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 포포나무에서
글쎄, 오늘은 좀 힘든 날이었어. 겨우 떼는 발걸음은 거칠었고, 어디를 가는지 모르고 걸었지. 지쳐있었다고 하는 게 맞을까. 왜 우린 항상 지쳐있지. 빙글빙글돌아가지왜항상? 글쎄. 우린 항상 떠돌고, 지쳐있지.

세상이 노랗네. 아직 학교 앞 거리의 은행잎들이 지지 않았더라고. 세상은 예쁘게 칠해지고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것만 같은데, 마음은 어둑해져 가기만 했어. 회색빛으로, 까만빛으로, 점점 더…
힘없이 언덕길을 오르자. 언덕길은 언덕길이라서 더 힘들거든. 누군가 톡하고 살짝만 뒤로 밀어도 데굴데굴 굴러떨어질 것처럼 걸을 거야. 그렇게 힘겹게 오르고 올라 도착한 곳엔 노란빛이 반짝여. 그럼 여기가 천국…은 아니고, 포포나무야.
문을 열면 온기가 확 끼쳐올 것만 같은, 노오란 빛이거나 아직 지지 않은 은행잎 같은. 수능 날에도 춥지 않았던 2024년 신촌의 이상기온처럼 회색 마음에 뚝 떨어진 따뜻한 공간.

입술과 입술 사이에 올려두고 계속 불러보고 싶은 이름
2005년에 신촌에 뿌리를 내려 개업한 포포나무는 2008년 이대 앞으로 옮겨와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어. 신촌이라는 이 거대한 도시에, 3호점까지 가지를 펼치기도 했었지만 바이러스역병이 우리를 덮친 이후로 지금은 이대 앞에만 유일하게 운영하고 있지. (신촌에 있을 땐 가게 이름이 ‘비스토’였다고 해) 자, 들어가 볼래? 앞장서 봐.

그리고 포포나무가 피해 갈 수 없었던 또 한 가지, 키오스크
포포나무는 양식당이야. 근데 뭐랄까, 이름 앞에 ‘가정식’을 붙여줘야 할 것 같은 양식당. 여러 스테이크 메뉴와, 치즈감자, 토마토 스튜… 이상하지, 우리 집에선 이런 음식을 해 먹지를 않는데 왜 이렇게 정겨운 것만 같은지. 사실은 그게 포포나무라는 공간이 주는 안락함인 거야. 콕 집어서 말할 순 없지만 느껴지는, 그래, 말하자면 포옹 같은 온기. 붙들고 있을수록 울 것만 같은.
시선을 이리저리 옮길 때마다 가지각색의 소품들이 눈에 띄어. 단정하진 못해도 자그마한 것들이 모여있으니 더 귀엽잖아. 신촌과 포포나무를 오래도록 스쳐 지나간 흔적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어. 사람들의 기억이나 추억도 주렁주렁 달려있을지도, 아, 어떤 추억은 눈에 보이기도 하는 것 같지 않니.

저 테이블에도 어떤 추억이 남아있을지도 몰라. 저기, 보여? 나만 보이는 거야?
포포나무는 제 추억이 담긴 소중한 곳이에요. ‘처음’이었던 곳이거든요. 그날 무슨 옷을 입었는지, 포포나무에 오기 전에 뭘 했는지조차 다 기억 나요. 하루 종일 설레고 떨렸거든요.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고 싶었는데, 아마 티가 잔뜩 났겠죠. 웃긴 건 이곳에서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는 거예요. 남아있는 건, 진심이 가득했던 어린 나뿐이에요. 그치만 소중한 인연이 포포나무에서 시작됐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전 이곳 포포나무에 무척이나 고맙다는 거죠. 그리고 그날 대화에서 유일하게 기억나는 게 있다면 아무래도, 포포나무에서는 치즈감자를 꼭 추가해 시킬 것…
그래, 저 소중한 추억이 얘기해 주듯이 말이야. 포포나무에선 치즈감자를 꼭 시켜야 한다구. 그나저나 익숙한 추억이고 처음인 것 같은데… 아무튼.
메뉴를 시키면 샐러드, 흑미밥과 계란국이 함께 나와. 모두 다 포포나무에서 직접 만든 것들로 완성된 한상차림이지. 어느 한 곳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홈메이드 음식. 누군가 우릴 위해 정성껏 빚은 음식을 삼키고, 마시고, 흘려보내자.

‘삼천원치즈감자’. 뜨거울 때 먹으면 더 맛있거든
누군가의 조언처럼, 치즈감자도 꼭 시키자. 글쎄,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이게 그렇게 맛있더라. 촉촉한 감자 사이로 스며든 치즈와 버터, 칠리소스. 한입에 듬뿍 떠먹고 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고소해져 볼까. 감자와 치즈와 포포나무는 모두 노란빛. 노란빛은 그렇게 우리를 녹이고 띵하게 흔들 거든.

왼쪽부터, 비프 스테이크와 실크 스테이크.
*실크 스테이크는 돼지 목살을 훈제한 요리야
오늘은 덜렁덜렁 힘든 날이었으니, 또 힘든 날이 될 테니, 든든하게 먹어두자. 오늘의 메뉴-비프 스테이크와 실크 스테이크-는 완전 고-기 거든. 담백하게 구워진 고기를 포포나무 표 특제 소스에 듬뿍 찍어 한 입, 포포나무의 시그니처 같은 야채 볶음도 한 입 크게 먹어볼까. 발끝까지 짜릿해지자.
어서 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계란국이랑 흑미밥 드릴게요. 뜨거우니까 조심해요. 맛있게 드셨어요?
친절하게 말을 건네는 사장님의 미소에서도 노란빛이 느껴지는 것 같아. 그래, 우리가 데굴데굴 구르지 않고 이곳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건 이런 공간이 있음을 믿어왔기, 아니 바라왔기 때문일 거야. 노란빛은 우리 마음과 마음 사이를 건너며 사랑으로-애정으로-진심으로 변하고는 하니까.

