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TO ZANCHI! · 신촌을 사랑하고, 추억하고,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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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2024 · 03 · 18

머무르는 이들이 있었음을

Editor 찬란

 

 

 

머무르다

①움직이다가 중도에서 그치다.
②뒤에 처지어 남아있다. 또, 있던 자리에 그냥 있다.

 

유는 국어사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꽤 오래 떨구고 있었던 탓인지 목덜미가 뻐근했다.

 

유는 머무름을 생각할 때마다 괜시리 마음 한 구석이 슬퍼지고는 했다. 존재를 의탁하는 순간이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잠시 머무르는 존재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이곳을 언젠가는 떠나야만 한다.

유는, 늘 그랬듯이, 단정적인 어조로 성실하게 읊는다.

 

그러다 문득 유는, 본인이 발 붙인 이곳에 대해 생각했다.

이곳 또한 우리가 잠시 머무르는 곳이다. 

우리가 경유하는 이 땅의 이름은 신촌. 젊음을 잠시 잠깐 맡겨두고 생의 구간을 살아내는 곳. 우리의 젊음에는 각기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있을 테다. 그 질감과 색이 참 상이해 도무지 같은 이름으로 부를 수가 없다. 우리가 신촌에게 위탁한 무언가의 공통점을 굳이 찾는다면 ― 그것들은 다 도중에 멎거나 남아있는 것일 터.

 

그렇게,

잠시 머무르는 것이라고.

 

 

 

1

 

정은 바람이었다. 어느 한 곳에 의탁하기보다 이쪽저쪽으로 흘러가는 사람. 정은 세상의 어느 한 곳에 단단히 뿌리박고 서지 않았다. 머무름. 그건 정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 해는 정이 신촌에서 일했던 해였다. 몇몇 지역을 자유로이 오가다 다음 행선지로 선택한 곳은 이곳 신촌. 가지고 있던 미용 기술을 활용해 수완 좋게 어느 미용실에 일자리를 구했다. 미용실은 2층에 있었다. 로터리 근처에 자리 잡은 그곳은 8차선 도로를 따라 몇 줄기로 갈라진 골목 안쪽에서 존재감을 뽐냈다. 골목골목을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한껏 꾸민 옷을 입고 신촌을 오가는 사람들. 어둑해질수록 화려해지는 사람들.

 

정은 미용실에서만 일하지 않았다. 어느 날은 식당 보조 일. 어느 날은 가게의 경리. 그녀가 바쁘게 이 땅을 오가며 남긴 족적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기억은 얄궂어 물리적으로 쌓인 분초보다 상대적인 감각만을 남긴다. 정이 신촌에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곳에 안긴 정의 세상은 길이 남을 만했다. 아스팔트 바닥에 남은 정의 또각거리는 발소리는 쌓이고 쌓여 명징한 기억이 되었다. 

 

정은 종종 그녀의 딸인 선의 손을 잡고 이대 앞에 있는 양장점이며 백화점 근처를 쏘다녔다. 선이 착용하고 있는 구두며 원피스는 모두 정의 취향.

 

 

 

2

 

선은 신촌에 살지 않았다. 선이 살던 곳은 도시 외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선은 그곳에서 조부모와 함께 셋이 살았다. 조금만 더 나가면 있는 읍내의 터미널에서 광역버스를 하나 잡아 타면 바로 신촌으로 갈 수 있었다. 한 시간 이십 분만 달리면 선이 살던 동네와는 사뭇 다른 도시의 풍경이 펼쳐졌다. 신촌은 선의 엄마인 정의 일터였다. 선은 주말마다 신촌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선은 본인이 두 개의 삶을 사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는 했다. 고요하고 지루한 평일의 동네, 왁자지껄하고 시끄러운 주말의 신촌.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 끝없이 펼쳐진 곳과 미끈하게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즐비한 곳. 두 삶은 참 대비되었다.

 

정은 항상 바빴다. 신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바쁘게 일을 하느라 여유 없이 뛰었다. 그래서 선은 정의 주위를 조용히 관찰하는 걸 무료한 일상의 낙으로 삼았다.

 

어느 날에는 일을 나간 정의 방에서 하루종일 텔레비전을 보고 있기도 했다. 정의 방은 골목골목마다 빽빽하게 자리잡은 집들 중 하나였다. 오밀조밀 붙어있는 건물이 선이 살고 있던 그곳과는 사뭇 달랐다. 

어떤 날에는 정이 일하는 미용실에 따라 나가 턱을 괴고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고는 했다. 손님들이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다정히 한 마디 건네는 일도 종종 있었다. 

