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S.
Dear S.

오랜만이다. 한동안 연락이 뜸했지? 구태여 용서를 구하지는 않을게. 늘 곁에 있는 걸 알지만, 편지를 쓰려 골똘히 떠올리다 보면 너는 꼭 저 우주 반대편에 있는 것 같다니까. 안드로메다 너머까지 교신을 보내기에는 고작 이 서울 바닥 안에서도 나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이 너무 많더라. 너에게 할 말을 정리하려면 먼저 나를 돌아봐야 하는데, 그게 너무 버거웠어. 그것도 다 핑계라며 눈을 흘길 네가 훤해서 쓰면서도 피식 웃음이 난다. 내 잘못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 편지를 받고 봉투를 뜯은 너는 이미 내 마음을 다 알고 있을 테니까. 다 괜찮으니 말해보라는 다정한 눈빛에 변명을 얹는 것만큼 무용하고 구차한 일이 또 있겠니.
사실 나, 최근에 널 보러 갔었어. 어두운 밤이었는데도 오랜만에 본 넌 여전히 활기차고 빛나더라. 고백하자면 항상 정신없이 바빠 보이는 네가 때로는 불편하기도 했어. 꼭 나를 보는 것 같아서. 한 순간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늘 무언가 하고 있는 모습, 그런 너에게 느꼈던 부담감과 답답함을 남들이 나에게서 느끼진 않을까 불안했어. 그런데 내가 흔들리고 헤매는 동안에도 너는 꿋꿋이 자리를 지켰더라. 때로는 널 싫어하고, 널 떠나고 싶어했지만 서울에 와서 처음 만난 게 너라서 참 다행이야. 내 20대를 너와 시작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몰라.
요즘 나는 10년만 시간을 뛰어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해. 웃기지, 원래 죽을 때까지 어렸으면 좋겠다고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곤 했었는데. 한 군데 뿌리내리지 못하고 계속 유영하다 보니 흔들림이 지겨워졌나봐. 단단한 땅에 두 발을 딛고 가만히 서 있고 싶어.
작년까지만 해도 영원히 이십 대에 머무를 것만 같은 네가 부러웠는데, 요즘엔 그렇게 사시사철 푸르르는 것도 참 피곤하겠다는 생각에 애잔하기도 했어. 늘 새로워진다는 건 어떤 기분이야? 매년 설렘 가득한 새싹들이 한 움큼씩 너를 찾아오잖아. 그들의 생기를 머금어 너도 늘 두근거리는지, 함께 자라나며 비를 맞고 바람에 흔들리기도 하는지 궁금해. 대부분이 네게 머무르기보다는 스쳐 지나갈 텐데 공허하진 않을지 걱정도 되고. 나이가 들면서 연륜이 생긴다고들 하는데, 나이 들지 않은 채 흐르는 시간도 너에게 의미가 있니?

열아홉보다는 스물이, 스물보다는 스물 하나가 더 자라 있을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들수록 내가 세상을, 또 나 스스로를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 여실히 깨닫고 있어. 아마 평생 다 알지는 못하겠지. 세상을 얼마나 넓혀가야 하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어. 헤맨 만큼이 내 땅이라던데, 많이 헤매며 넓은 땅을 갖고 사는 게 꼭 좋은 걸까? 그냥 적당한 크기의 대지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심고서, 단란하게 추억을 꽃피우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무엇을 심어야 할 지 모르는 황무지의 지주와, 손바닥만한 장미 정원의 주인 중 누가 더 행복할까. 씨앗을 먼저 사고 그에 맞는 땅을 구하는 게 나을까, 넓은 땅부터 확보한 뒤에 무얼 심을지 고민하는 게 나을까?
나는 본래 모든 일에 쓸모라는 근거가 필요한 사람이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데 서툴러. 내가 속한 곳에, 연을 맺는 사람에게, 발 딛고 있는 세상에 쓸모 없는 존재가 되는 게 두려워서 깊게 스며들기를 꺼리는지도 몰라. 스며들기는 쉬워도, 물든 색을 다시 빼내는 건 너무 어렵거든. 그런데 너를 만나고, 네가 소개해 준 다정한 사람들 곁에 머물며 마음 한 켠을 내어주는 게 전혀 아깝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어. 내가 어떤 모습이든 보듬어 줄 사람들 앞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었어. 아직도 목요일 밤이면 문득 그 온기가 깊숙한 곳으로부터 피어나 마음이 저릿해지곤 해. 그래도 비단 나 뿐이 아니라는 걸, 모두가 그때의 우리를 그리워하고 또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조금 아리지만 많이 웃고 지내.
너는 참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목격하겠구나. 연애, 우정, 가르침, 도전… 청춘을 이루는 수많은 것들의 기저에는 사랑이 존재하니까. 네가 서로 만나게 해 준 푸릇푸릇하고 앳된 연인들이 얼마나 많겠어. 내가 이맘때쯤 유독 외로운 데는 네가 한 몫 톡톡히 했다고 볼 수 있지.
있잖아, 내가 나일 수 있는 사람과 나를 평소답지 않게 하는 사람 중 누구를 사랑해야 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고, 받아들여줄 수 있는 사람을 원하지만 왜 심장은 늘 후자를 향해 뛰는지 모르겠어.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건지, 그 사람 때문에 얼토당토않는 가면 놀이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사랑스러운 건지. 세상 모든 걸 가져도 어찌할 수 없는 게 사람의 마음이라서, 누군가와 보통 이상의 관계를 맺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아. 요즘엔 일상이 꽤나 퍽퍽해서 이런 찌르르, 하는 마음도 가끔은 참 그립고 반갑더라.
얼마 전에는 손편지를 받았어. 이 시대에 흔치 않은 감성이지. 보낸 이는 나에게 ‘누구보다 열심히 사랑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맞닿은 사람과 스치는 인연, 바람과 빛에서도 사랑을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어. 사실 좀 놀랐어. 그때의 나는 이리저리 치여서 사랑을 거의 놓아버린 상태였거든.

