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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2024 · 04 · 10

218. 집을 여행하다, PAO

Editor 라미

#프롤로그

우리 모두는 집이 있으나 집이 없습니다.

새들도 돌아갈 곳이 있는데 인간들만 부표처럼 표류 합니다.

PAO(파오)는 몽골식 주택인 게르의 중국식 표현입니다.

파오는 사람들에게 곁을 내주어 친구가 되고 휴식처가 되고 날개가 되고 처마가 되려 합니다.

잠시 머무는 동안에 만나게 될 책을 통해, 이곳에서 만나게 될 모든 이들을 통해.

나를 찾는 여행을 꿈꾸고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가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세상 곳곳으로 나아가 만나게 될 많은 것들을

잠시나마 이곳에서 먼저 찾으면 좋겠습니다.

(PAO 소개 글 中) 

 

 

#1

우리의 집은 어디일까요? 마음 편히 돌아갈 곳, 오래 머무른 익숙한 곳… 지난 생활을 돌아보면 삶의 터전은 잇달아 바뀌었습니다. 놀이터가 가까운 아파트에서, 눅눅한 학교 기숙사, 대학 생활을 시작한 신촌에 오기까지. 타인의 공간에 세를 들며 짤막한 삶만 이어왔습니다. 한 곳에 뿌리내리고 싶은 소망도 있었지만, 금세 지나갈 순간이라는 생각에 섣불리 정을 붙일 수 없었습니다. 의무가 있는 곳에 정직하게 머무르다 보니, 공간에 대한 애정보다도 부담감이 앞섰습니다. 특히 신촌의 자취방은 난생처음 시간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자유를 쥐여준 대신, 24시간을 쪼개 촘촘히 살고 나서야 발 뻗고 잠들 수 있도록 했습니다. 있는 힘껏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날에는 ‘눈만 붙여야지’ 하다가도, 잠깐의 공백이 어색해 다시 할 일을 붙잡아야 했습니다. 집에 있으면서도 ‘집 가고 싶다’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2

수업이 끝난 오후, 선뜻 자취방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날이 있습니다. 집보다 더 가볍고 편안한 곳에 머무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일까요. 이런저런 핑계를 만드는 데 맛있는 음식만큼 쉬운 건 없죠.

‘오늘은 에그타르트다!’

잠시 하루를 미뤄두기 위한 작은 목표를 정해봅니다. 자연스레 마음이 닿는 곳을 따라가다 보면, ‘북카페 PAO 손 글씨같이 꾹꾹 적어낸 간판이 눈에 띕니다.

음악 소리를 따라 2층에 도착하면 문은 활짝 열려있습니다. ‘다녀왔습니다!’ 속으로 외칩니다. 처음 와 본 곳임에도 집에 돌아온 듯 익숙한 마음이 들어서일까요. 손때 탄 책, 장난감 시계, 피아노, 영화 포스터, CD 플레이어… 보글보글 요리가 완성되는 소리까지. 파오는 꾸며낸 공간이 아닌, 흔적이 자연스럽게 쌓인 곳입니다. 그래서인지 들어서면서부터 향수에 젖어 듭니다. 이불로 만든 아지트에 좋아하는 인형을 앉히고 놀았던 어린 기억이 떠오릅니다. 쿰쿰하고 따뜻했던 이불 속.

 

#3

창가 앞에 앉아 가방을 엽니다. 강의 노트, 필통, 노트를 빼고 스케줄러를 꺼냈다가 다시 넣어둡니다. 가볍게 머물다 가기로 했으니 짐은 내려놓기로 합니다. 대신 카운터로 걸어갑니다. 색연필로 그려낸 메뉴판 속 수제 커스터드 푸딩, 파스타, 딸기 라떼… 벌써부터 기분 좋은 맛이 느껴집니다. ‘날 데려가요’ 말풍선 속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지만. 못 들은 척, 유혹을 뿌리치고 에그타르트를 고릅니다.

잠시 메뉴판을 덮고 카운터의 ‘PAO’ 명함에 주의를 기울여 봅니다. ‘게르다!’ 시선이 닿기 어려운 곳에 붙어있지만, 파오의 은밀한 진심을 이해한 것 같아 더욱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몽골 초원에 파오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상상에 잠깁니다. 시멘트벽이 천막으로 변하고, 창밖의 전봇대는 타닥타닥 타는 장작불이 되어 그 위로 별이 쏟아집니다. 곳곳에 사람들이 배낭을 메고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자리로 가져다드릴게요’

다정한 말이 귓전에 들리자 다시 북카페로 돌아옵니다. 파오를 더 둘러보고 싶어집니다.

 

#4

네 발자국이면 충분히 닿는 자리지만 호기심에 빙빙 돌아옵니다. 오래된 스피커에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을 배경으로 클래식 LP와 CD, 앨범 표지가 음색을 더합니다. 기타, 피아노 악기를 하나씩 찾아보던 중 눈에 띄는 피규어가 있습니다. CD 플레이어 위 4중주 밴드가 자유로운 얼굴로 음악을 즐기는 모습입니다. 익살스러운 표정을 몰래 따라 해 봅니다.

