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FM 40.8MHz_신촌의 향
치지직… 2024년 4월 8일 잠시 후 8시, 40.8MHz 잔치FM DJ영원의 라디오가 시작됩니다.

봄이 왔습니다. 그 첫 번째 신호는 코끝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봄의 향은 마치 한가득 공기에 담겨 있는 꽃잎들의 미세한 입맞춤 같아요. 입맞춤에 심취한 꽃잎들이 만들어내는 호흡이 무심코 제 코끝을 간지럽히죠. 한층 따뜻해진 바람이 얼굴을 감싸면서, 봄의 향 가득한 공기가 살며시 콧속을 채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가에서 햇살을 양껏 받던 꽃들의 향기가 온몸으로 훅- 스며들어옵니다. 마치 꽃들이 제게 은밀하게 속삭이듯, 봄이 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처럼. 비로소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립니다.

그렇게 맞이한 봄의 아침,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와 함께 봄의 첫 햇살을 맞이합니다. 그 순간 제 안에 마치 작은 용기가 불을 지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모두가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는 만큼 봄에는 괜히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잖아요. 그런데 이 설렘을 질투하듯, 꼭 부정적인 생각이 찾아와 방해를 합니다. 하지만 봄은 이미 시작됐고 결말은 내 손에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봄의 품 안에 몸을 맡깁니다. 불안함과 설렘이 어우러진 이 순간에 새로운 단어를 창조하는 듯한 자유로운 표현으로 감정을 드러낼 다짐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제가 한 해를 살아내야 할 곳을 향해 떠나요.

그곳은 신촌(新村).
2년 전 봄, 이곳으로 처음 향하던 발걸음. 떨어지는 발끝과 땅 사이로 이던 바람이 생생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같은 곳을 걷고 있습니다. 처음 신촌의 거리를 마주했을 때, 코끝에 풍겨오는 향은 새롭고 생소했습니다. 이 땅을 밟고 서있는 모두의 이야기가 응축된 향이었어요. 마치 소설책 한 권을 펼치듯 그 향은 저에게 다채로운 이야기를 풀어주었습니다. 바삐 걸어가는 모든 이들의 발걸음, 발걸음마다 새로운 향이 피어나더군요. 그리고 이 각기 다른 향들이 한데 뒤엉켜 낯설지만 알고 싶은 향을 만들어냅니다. 향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세상에서 가장 복합적인 존재 같아요. 이곳을 살아내는 모든 이들의 삶이 담겨있어요.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자 순식간에 수많은 존재가 제 안에서 섞여버렸고,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더 알고 싶었어요. 신촌의 향. 어려웠습니다. 첫인상은 봄이 주는 산뜻함을 집어삼켜 버리는 듯한 강렬함. 쓰고, 뜨겁고, 치열했습니다. 더욱 모호해지더군요. 내가 앞으로의 봄들을 맞이해야 할 이곳에 남길 내 향이 어떻게 형용될지. 신촌의 향을 더욱 느끼고자 신촌을 걷고, 또 걷고, 그렇게 발 닿는 곳들을 향해 무조건 걸었습니다. 발자취를 남기는 모든 향들을 주워 담았어요. 비로소 이 낯섦이 점차 무르익어가 조화로워지고 제가 온전히 담아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모호해요. 그래서 또 걷습니다. 올해도 저는 봄의 향이 섞인 신촌을 걸어가며, 새로운 모험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함께 걸을 여러분께 주파수를 통해 향을 선물해 줄 라디오, 잔치.
저는 DJ 영원입니다.
오늘은 신촌의 봄을 살아가는 청취자분들의 향을 만나볼까 해요.
벌써 문자 한 통이 도착했는데요, 첫 번째 향부터 들어볼까요.
첫 번째 향: 따뜻함

빈티지샵; 매그놀리아 미스
코스믹 라테(Cosmic latte)를 아시나요? 우주의 평균을 담은 색상에 대한 명명입니다. 우주의 평균 색이라고 하면 어둡고 차가운 검은색일 것만 같은데 의외로 밝고 따뜻한 베이지색입니다. 우주는 끝없이 넓은 공간이고 수많은 별과 은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또한 물리적인 법칙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으로 가득 차 있죠. 이 모든 게 섞여 만들어진 밝고 따뜻한 색은 온갖 다채로운 것들이 한데 모이면 따뜻해지는 세상을 저에게 보여주는 듯합니다.
빈티지샵이 저에게 딱 코스믹 라테 같아요. 세월의 흔적이 묻어 절대 맑은 색을 유지할 수는 없는, 그래서 보기에 탁한 옷들. 어두운 색감의 옷들이 모이면 더 어두워지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런데 이 다양한 옷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향은 너무 따뜻합니다.