지친 눈동자를 마주친 사장님이 방긋, 웃어주셨어. 덕분에 황윤숙 사장님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지.
이곳 신촌에서 오랫동안 포포나무를 운영해 오셨잖아요. 포포나무의 역사가 궁금해요.
포포나무의 처음은 아들과 남편, 그리고 제가 함께였었어요.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아들과 제가 가게를 운영하고 있죠. 가게를 시작할 때만 해도 양식이 그렇게 대중화된 시기가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에게 양식을 대중화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5000원에 메뉴를 팔기 시작했죠. 포포나무의 모든 요리는 다 홈메이드예요. 옛날에는 디저트까지 다 만들기도 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적절한 가격에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서 내어드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저도 항상 편안한 마음으로 든든한 식사를 하고 가는데, 다 사장님들의 노력 덕분이었군요. 오랫동안 신촌에서 학생들 곁을 지키며 느끼시는 점이 있는지 궁금해요.
제가 신촌을 처음 와보고 너무 놀랐어요. 그땐 사람이 너무 많아서 막 밀려다녔거든요. 근데 지금은 그런 게 없어졌잖아요. 신촌도, 이대 앞도 지금은 너무 썰렁해진 것 같아요. 저도 2005년부터 신촌에서, 2008년부터는 이대 앞에서 쭉 있으면서 4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까지를 신촌과 함께 보냈거든요. 애정이 크죠.
학생들이 찾아와서 식사 쿠폰 같은 걸 제작하기도 하고 그래요. 큰 금액을 번다기보다는 서로 나눈다는 느낌으로 학생들과 도움을 주고받는 거죠. 예전에 이곳에서 아르바이트했던 학생들과 계속 연락도 하면서 모이기도 하고요. 코로나 때문에 많이 어렵고 단절된 느낌이었는데, 학생들이 학교 앞에 여러 집이 없어지면 안 된다고 많이 도와주기도 하고 그랬어요.

이화여대 학생들이 포포나무와 함께 제작한 포포나무 식사 쿠폰
다양한 사람들이 편하게 찾는 포포나무지만, 말씀해 주신 것처럼 신촌의 학생들과 특히 추억이 큰 공간 같아요. 신촌을, 또 포포나무를 찾는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쉽지 않겠지만 식비를 너무 줄이지 말아요. 좋은 음식 먹고 열심히 공부하는 게 중요하잖아요. 결국 학생들이 졸업하면 학교나 음식, 친구들에 대한 추억이 많이 남으니까요. 아줌마도 보탬이 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할 테니까, 자주 포포나무를 이용해 주면 좋겠네요.
근데, 학생들이 식당에 바라는 점은 없나요?
저희는 오래오래 남아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크죠. 가게 사장님들도 힘드신 점이 많을 거라고 생각이 들지만, 신촌의 상권이 엄청 빠르게 바뀌는 게 아쉽고 좀 슬프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곳 포포나무 같은, 정든 가게들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큰 것 같아요.
음, 그렇죠. 졸업하고 이곳을 떠나도 다시 찾아올 수 있는, 추억의 가게.
어떤 분들이 얼마 전에 가게를 찾아오셨는데, 신촌에 가게가 있을 때 오시던 분들이었어요. 저랑 얼굴이 이렇게 마주쳤는데, 알아보게 된 거죠. 그땐 둘이 연애를 하시던 분들이 이제 결혼을 하신 거야. 연대 공학관에 있던 분들이셨거든요. 그래서 제가 더 좋은 데로 (식사하러) 가시지, 왜 여길 오셨냐, 이러니까, 여기만큼 좋은 추억을 가진 곳이 어디 있냐고 그러시더라고요.
그쵸. 저도 신촌을 떠난 이후에도 그분들처럼 꼭 다시 포포나무를 찾아오고 싶네요. 아까도 말했지만 포포나무는 꼭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장님. (웃음)
여기저기 남은 ‘추억’들
소녀 같은 웃음을 짓는 사장님 뒤로 노란빛이 보였어. 무턱대고 없어지지 말아 달라는 철없는 애정에도 그저 웃어주시는 마음이 20여 년간 우리 곁을 지켜온 온기이자 단단함으로 느껴졌지.
그래, 오늘은 오늘의 가장 따뜻한 밥을 먹을 거야. 어둠을 뚫고 노란빛이 새어 나오는 밥을 먹을 거야. 먹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거냐고, 우습다고 웃을 수도 있겠지만. 먹고 삼키고 흘려보내는 일은 정말 중요하거든. 그런 게 쌓이면 에너지가 되거든. 사장님 말처럼 ‘추억’이 되거든.
그러니까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곳도 포포나무였으면. 지나간 순간이 추억이 되고 다신 재생해 볼 수 없는 흐릿한 기억이 되더라도, 마음속 깊은 곳에 정성껏 빚은 음식과 함께 노란빛 하나가 스며들어 있기를.
기억할 수 있겠어? 우리가 같이 보낸 시간 말이야. 그때만 느낄 수 있는 짧고 소중한 감각들. 순간을 지나면 돌이킬 수 없이 그리워지기만 하는 것들. 최선을 다했던 날들.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 그 모든 것들을 먹고 삼키고 흘려보내자. 이곳 포포나무에서.

포포나무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2가길 24 1층 포포나무
10:00 – 20:00 (매주 일요일 휴무)
브레이크 타임: 15:00-17:00, 라스트 오더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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