사랑을 까맣게 덮어버려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사랑하며 사는 걸 잊지 않기 위해 꼭 기록해야 합니다.
4.

신촌과 밤의 기록
일기장을 다 채워갑니다. 올해의 목표는 일기장 한 권을 빼곡히 채우는 것이었는데.. 일기를 건너뛰는 날이 꽤 있다 보니 아직 다 채우지 못한 게 아쉽기만 합니다. 아, 또 목표라는 말을 내뱉어 버렸네요. 어쩌면 목표 그 자체가 신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록의 행위는 불완전함에서 비롯되기에 완성되지 못한 청춘이 가득한 이곳이 바로 기록 그 자체일지도. 불완전한 신촌과는 반대로 계절의 공기는 완전한 겨울의 온도를 하고 있습니다. 가끔 제 선율에서 듣기 싫은 소음이 섞여 들려도, 선율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도통 찾지 못하더라도, 다시 제 자리를 찾는 힘을 가진 게 바로 청춘이기에 날마다 힘차게 살아보려 합니다. 일기 한 편을 적으며 오늘의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새로운 내일을 기대하며!
내년 다이어리도 어서 주문해야겠습니다. 새로운 기록들로 또 다른 무언가(無言歌)를 만들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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