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 그리고 지금 여기
내가 누군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도대체 나라는 인물은 무엇으로 정의되는 걸까? 좋아하는 것, 미래나 꿈, 함께하는 사람들…
변하지 않는‘나’라는 것이 정말 있긴 한 걸까.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는 때로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떨 때는 사람들 틈에 껴 시끌벅적함을 즐기다 어떨 땐 제발 모두 나를 내버려두었으면 한다.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 같다가도 때로 시시한 감성 글에 코끝이 찡해지기도 한다. 어제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이제 알 것 같아.’그런 말을 일기장에 끄적인 것 같은데, 다음 날 아침이 되니 그런 건 모르겠고 잠이나 몇 분 더 자고 싶은 철부지 모습 그대로 돌아온다.
이제 나를 소개하는 것조차 겁이 난다. 그게 정말 나일까, 아니면 나라고 믿고 싶은 걸까.
나를 이리저리 분해하고 파헤쳐서 답 없는 궁상 끝을 보려던 참이었다. 시끌시끌, 와글와글. 사람들로부터 조금 벗어나고 싶었다. 분명 속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닿을 일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숨고 싶은 마음에 자꾸만 밖으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캠퍼스라 부를만한 경계를 약간 벗어나 연희동으로 넘어가기 전 건널목, 그 뒤에 그로밋커피하우스가 있다.

그 공간은 자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하는 것처럼 통유리를 통해 내부를 훤히 보여준다. 커다란 에스프레소 기계, 늘어진 핸드드립 도구, 커피향이 물씬 날 것 같은 우드톤 브라운 인테리어. 가게 이름은 잘 몰라도 그래, 너 커피하우스구나. 내부로 들어가면 풍기는 풍부한 커피향에 다시 한 번 이 공간이 커피를 위한, 혹은 커피를 사랑하는 이를 위한 공간임을 알 수 있다.

메뉴판은 두 종류. 하나는 손으로 직접 적은 핸드드립 원두 메뉴판, 또 다른 하나는 시그니처 커피와 디저트가 적힌 메뉴판. 핸드드립 종류가 특히 많다. 카라멜향, 상큼한 과일향, 다크하게 로스팅된 원두… 커피콩을 볶아 우린 물도 저마다 이름과 특색이 있다.
오늘은 이름만으로는 도저히 정체를 알기 어려운 시그니처 커피와 늘 시키던 비스코티 하나…를 시키려고 했지만, 메뉴를 개편하며 사라졌다고. 오픈 몇 분 뒤면 가게를 가득 채우는 비스코티 굽는 냄새까지 카페의 일부처럼 여기곤 했던 내게 충격적인 소식이다. 비스코티 대신 새로 들어온 디저트를 주문한다. 애정하던 비스코티를 밀어내고 감히 자리잡은 신메뉴의 정체를 알아야겠다는 다소 따가운 시선과 함께.

그렇게 앞에 내어진 한 잔의 커피와 디저트. 시그니처 커피 포티올리는 진한 모카와 크림, 그리고 에스프레소가 조합된 달콤한 커피다. 첫 모금은 부드러운 크림이 혀에 먼저 닿아 온 신경이 짜릿해질 만큼 달콤하다. 두 모금째, 아래 숨어있던 에스프레소가 크림과 섞이며 커피향을 입안에 가득 채운다. 세 모금쯤 되면 모카, 크림, 에스프레소가 한데 모여 새로운 커피가 된다. 분명 커피 한 잔이었는데 이렇게나 다채로운 맛이라니. 커피를 어느 정도 비우고 나서야 디저트로 시선을 옮긴다. 피칸바나나브레드는 구석구석 은은한 바나나향을 품고 있다. 올라간 크림이 달지 않아 풍미를 배로 즐길 수 있다. 오케이, 합격. 비스코티의 후계자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결론내린다.
완벽한 커피와 성공적인 디저트에 아까의 혼란은 잠시 잊고 행복감이 서서히 차오른다. 와중에 마음을 사로잡은 건, 포티올리에 대한 짧은 설명. 이 한 잔이 어디서 왔는지 소개하는 작은 카드. 포티올리 입장에서는 명함인 셈이다.

