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TO ZANCHI! · 신촌을 사랑하고, 추억하고,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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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2024 · 04 · 03

217. 네가 꿈꾸는 곳의 이름은

Editor 현

지금 여기, 서울 지하철 2호선. 

출입문 닫습니다. 출입문 닫습니다. 

잠시 멍때리다가 못 내릴 뻔했다. 서둘러 이대역에서 내린다. 사람들에게 치이며 두 눈엔 피곤이, 플랫폼을 걷는 발걸음에는 조금이라도 건드렸다간 ‘어디 한 번 해보자’고 외칠 듯 살기가 느껴진다. 소리 내 외칠 용기까지는 없어 속으로 되뇐다. 서울은… 사람이 너무 많다…고.

맞다. 이건 나다. 주어는 상경한 지방 사람.

 

 

어렸을 때, 그런 걸 꿈꿨다. 사람 가득한 도시의 구성원이 되는 것. 파란빛의 빼곡한 건물 사이를 걸어 다니면서, 그야말로 대규모 속에서 살아가는 삶. 날씨가 좋지 않으면 해무가 잔뜩 끼는, 바다가 보이는 버스정류장에 내리던 어린 내가 얘기한다. ‘난 도시가 좋아!’라고.

지금 무표정으로 인파 사이를 지나는 나는 그 꿈을 어느 정도 이룬 것 같다. 그렇지만 과연 이게 내가 꿈꾸던 게 맞나, 갸우뚱거리며 의문을 품는다.

 

 

…지금도 이곳이 싫은 건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이곳을 이루는 것들에 좀 질린 것 같다는 의심이 든다. 도시의 ‘진짜’ 얼굴을 본 것 같은 기분. 매일같이 생기는 사건사고와 터무니없이 높은 인구밀집도, 버석한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들. 나도 생기 없이 죽은 눈을 하고 개찰구를 빠져나오다가, 덜컥 그 어렸던 내게 말을 걸고 싶어진다. 도대체 이곳이 왜 좋은 건지, 진지하게 고민 좀 해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촌은, 대규모를 꿈꾸기에는 딱 좋은 곳임은 틀림없을 거다. 일단 이곳은, 젊음이 너무 적나라하게 많지 않은가. 어린 얼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내린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신촌을 지키고 있던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 너무너무너무의 연속. 신촌의 포화 현상.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곳, 신촌은 너무나도 빽빽하다.

사람이 많기에 타인과 너무 가까운 것 같기도, 동시에 너무 먼 것 같기도 한 양가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그 묘한 삐그덕거림이 아름다운. 그리고 그건 아무래도, 대규모라는 정체성이 신촌에 부여하는 특성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신촌에도 거대함을 꿈꾸지 않는 곳은 있다. 고래가 물 위로 나와 호흡하듯, 살아가기 위해 사람들이 내놓은 숨구멍 같은 공간들. 우리는 그걸 뭐라고 부를까. 우리만의 아지트? 내 쉼터? 혼자일 수 있는 공간? …누군가는 이렇게 답한다.

 

소규모. 

고민하던 게 무색할 만큼 아주 직관적이고 깔끔한 단어로. 하지만 그래서 더 마음 놓고 편안해질 수 있게.

 

이대역 5번 출구에서 나와 걷는다. 결코 완만하지 않은 언덕을 가로지르면 나 같은 ‘운동 부족’은 숨이 금방 찬다. 그렇게 다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는 신촌의 소규모. 누군가의 아지트, 숨구멍, 쉼터.

 

 

*그렇지만 주의.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 다 그렇듯, 이렇게 작은 공간은 눈에 불을 켜고 찾아야 발견할 수 있다. 이곳의 묘미는 걸어가다 한 번은 못 보고 지나쳐줘야, 진짜 ‘소규모’네!라고 외치며 다시 돌아오는 맛에 있는 것처럼.

여긴 <술식당 소규모>. 신촌에서도 염리동, 그중에서도 공간을 기가 막히게 분리해 월세를 배분한 듯한 주택 1층에 위치한 작은 술집이다. *최대 2인까지 입장 가능. 혼술 환영. 길을 나서기 전, 미리 찾아봤던 인스타그램 계정의 소개말을 떠올리며 유리문을 열고 들어간다. 나를 맞이하는 작은 공간. 이 모든 것이 지금 나에게는 도시의 부하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이곳은 대규모 신촌을 피해 도망쳐 온 사람들의 공간일까.

