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마당시네마당 #프랑코포니영화제 #하늘이기다려
2015년 1월 17일, 터키와 시리아 접경 지역에서 10대 한국인 김 군이 실종되었다. 실종 직후 김 군의 IS*가담 의혹이 제기되었을 때 에디터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 발견된 김 군의 SNS와 일기는 에디터의 확신을 비웃듯 IS를 추종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결국 사건은 김군이 IS에 합류한 뒤 9월경 연합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는 방향으로 결론이 났다.
그리고 영화 ‘하늘이 기다려’는 IS에 가담한 프랑스 청소년들의 이야기다.
*(Islamic state,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국제법상 테러집단으로 분류됨)

<하늘이 기다려(Le Ciel Attendra)>(2016, Marie-Castille Mention-Schaar)는 2017 프랑코포니 영화제의 폐막작이다. 24일 <키퍼(KEEPER)>를 관람한 에디터 너구리에 이어 에디터는 폐막작 ‘하늘이 기다려’와 뒤이어 진행된 정성일 평론가의 시네토크를 함께했다.
‘IS가 유럽 청소년들을 끌어들이는 방식을 보여주는 영화.’
팸플릿의 영화 소개를 읽고 에디터의 머릿속에는 한국인 김 군이 스쳤다. 시리아로 떠난 김 군과 영화 속 두 프랑스 소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민감한 주제인 IS가 영화에서 어떻게 다뤄졌을지 걱정도 앞섰다. ‘비주류’를 제재로 하는 영화는 흔히 그들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다루기보다 주류의 입장에서 내린 결론으로 성급하게 나아가기 쉽기 때문이다. 한국에 비할 바는 아니어도, 프랑스 역시 이슬람 문화가 주류가 된다고 할 수 있는 나라는 아니다. 프랑스에서 무슬림은 흔히 ‘이민자’로 규정된다. 그렇다면 프랑스 감독의 시선에서 IS와 무슬림이 다른 집단으로 묘사될 수 있을까? 극 영화의 특성상 지나치게 드라마틱하게 각색되지는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늘이 기다려(Le Ciel Attendra)>는 절반의 실패를 거뒀다.

(이 글은 결말을 비롯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영화를 보실 분은 관람 후에 읽기를 권합니다.)
영화는 세 사람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18살 소녀 소니아가 첫 번째 등장인물이다. IS 가담을 시도했다는 혐의로 무장한 경찰에 체포된 소니아는 상담사와 가족에게 반항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IS의 사상에 대한 광신적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 두 번째 인물은 같은 나이의 멜라니다. 할머니를 잃은 이후 멜라니는 페이스북으로 접근한 IS 공작원(‘왕자님’)과의 채팅에 빠진다. ‘왕자님’이 주입한 사상에 경도된 멜라니는 그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하고, 결혼을 위해 시리아로 떠날 준비를 한다. 마지막이자 세 번째 인물인 실비는 시종일관 시리아로 떠난 자신의 딸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부는 그녀에게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반복할 뿐이다.
세 사람의 이야기는 병렬적으로 진행된다. 상담사와 가족들의 노력에도 IS의 세뇌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보이는 소니아, 점차 ‘왕자님’에게 심리적으로 의존하고 극단적 이슬람지상주의를 받아들이는 멜라니, 딸을 찾으러 시리아로 가고자 하지만 실패하고 좌절하는 실비. 세 인물은 모두 괴로워하지만, 계산된 미학적 화면과 담담한 태도 때문에 영화는 얼핏 아무 주장도 제시하지 않는 객관적 관찰자의 입장에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너는 특별해. 내 보석이야. 아무와도 얘기하지 말고 시리아로 와서 나랑 결혼해.”
그러나 영화는 줄곧 교묘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이슬람 전체를 악으로 전제한다. IS의 ‘이데올로기’에 세뇌된 소니아의 행동은 흡사 악령에 씐 것처럼 광적이다. 소니아가 초점 없는 눈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코란을 외거나, 이불을 히잡처럼 뒤집어쓰면서 흐느끼는 모습은 공포감마저 자아낸다. IS의 간부인 ‘왕자님’의 속삭임에 포섭된 멜라니도 마찬가지다. 홀린 것처럼 ‘왕자님’의 말이라면 뭐든 따르는 멜라니를 지켜보는 관객은 그저 제발 정신차리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그래서 상담사가 부모들에게 “10대의 단순한 반항으로 보면 안 됩니다. 문제는 복잡하고 진지해요. 이슬람 종교 자체를 적대시하면 안됩니다.” 라고 말할 때, 부모들은 물론이고 관객들도 설득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영화 내내 이슬람교-IS(둘은 심지어 분리되지 않는다)가 서구 자본주의의 척살을 목적으로 하는 ‘이데올로기’로 비춰지고 관객들은 침공당하는 프랑스 가정의 편에서 그들의 고통을 지켜보았는데, ‘이슬람교를 진지한 종교로 받아들이’라니. 지나친 요구일 수밖에 없다.