 

#5

그대로 구석을 돌아, 책장도 구경해봅니다. 꼭대기의 먼지 쌓인 책도 처음엔 누군가 애정을 품고 읽어나간 이야기였을 테니, 제목을 하나씩 눈에 담아봅니다. 책장은 커다란 세계 지도를 그리고 있습니다. 대양주-라틴 아메리카, 일본-도쿄, 미국-뉴욕, 등 나라 별로 책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미국’ 칸을 유심히 관찰해 봅니다. ‘뉴욕은 언제나 공사 중’, ‘김아타, 뉴욕 스케치’ 등 장소를 다루는 책부터, 미국 영화배우의 생애를 담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미국 극작가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까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한 책이 꽂혀있습니다. 시야를 넓혀 구석마다 놓인 책을 둘러봅니다. 수많은 여행자의 이야기가 파오의 벽면마다 발자국을 남기고 있습니다. 지구 반대편의 이야기를 잠깐이나마 들춰보며, 앞으로의 삶에서 만날 것들을 미리 경험해 보는 것은 얼마나 값진 선물일까요. 비록 집을 찾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지금이지만 포근한 정거장에 멈춰선 듯합니다. 공항 가는 길, 시원한 새벽 공기처럼 설레는 마음이 듭니다.

책을 잔뜩 골라 올까 생각했지만 잠시 미뤄둡니다. ‘시험이 끝난 주말 아침에 꼭 와야지’, 시간이 허락하는 날 다시 돌아오기로 약속합니다.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듭니다. 파오는 무엇이든 해도 되고, 또 안 해도 되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가끔 살면서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할 일을 하면서도 일을 해야 한다는 상념에 사로잡힙니다. 집이 있으면서도 집이 없는 이유와도 닮아있습니다. 파오는 집을 잃은 이들에게 여유를 잃지 않을 구실이 되어줍니다. 책을 읽고 싶은 날엔 책을 골라 읽으면 되지만, 맛있는 음식이 당기는 날엔 달콤한 디저트를 가만히 즐기면 됩니다. 또, 혼자 조용히 할 일을 해도 되지만, 친구와 가벼운 대화를 나눠도 좋습니다. 파오에서는 고유한 행복을 지킬 수 있습니다. 들쑥날쑥 꽂혀있는 책과 이야기를 보며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든, 그것도 꽤 괜찮은 책의 한 구절로 남겠구나.’ 생각합니다.

 

#6

‘여기에 놓아드리면 될까요?’ 한참을 구경하던 중 음식이 나왔습니다. 책상엔 고소한 에그타르트와 아메리카노만 올라와 있습니다. 한 손으로 에그타르트를 들고 먹어봅니다. 와삭와삭! 경쾌하게 부서지는 페이스트리 사이로 와르르 에그 필링이 쏟아집니다. 씹을수록 부드러워집니다. 입이 달 때 쌉쌀한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미소와 함께 머금습니다. 아이스 커피에서도 온기가 느껴집니다.

 

#7

음식을 먹던 중, 한가운데 놓인 방명록을 발견합니다. 다정한 인형과 소파에 마주 앉아 쓸 수 있도록, 색연필과 흰 스케치북이 놓여 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2022, 2023, 2024… 매년 이곳에 머물렀던 사람들의 생각이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마구잡이로 흩어진 종이를 주워 읽어봅니다. 서로의 얼굴을 그린 그림, 좋아하는 음악 가사, 사장님에게 건네는 편지 등 각양각색입니다. To Do List 메모지에는 ‘물에 둥둥 떠 있기’, ‘끝내주게 자기’, ‘밤바다에서 춤추기’, ‘햇볕 쬐기’ 등의 소소한 일부터 ‘시험 잘 보기’, ‘건강하기’까지 올해의 꿈이 담겨 있었습니다. ‘할 수 있을까?’, ‘조금만 더 버티자’ 막막해하는 글엔 ‘파이팅’, ‘고마워’, ‘할 수 있어!’ 등 힘을 주고받는 말이 이어집니다. 친한 친구의 일기를 훔쳐보는 듯, 한 마디 낙서마다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눠봅니다.

 

#8

파오에는 친숙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흔적이 가득 쌓여 있기 때문일까요. 그러다 보니 사람을 마주하듯 공간을 대하게 됩니다. 파오를 거쳐온 사람과 신촌의 모든 이에게 응원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이들은 지금 삶의 어떤 구간에 있을까요? 집을 찾아 돌아갔을까요? 여전히 집이 없다고 해도 어딘가에 머무를 필요 없이, 여행하듯 살아가길 바랍니다. 지금을 그저 생생히 즐기기를요. 저 또한 신촌의 밀려오는 시간을 자연스럽게 여행하려고 합니다. 아늑함이 그리울 땐 파오를 찾아갈 것입니다. 그 속의 사람과 이야기가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를 건네며, 설레는 여정의 또 다른 시작 점이 되어줄 테니까요.

 

#에필로그

TO DO LIST

Smile, eat, sleep, cry, be happy, repeat

 

 

 

 

 

북카페 파오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34

영업시간 월-금 12:00-22:00, 토-일 11:00-22:00

라미
AUTHOR PROFILE
라미

잔치의 시선으로 신촌의 장면과 사람, 장소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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