 

 

 

 

 

 

가게를 이루는 건 10명 남짓 앉을 법한 바 테이블. 주문받고 요리하는 사장님. 그리고 공간을 한껏 채우고 있는 이국적인 요소들: 벽면에 붙은 각종 포스터, 국적을 가리지 않는 아시아 음식, 은은하게 흐르는 j-pop.

 

 

<술식당 소규모>의 메뉴판. -3월 버전이다.-

사장님이 직접 쓰신 듯한 메뉴판은 시기마다 구성이 달라진다. 나는 메뉴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게 너무너무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만든 신촌의 모습과 닮았음을 떠올린다. 이곳저곳에서 가져온 맛있는 음식. 그리고 가끔은 각자의 출처지가 헷갈리기도 하지만, 신촌에 모여 어떤 리듬을 만들어가며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는 너무 다르기도, 또 비슷하기도 하니까. 가끔은 너와 나를 구분 짓지 못해 흐리멍덩한 ‘우리’를 껴안고 살아가기도, 또 어떤 날은 너무나도 명확하게 그어진 선에 서로의 마음이 상처를 받기도 하는.

그런 신촌의 모습과 <술식당 소규모>의 메뉴는 퍽 닮았다. 다양한 곳으로부터 모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들은 메뉴판에서 금방 사라지기도, 오래 자리를 지키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것저것 맛있는 걸 팔고 있다는 얘기를 이렇게 길게 했다.

 

 

 

 

적당한 메뉴를 시키고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본다. 바 테이블 안쪽의 작은 모니터에서, 가게에 흐르는 j-pop이 입혀진 영상이 흐르고 있다. 내 바로 옆에 앉은 모르는 사람이 메뉴를 고민하는 소리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대화에 슬쩍 참여해 버린다. 물론 속으로.

 

손님: 가지 튀김은 양이 많나요?

사장님: 가지 1개를 씁니다.

 

나: (속으로) 오, 가지 하나를 다 쓰는군. 완전 혜자네요.

 

소규모 속의 대화는 이렇게 살짝 변태처럼 이야기를 훔쳐 듣는 나를 포함하여 흘러간다. 작은 공간, 사이 간격이 넓지 않은 바 테이블은 옆자리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도 듣게 하는 경험을 하게 만들기에. 가지 튀김을 고민하던 손님이, 다른 손님이 먹는 모습을 힐끔 훔쳐보곤 치킨 가라아게도 하나 주세요. 하고 외치는 것처럼. 하이볼을 시킨 옆자리 손님이 덜그럭덜그럭 얼음을 튀겨대며 술을 섞는 소리도, 시답잖은 대화 소리도, 작게 터지는 웃음소리도 모두 함께 앉아 들을 수 있는 곳.  

문득 이곳이 다름 아닌 ‘대규모 속 소규모’의 모습은 아닐까, 하고 떠올리게 만드는 장소. 

 

너무나도 가까워 들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 들을 수밖에 없었던 ‘바삭’하고 치킨 가라아게를 베어 무는 소리. 맡을 수밖에 없던 마늘 알배추 찜의 고소한 냄새.

이건 소규모에서도 벗어날 수 없는 신촌의, 대규모의 빽빽함인 걸까.

 

 

오미자 하이랑 게살 두부 올려드릴게요.

불쑥 생각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사장님의 말.

이런저런 상념에는 맛있는 음식과 술을 들이붓는 게 최고다. 오늘의 선택은 오미자 하이와 게살 두부. 잘 섞어서 드세요 하는 사장님의 말에 오미자 하이를 열심히 섞어 한 모금 마시면, 달달한 오미자 향이 혀끝을 통해 얼굴을 감싸온다. 얼른 게살 두부도 한 입. 마냥 슴슴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뜨끈한 국물과 부드러운 두부, 휙 하고 존재감을 나타내는 게살에 적당한 간이 느껴진다. 따지자면 술보단 안주에 관심이 많은 나는 잠시 신촌에 대한 고민을 뒤로하고 열심히 먹고, 마신다.