포티올리는 저의 아버지가 2000년부터 운영했던 카페의 상호입니다.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생소한 커피문화가 이제 막 우리나라에 들어오던 시절,
초등학생이었던 저는 아버지의 카페에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았고
그때의 경험이 이어져 지금 제가 커피를 하게 된 시작점이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고작 해봐야 명함에 쓸 게 어느 대학 무슨 학과 누구누구인 나와는 달리 낭만적인 자기소개다. 그제야 이 공간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누가 보아도 커피를 위한 공간. 오픈바와 테이블, 구석구석 놓인 작은 소품, 고민이 담긴 시그니처 커피, 손으로 쓴 메뉴판. 가게에 풍기는 향이며 내부의 조도며, 모든 게 잘 짜인 교향곡처럼 느껴지는 이유. 모든 게 바로 이 시작점에서 왔음을 알기 때문일지도. 닳도록 만졌을 시작의 순간이 눈에 그려진다. 2000년대의 포티올리가 지금의 그로밋커피하우스가 되기까지의 시간.

지금의 나를 이루는 모든 것들도 아마 시작점이 있었을 텐데.
나와 지금 이 커피도, 분명 시작점이 있었다. 처음 커피를 마셨던 건, 시험 전날 덜컥 산 커피우유. 어마무시한 달콤함, 그리고 빨리 뛰는 심장을 느끼며 이것이 커피구나, 믿어버렸다. 이후 그 달콤함을 기대하고 시킨 카페라떼는 매우 실망스러웠으나 어쩐지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게 어른이 됐다는 증거 같아 종종 들이키곤 했다. 아메리카노에서 쓴맛을 느끼지 못할 무렵, 하루 한 잔 커피는 필수가 되었다. 스물, 카페 알바를 하며 에스프레소 내리는 법을 배우고, 카페라떼와 카푸치노의 차이를 맛으로는 몰라도 만드는 법으로 구분하게 됐을 때쯤에도, 내가 커피를 대하는 기준은 오직 ‘시급으로 몇 번 사 먹을 수 있는가’ 정도였다.
대학교 첫 여름방학은 생각보다 덥고 습하고 짜증 났다. 우연히 들어간 커피 전문점에서 설명만으로 도무지 맛이 상상되지 않는 핸드드립 커피를 팔았다. 추천받아 시킨 오늘의 커피, 결제 금액을 보고 놀란 표정을 애써 숨겼다. 시급보다 비싼 값을 해야 하는 게 아니냐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입안에 가득 퍼지는 향과 끝에 남는 잔잔한 여운. 까만 콩물 주제에 새콤하고 시원하고 청량했다.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다. 카페라떼와 카푸치노를 혀로 구별하게 되고, 세 달 뒤에는 원두의 산미를 따지기 시작하고, 또 시간이 꽤 흘러 그다음 여름엔 책상 한편에 취향에 맞는 원두를 놓아두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 그로밋커피하우스에서 포티올리 한 잔으로 돌아온다.

머리가 띵하게 달콤한 포티올리, 그리고 어느새 내 맘에 쏙 들어버린 낯선 디저트와 함께 찬찬히 내 모든 것들의 시작점을 추적한다.
대학 생활의 시작, 첫사랑의 시작, 꿈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의 시작…
어떤 기억은 잊고 있다가 다시 발견해 반갑기도 하고, 돌아갈 수 없는 과거라는 점에서 아득히 그립다가, 닳도록 되뇌던 순간을 또다시 떠올리고.
그러다… 이 모든 게 나구나.
나에게도 낭만적인 명함을 만들 기회가 있다면, 어디의 누구 말고 시작의 순간을 적고 싶다. 시작점이 있어 지금의 내가 있으니,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나를 안아줘야지. 한없이 애틋해진다. 지금 여기도 시작점이 될까.

그로밋커피하우스
서대문구 연희로8길 16-6
영업시간 평일 11:00-21:00 주말 12:00-21:00
인스타 @grommetcoffeehouse



하하~ 정말 이 모든게 나네요!! 공감하면서 읽었습니다 ㅎㅎ
하하~ 정말 이 모든게 나네요!! 공감하면서 읽었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