 

정이 일하던 미용실. 선이 앉아있다.

 

미용실에 있다 보면 창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로터리가 뿌연 연기로 가득 찰 때도 있었다. 시끄러운 폭발음과 병 깨지는 소리, 정신없는 말 소리가 중첩되어 창 너머로 어렴풋이 들렸다. 그러면 정은 수건에 치약을 가득 짜서 한 번 접었다. 그리고는 선에게 코와 입을 그걸로 막으라고 말했다. 무심코 그 수건을 떼버렸다가 너무 매워 한참 기침한 후로, 선은 얌전히 정의 말을 들었다. 자욱한 연기를 뚫고 한 무리의 학생들이 미용실로 올라온 적도 있었다. 그들의 옷과 몸에는 맵디매운 향이 배어있었다. 학생들은 잠시 숨어있다 소란스러움이 잦아들고 나서야 나갔다. 사장과 정은 그들에게도 수건을 건넸다. 앞 가게의 아저씨는 호스를 길게 끌고 와 그들의 얼굴을 흐르는 물로 씻어줬다. 선의 기억 중에서는 반추해보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는 일도 있었다.

 

정이 선을 신경 쓸 수 없을 만큼 바쁜 날에는 혼자 시간을 보냈다. 정이 선의 손에 쥐여준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들고 온갖 세상의 예쁘고 맛있는 것들이 즐비한 거리로 나섰다. 로터리 건너에는 크리스탈 백화점*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으리으리한 건물 앞으로 나있는 개미굴 같은 시장**은 선이 매일 같이 들르는 곳이었다. 빛나는 브로치부터 형형색색의 양말, 매콤한 냄새를 풍기는 떡볶이가 선의 발길을 끌었다. 상인들과 가판대 위 물건의 유혹을 꾹 참고 지나가다 보면 백화점 바로 앞에 닿을 수 있었다. 선은 그곳에서 파는 쿠키를 참 좋아했다. 그렇게 손에 쿠키 하나를 쥐고 거듭 바삭거렸다.

 

선은 그 저녁, 저보다 두 뼘은 넘게 큰 어른들 사이를 익숙하다는 듯이 비껴 걸었다.

 

*지금은 이마트가 자리 잡은 곳. 크리스탈 백화점 – 그랜드 마트 – 이마트로의 이행을 겪었다.

**지금은 현대백화점이 자리 잡은 곳. 신촌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3

 

유는 수업이 끝나고 후문으로 걸어 나왔다. 왁자지껄한 주위의 활력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유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로 발걸음을 옮긴다. 낮에 들여다 본 사전 때문이었을까.

 

왜 우리는 잠시 머물다 갈 공간을 이다지도 사랑할까.

 

정과 선에게 과거의 편린을 캐물은 건 유다. 정과 선이 지나쳐 온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도 유다. 신촌 다 죽었잖아. 상권도 옛날에 비하면 뭐…하는 말에 살아보지도 못했으나 분명 찬란했던 신촌의 서사를 줄줄 읊고 싶어하는 사람 역시 유다. 

 

유의 생 곳곳에 널린 조각은 비단 공간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유는 이 땅에 가만히 귀를 대고 눈을 감아본다. 정과 선, 그러니까 그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서사가 고요히 울리며 존재감을 뽐낸다. 젊음이라는 이름의 생 한 조각을 잠시 의탁한 사람들의 단상으로 유의 신촌이 설명된다. 유는 그들이 여기에 아직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알게 된 이상 이곳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다.

 

 

별일이 없어도 이 거리를 거닌다. 유는 이대 후문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지난다. 그리고는 세브란스 건너 있는 육교 너머로 천천히 발을 움직인다. 해 질 무렵이다. 버스가 육교 아래로 나다닌다. 육중한 버스 사이로 젖어든 황혼의 빛이 보였다가 다시 사라지고, 거듭 제 빛을 쨍쨍하게 내뱉기를 반복한다. 나이 먹은 전신주 사이로 보이는 횡단보도와 초봄의 거리를 새삼스레 반가워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유는 문득 생각한다. 머무름의 끝에 서 있는 슬픈 인사를 미리 준비할 필요는 없겠다고. 

 

 

떠났지만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이 땅 깊숙한 곳 잠들어 있는 젊음의 향기가 그윽하게 풍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이기도, 선이기도, 유기도 하다. 이곳과 지독하게 얽힌 우리들은 각기 다른 젊음을 안고 있다. 그리고 각자의 생이 겹친 이곳을 사랑한다.

 

분명 머무르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찬란
AUTHOR PROFILE
찬란

잔치의 시선으로 신촌의 장면과 사람, 장소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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