꼭 열렬해야만 사랑인가. 잔잔하게, 그러나 늘 아끼는 눈빛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 노력을 놓지만 않는다면 그걸로 사랑 아닐까? 나도 하루 하루를 매일 좋게만 바라보기는 어려워. 나를 둘러싼 모든 게 싫어서 죽지 못해 산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어. 그런데 저 편지를 읽고 다짐했어. 그럼에도 생을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아무리 현실에 먼지가 잔뜩 끼었어도 파란 가을 하늘에, 길 가다 마주친 예쁜 꽃에 웃음지을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고. 하루 종일 툴툴대며 보내다가도 자기 전에 누워서는 꼭 한번 내게 주어진 것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한지를 곱씹겠노라고.
하대했던 누군가와 친구가 된 경험이 있니? 나는 요즘 감정과 사이가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해. 내 기분이 꼭 내 통제권 아래 있지는 않단 걸 최근에서야 느꼈거든. 이때까지는 감정을 내가 쥐고 흔들 수 있는 존재로 여겨 ‘잘 다루려고만’ 했다면, 이제 어떻게 오래오래 감정과 좋은 사이로 함께할 수 있을 지 고민하는 중이야. 까탈스럽지만 밉지 않은 친구를 대하듯 곁에서 잘 지켜보다 풀이 죽는 것 같으면 북돋아 주고, 지쳐 보이면 잠시 멈추어 쉬기도 하고. 언제 유독 힘들어하는지, 좋아하는 건 무엇인지 잘 들여다 봐 주어야지. 걔한테는 내가 아니면 아무도 그걸 해줄 사람이 없거든.
너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했던 말 기억나? 너는 꼭 광활한 바다 같아서, 내가 튀기는 물 한 방울은 티조차 나지 않겠다고. 그래서 너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도전하고 꿈꿀 수 있을 것 같다고. 실제로 네 옆에서 나는 많이 흔들리고 때로는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 암흑 속을 지나지만, 통로 끝에서 새로운 나를 또 발견하고 세상을 배워나가고 있어. 내가 네 또래여서, 이 시기에 너를 만나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언제까지 우리가 또래일 수 있을까? 매일 만나다가, 점점 가끔 만나다가, 몇 년에 한 번씩 만나는 사이가 되어도 너를 만나면 나는 지금 이때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때의 나는 여전히 철없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가졌을지, 겹겹이 쌓인 시간 위로 새로운 새싹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 지 궁금해. 먼지가 끼어 빛을 잃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그때는 너도 많이 변했을 것 같아. 너는 변하지 않아도 세상이 너를 변하게 하겠지만, 나만은 너의 영원을 빌어주고 싶어.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으려 했는데, 결국 또 한가득 물음표만 던지는 것 같네. 알잖아, 쉽게 속 얘기를 못하는 나지만 너에게만큼은 솔직할 수 있다는 걸. 네가 이 질문들에 대답하지 않을 걸 알아. 그건 스스로 겪으며 알아가야 하는 거라고, 늘 하던 대꾸를 하며 곁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겠지. 한참 뒤에 답을 찾았을 때, 달려가 어린아이처럼 내가 듣고 본 것을 신나게 말하면 그때도 들어줘야 해. 그땐 참 별 것도 아닌 일로 유난이었다고, 지금의 치기 어린 고민들을 웃어넘길 때 맞장구도 쳐 줘야 해. 너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각기 다른 형태로 살아 숨쉬겠지만, 나에게 너는 우리가 함께한 그 시절의 너 하나뿐이니까.
너와 함께할 앞으로의 몇 년, 어쩌면 너를 떠날 그 후의 몇십 년동안 치열하게 자랄게. 매일 행복하지는 않더라도 때때로 웃음 지으려 노력할게. 너는 그냥 그 자리에서 나를 지켜봐 줘. 내가 떠난 자리에 누군가 들어오면 나에게 했던 것처럼 네가 가진 최상의 것들을 주렴. 고통도, 기쁨도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겪으며 단단해질 수 있게.
헤어진 적 없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나의 S, 신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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