오래된 옷들의 퀴퀴한 향이 잔뜩 모여 저를 반깁니다. 그렇지만 옷을 하나하나 느껴보면 저마다 가지고 있는 퀴퀴함의 온도가 달라요. 사람의 손을 타 유연해진 청바지, 접힌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가죽 자켓. 이 모든 것이 각기 다른 퀴퀴함으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과거를 살아가던 이들의 향을 고스란히 담아온 옷들이 만들어낸 공간.
빈티지샵의 향은 유난히 분위기를 담습니다. 저는 하루 동안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날 때는 많아도 그날 즐거웠는지, 우울했는지… 말 그대로 그날의 분위기는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어차피 느낌만 세게 남는 거, 그날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면 자정이 지나기 전, 하루 끝의 느낌을 바꿀 수 있다고 굳게 믿어요. 마음먹는 순간부터 시작이죠. 이 옷들이 들려주는 따뜻한 향이 분위기를 만들고 저는 그 분위기를 저장합니다. 더욱 사랑하게 되어요, 그날을.

무한하게 신비한 우주 속에서 헤엄치다 마침내 마주한 따스함 같은 이야기네요. 두 번째 향에도 귀를 기울여 볼까요.
두 번째 향: 깊음

카페; 퍼스트바이쓰리
작은 카페의 커피 볶는 향에 이끌렸어요. 통창으로 된 카페는 문을 활짝 열고 산책하던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해요. 창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누구보다 봄을 만끽합니다. 커피의 향에 이끌려 카페에 들어오지만 웃기게도, 저는 커피를 마시면 손이 떨려서 마시지 않아요. 그저 향을 느끼며 들어가서는 에이드를 마셔요. 만나면 풍부해지는 후각과 미각이지만 각각을 고유하게 느끼고 싶을 때가 있죠. 커피의 맛을 느끼지 못하는 저는 오히려 향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달까요.

커피향이 좋은 이유는 우리네의 삶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커피향도, 삶도, 처음 만날 때는 달콤하고 산뜻한데 그 뒤로는 깊고 씁쓸한 느낌입니다. 왜 이렇게 인생에는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어려운 일이 닥치는지에 대해서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다르게 생각해 보면 점점 깊어지는 커피의 향처럼 우리의 인생도 점점 성숙해지는 것 아닐까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이 또한 성숙해지는 과정이라 생각하니 어른이 된 것 같았달까요? 스스로 어른이라 여기는 저는 매일 아침 카페에서 마시지도 못하는 커피향을 한껏 머금고 더욱 깊어질 저를 생각합니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젓는 사람이 아니라 파도를 타고서 나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바다는 끝이 없으니까요.

두 번째 향까지 만나봤습니다. 다음 향은 제가 녹화를 진행하고 있는 스튜디오까지 아름답게 물들이는 듯하는데요, 함께 들어보시죠.
세 번째 향: 조화로움

꽃집; 소세
꽃집이 좋아요. 멀리까지 퍼져 나오고 있는 꽃의 향기에 취한 채 발걸음을 꽃집으로 향합니다. 문틈으로 스며드는 햇살이 어루만지는 그곳은 다정합니다. 들어서는 순간, 다양한 꽃의 향기가 물씬 느껴져요. 형형색색의 꽃들이 정원을 이루고 있고 끝없는 색채의 파도에 빠져들 듯, 그렇게 저의 마음도 깊은 꽃의 향 속으로 빠져들어요.

장미의 달콤한 향, 라벤더의 고요한 향… 이 모든 것이 알맞게 어우러집니다. 손을 뻗어 한 송이씩 선택합니다. 그렇게 오늘 구매할 꽃다발을 완성합니다. 한 송이, 한 송이의 향에 각각 저의 이야기를 담아 엮을 수 있다는 것. 진심을 꼭꼭 눌러 담아요.
여러 종류의 꽃을 엮으면 다채로운 향들이 섞이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조화로워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그랬어요. 새로운 곳을, 새로운 시간을 대하는 내 이 들쭉날쭉한 마음들을 어찌해야 하지? 꽃의 향에 기대 이 마음들을 엮었어요. 비로소 조화로워요. 그리고 오늘은 진심의 향을 엮은 꽃다발을 저에게 선물합니다.

