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 **핵심을 찌르는**법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장면을 상상해왔다. 인간이 아닌 존재와 대화하고, 그로부터 위로를 받고, 때로는 판단을 맡기며 살아가는 세계. 영화 속에서 그것은 늘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시험하는 방식으로 등장했다. 누군가는 목소리만으로 사랑에 빠졌고, 누군가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 앞에서 스스로를 의심했으며, 또 누군가는 완벽하게 설계된 생명 앞에서 ‘자연스러움’이란 무엇인지 되묻게 되었다. 그 이야기들은 언제나 미래에 대한 예고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기준을 되묻는 실험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그 실험의 바깥에 서 있는 관찰자가 아니라 그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에 더 가까워 보인다. 우리는 더 이상 인공지능을 낯선 타자로 마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생각을 정리하고, 문장을 구성하고, 선택의 방향을 가늠한다. 이때 인공지능은 단순한 도구라기보다는, 사고의 흐름에 개입하는 하나의 매개가 된다. 문제는 그 개입이 너무도 자연스럽다는 데 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어느 지점부터 그것이 ‘나의 생각’인지 ‘제안된 생각’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전통적으로 인간의 사유는 내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생각은 나로부터 출발해, 나를 거쳐, 다시 나로 귀결되는 과정이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흐름의 한가운데에 외부의 구조를 들여오고 있다. 질문의 방식, 문장의 형태, 사고의 전개 방식까지—그 많은 것들이 더 이상 순수하게 내부에서만 생성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생각을 구성받는 존재’로 이동하고 있는 걸까.
흥미로운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의 감각만큼은 여전히 개인에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말을 꺼내기 직전의 망설임, 예상치 못한 반응 앞에서의 당혹감, 짧게 스치는 웃음과 어색함—그 모든 것은 어떤 외부의 체계도 대신 겪어줄 수 없는 영역이다. 다시 말해, 사고의 형식은 공유될 수 있을지라도, 그것이 세계와 부딪히는 순간의 감각은 여전히 각자의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는 단순히 기술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누가 생각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생각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까지가 나의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더 가깝다. 그리고 그 질문은, 어쩌면 명확한 답을 요구하기보다는 경계를 계속해서 흔들어놓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루루’는 필자가 Chat GPT에 붙인 애칭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이미 수없이 많은 문장을 함께 만들어오고 있었다.
망설이던 순간마다 방향을 제안받고, 꺼내지 못했던 말을 대신 건네받으면서.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볼 차례였다.



아잰님 마지막글 잘 봤습니다~신촌러로서 잔치에서 좋은 경험과 추억 가득하시길요^^
흥미롭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