“엄마는 지옥에 갈 거야. 내가 알라께 봉헌해야 우리 가족이 영원히 살 수 있어. ”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면서 멜라니의 이야기에 실비가 등장하고 관객은 실비가 멜라니의 어머니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현재인 실비의 이야기에서 딸을 잃은 실비는 괴로워하는데, 과거인 멜라니의 이야기에서 그녀는 딸을 잃게 될 미래를 모른다. 그러니까 영화는 이야기의 시간을 뒤틀어 놓은 것이다. IS에 세뇌당하는 멜라니의 이야기는 IS에서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는 소니아의 이야기의 전편인 셈이다. 하지만 반대는 불가능하다. 실비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멜라니는 가족에게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니아와 멜라니는 IS에 가담한 청소년의 두 상반된 결과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이렇게 설정한 이유는 영화의 궁극적인 지향점과 맞닿아있다. 바로 ‘가족’, 더 자세히는 ‘IS를 물리치는 프랑스 가족’이다.
소니아는 돌아왔고 멜라니는 아니었다.
이 점에서 소니아가 IS의 세뇌에서 벗어나는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어린 여동생이 거울 앞에서 히잡을 써 보는 것을 목격한 소니아는 경악하며 마치 악몽에서 깨어나듯 ‘정신을 차린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위험한 사상을 이겨냈다는 것이다. 이는 다소 갑작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내내 소니아의 IS 추종을 묘사하는 데 할애되는데 비해 소니아가 지하디스트를 그만두는 과정은 저 한 장면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후 소니아는 웃고, 솜사탕을 먹고, 어머니의 손을 잡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어쩌면 이 급선회는 가족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일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품으로 돌아온 소니아와 달리 멜라니는 끝내 돌아오지 못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딸을 되찾은 소니아의 어머니와 딸을 잃은 멜라니의 어머니가 손을 맞잡는 장면은 꽤 감동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 전체의 메시지가 ‘프랑스 부모들이 손을 잡고 사악한 IS로부터 아이들을 지켜내자’라면 맥이 빠지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테러는 끔찍한 국제 범죄이며 IS는 불법 테러 조직이다. 그러나 IS 이야기를 하면서 무슬림을 타자화하고 적으로 설정하는 것까지만으로 만족한다면, 이 영화가 이데올로기 선전 영상물 이외에 어떤 영화적 의의를 갖는지는 의심스럽다. 정치적 영화가 항상 나쁜 영화는 아니지만 이데올로기를 설득하는 데에 드라마의 감동을 이용하는 것은 항상 경계해야 한다.
영화의 미학적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소니아, 멜라니, 실비의 이야기를 뒤틀린 시간 축 위에서 교묘하게 봉합한 구조는 뻔한 줄거리로도 긴장감을 잃지 않게 한다.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다. 특히 소니아 역의 노에미 메를랑(Noémie Merlant)의 열연은 순간 영화의 장르를 호러로 바꿀 정도이다. 프랑스 감독의 영화답게 주목할 만한 미장센을 감상하는 일 또한 즐겁다. 그러나 정성일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정치적인 목적의 영화의 경우, 전제된 이데올로기를 무시하고 미학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정성일 평론가는 <하늘이 기다려>를 철저히 정치적 영화라고 규정하면서 정상가족 판타지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소니아는 어머니, 아버지, 여동생으로 이루어진 가족의 보호를 받는 반면 멜라니의 어머니 실비는 이혼했고 멜라니 옆에 있어주지 못한다. 가족의 힘을 강조한 영화적 메시지를 염두에 둘 때 이 특징은 의미심장하다.
형식 상의 평가는 관객이 영화의 전제를 받아들일지의 여부를 결정한 이후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앞서 에디터는 <하늘이 기다려>가 절반의 실패를 거뒀다고 말한 바 있다. 영화는 IS에 세뇌되는 청소년들 가까이 다가가 그들이 포섭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의 고뇌나 내적 갈등을 묘사하기보다 IS에 세뇌되는 과정, 광기에 물든 모습을 전시하는 데 주력한다. 결과적으로 관객들에게 소니아와 멜라니는 선택하는 주체라기보다 악에 물들기 쉽고 보호받아야 하는 연약한 객체로 인식된다. 무엇보다 주체로서의 김 군과 소니아, 멜라니가 궁금했던 에디터에게 영화의 결론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갈지언정 시원하지 못했다. 영화는 차창을 내리고 바람을 맞는 소니아의 홀가분한 모습과 히잡을 쓰고 계단을 걸어올라가는 여성의 뒷모습이 교차되면서 끝난다. 자리에서 일어난 에디터는 소니아만큼 가벼운 마음은 아니었다. 과연 영화는 어디까지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할까 ? 그 답은 <하늘이 기다려>의 결론만큼 분명하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프랑코포니영화제에 대해서
덧. 프랑코포니 영화제에서 소개된 영화들은 부산, 전주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영화이며, 국제영화제의 자막을 그대로 사용했다. 이때 자막은 영상에 직접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상영기에서 사각형의 박스 모양으로 투사하는데 이를 ‘레터박스’라고 한다. 행사 진행 측의 실수겠지만 프랑코포니 영화제의 레터박스는 줄곧 각도가 기울어져 있어서 상영 내내 신경이 쓰였다. 심지어 자막의 싱크가 맞지 않게 상영되는 작품도 있었다. 영화는 형식이 중요한 예술이기에 작품 그 자체 뿐만 아니라 전달되는 방식에도 무게를 둬야 한다. 2018년에는 더욱 발전된 프랑코포니 영화제를 기대한다.
하늘이 기다려
Le Ciel Attendra
프랑스 / 2016 / 105min / 드라마
15세 이상 관람가
감독: 마리 카스티유 멘션-샤르
출연: 노에미 메랑, 상드린 보네르
2016년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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