잘 들었습니다. 어느덧 마지막 향을 들을 시간이 찾아왔네요.
네 번째 향: 살아감

향수가게; 리튼온워터
오늘은 봄의 향을 가득 담은 향수를 만났습니다. 꽃봉오리를 형상화했어요. 꽃이 만개하기 전의 푸릇한 생명력이죠. 고유한 향을 저장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향수는 저에게 흥미로운 존재입니다. 홀로 있는 향은 금세 휘발되기 마련이고, 다른 향과 맞닿는 순간 섞여버리니까요. 신촌은 끝없이 사람들이 순환합니다. 이들이 잠시 머무는 동안 남기는 향은 시간이 오래 지나면 언젠가 희미해지겠죠. 분명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제 향도 존재감을 잃어갈 것이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그래서 내가 남길 모든 향들로 조향을 한다고 생각하고 유리병에 저의 봄을 소중히 담으며 이곳을 살아가요. 유리병을 열면, 언제라도 이때의 봄을 기억할 수 있게.

여름이 찾아올 때쯤, 저는 항상 봄의 사라져가는 흔적을 뒤쫓는 사람이었어요.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 주는 봄이라서 그럴까요. 올해도 어김없이 내 삶에 변화 주기를 실패한 후에 봄을 놓쳐버린다는 것이 저에게 크디큰 절망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미 떠나가고 붙잡지 못할 존재에 집착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이냐고 사람들은 말하죠.
그런데 저는 이 향수에 담긴 향을 빌려 그렇지 않다고 말해요. 새해의 시작인 봄을 맞이하면, 다른 사람들은 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은데 나만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곤 했어요. 하지만 분명 저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을 겁니다. 다만 보이는 풍경이 비슷해 잘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던 거죠. 어느덧 풍경이 달라지고, 여름이 흘러갈수록 저의 성장을 느낄 수 있어요. 작은 유리병 속에 담긴 봄의 향은 저에게 묻어 한 해를 끝까지 함께하며 제가 포기하지 않게 해줘요. 그때까지 천천히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려줘요. 이런 집착은 괜찮지 않나요.

마지막 향까지 함께 들어보았습니다. 우리에게 오늘의 헤어짐을 마주하고 내일의 만남을 기약할 시간이 찾아왔어요.
이 모든 향을 소중히 담아가며 이토록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봄을 맞이하는 우리는 어김없이 신촌이라는 땅을 밟고 서있습니다.
신촌의 봄을 살아내는 여러분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신촌의 향이 그저 봄을 삼켜버리는 듯한 강렬함만 가진 것은 아니더군요. 각기 다른 향들이 각자의 다정을 한껏 끌어모아 이곳의 봄을 만들어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모호하더군요. 이 향의 총체도, 제가 앞으로 남길 향도. 생각을 바꿔, 굳이 정의하지 않아도 괜찮아졌어요. 누군가에겐 제가 무색무취의 인간이어도, 누군가에겐 너무 튀어 주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고 느껴지더라도. 사랑하는 공간에 섞여 들어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소중하다고.
어느덧 3월의 치열함이 지나고, 4월이 찾아왔습니다. 당장 한 달 전만 생각해 봐도 이 형태로 살아가고 있을지 전혀 몰랐죠. 그래요. 삶은 생각보다 살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변화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갈 필요가 있어요. 좋은 상황은 지금보다 더 좋아지고 안좋은 상황은 좋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으니까요. 포기하지 않고 남은 신촌의 봄을 만끽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과 신촌에 저마다의 향을 듬뿍 남기며 앞으로 살아갈 이 모든 청춘들에게 힘을 실어줄 라디오 잔치.
저는 DJ 영원이었습니다.
킁킁킁 향이 좋아요
진심이 느껴지는 따뜻한 글ㅎㅎ 코스믹 라테 같아요
[…] 글을 안 썼다는 게 놀라워요. 봄의 향기를 “입맞춤에 심취한 꽃잎들이 만들어내는 호흡”이라고 표현한 적 있었죠. 제가 정말 애정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