 

그릇이 반쯤 비워지고 오미자 하이의 달달함을 충분히 느끼고 나면, 슬쩍 몸을 감싸는 노곤함과 함께 다른 손님들의 대화가 다시 귀에 들어온다.

 

 

손님1: 더 저어야 돼. (그는 아까 덜그럭대며 하이볼을 섞던 손님이다. 하이볼을 뒤늦게 시킨 일행에게 조언을 건네는 중인듯.)

손님2: 됐어. 이 정도면 돼. 건배하자.

짠~. 각자 한 모금 마신다.

손님2: 음, 그러네. 더 잘 저어야 되네…

 

나: (역시 속으로. 끄덕거리며) 맞아요. 얼음이 다 튀길 만큼 열심히 저어야 된다구요.

 

 

나는 오늘 혼자 방문했지만, 이 공간에서의 ‘혼자’는 그렇게 신경 쓰이는 요소가 아니다. <술식당 소규모>는 소규모의 우리를 기다려주는 곳이기에. 동시에 이 바 테이블에 붙어 앉아 모르는 타인들의 대화에 슬쩍 말을 얹기도 하는, 무척이나 신촌스러운 대규모의 공간이기도 하면서. 

 

그 양면성은 이 소규모에서 장점이 된다. 그리고 소규모 같은 대규모 같은 소규모 속에 앉은 나에게도 어떤 깨달음을 준다. 내가 질린다고 생각했던 신촌의 빽빽함은, 사실 신촌이기에 가질 수 있는 매력이 아닐까, 하고. 

시계를 쳐다보면 지금 시간은 9시를 지나고 있다. 신촌의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거리엔 젊은 얼굴들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득하겠지. 많은 사람들과 네온사인 속을 걸어가는 ‘신촌의 나’를 상상한다. 얼마 남지 않은 오미자 하이를 한 모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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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렇지만 역시 나는, 이런 대규모마저 사랑하는구나. 그리고 신촌은 질릴 수 있는 대상도 아닌 것 같다.

 

마냥 ‘도시 사람’이 되고 싶었던 어린 날의 나. 하지만 막상 진짜 도시가 뭔지는 몰랐던 것 같다. 그 애에게 말을 걸며 다그치기보다는, 먼저 알려주고 싶은 ‘진짜’가 하나 생겼다.

 

너무 많기 때문에 아름다운, 사람들이 만든 도시, 거기에 신촌이 있다고. 결국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 존재의 가치가 있는 것. 그리고 대규모 속에, 나름대로 이름을 가진 소규모들이 있을 거라고. <술식당 소규모>처럼.

<술식당 소규모>는 사람들이 도망쳐 오는 곳이 아니다. 그저, 그냥 신촌의 소규모일 뿐.

 

어린 나야, 얼른 커라. 꽤 멋진 곳이 널 기다리고 있단다. 네가 꿈꾸는 도시. 그곳의 이름은 신촌, 어쩌면 우리의 소규모일지도.

 

 

게살 두부의 마지막 숟갈을 한입에 넣는다. 식어도 맛있다. -한 입 먹자마자 검색해 본 건데, 게살 두부는 씨에펀또푸라고 하는 중국 요리다.-

마음 같아선 안주 하나, 신선한 생맥주 한 잔을 시켜 좀 더 머무르고 싶지만, 다음 방문을 위해 오늘은 이만 참는다. 그리고 다짐한다. 다음번엔 나와 같은 타지에서 온 친구를 데려와야겠다고. 두 명까지 입장 가능하니까 딱 한 명만. 그리고 이 바 테이블에 둘러앉아, 사장님의 메뉴판에서 살아남은 메뉴와 술을 시키고 그에게 물어야겠다. 너도 ‘도시’를 꿈꿨었어? 우리 이 신촌에 대해, 이곳의 이름에 대해 얘기 좀 해보자, 고 말하면서.

 

 

 

 

술식당소규모

서울 마포구 대흥로30길 20

영업시간 화요일-토요일 18:00-02:00, 라스트오더 01:00 (일, 월 정기 휴무)

(갑작스러운 휴무는 인스타그램에 공지된다. @smallscale117을 참고 바람.)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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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고개를 사랑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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