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마당 시네마당 #EIDF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남자 주인공 시몽은 여자 주인공 폴에게 연주회 초대장을 보내면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자신없이 묻는다. 문장이 물음표가 아닌 말줄임표로 끝난 것은 불확실한 사랑에서 오는 망설임과 간절함, 그리고 무엇보다 브람스를(또는 시몽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폴의 마음을 알기에 느끼는 그의 절망감을 시사한다. 누군가 프랑스 민중이 브람스에게 관심을 갖도록 하는 일은 절망적인 시도라고 했던가. 폴에게 편지를 쓴 시몽의 감정도 그랬을 것이다.
올해 14번째를 맞은 EBS 주최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EIDF)에 함께 가(서 글감이 되어)달라고 지인들에게 제안하던 에디터의 첫 마디도 비슷했다. 비슷한 주저함에 흐려지는 말꼬리.
“다큐멘터리 영화를 좋아하세요…”
자신없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던 첫번째 이유는 에디터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영화’라는 단어를 들을 때 여지없이 극영화를 떠올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꼽을 때 다큐멘터리를 드는 사람은 드물다. 그만큼 극장 다큐멘터리는 생소한 존재이기 마련이다. 에디터의 경우 시몽과는 달리 구애가 아닌 인터뷰이 요청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절절하게 고통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무심한 지인들의 답변은 냉정했다.
“다큐멘터리로도 영화제를 해?”, “EBS 제작 다큐멘터리라면 고등학교 자습시간에 봤던 것 같은데.”

영화제를 한답니다…
사실 ‘다큐 3일’이나 ‘다큐프라임 등의 프로그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할 TV의 ‘방송 다큐멘터리’와 영화의 형식을 갖춘 ‘극장 다큐멘터리(다큐멘터리 영화)’는 비슷해보여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 방송 다큐멘터리는 주로 시리즈로 기획되며 제작기간이 짧고, 명확한 해설의 전달 방식을 사용해야 하는 방송의 특성상 내레이션이 거의 필수적으로 포함된다. 반면 극장에서 상영되는 다큐멘터리 영화는 제작기간이 길며 방송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에 감독의 의도와 재량에 따라 비교적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하다. 내레이션이 선택 사항이므로 영상의 흐름이나 인터뷰를 통해 영화를 전개할 수 있는 것이다. 극장 다큐멘터리의 영화적 특성이 드러나는 것도 이 지점이다.
역설적이게도 ‘동물의 왕국’시리즈 정도로만 이따금 방송 다큐멘터리를 접했던 에디터가 ‘다큐멘터리 영화’를 처음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은 EBS를 통해서였다. 2004년부터 14년 동안 1년에 한번씩 개최된 EIDF는 진행되는 일주일 동안 상영작을 EBS 채널을 통해 방영한다. 한 채널에서 거의 일주일 내내 다큐멘터리 영화만 방송하는 것이다. 우연히 EIDF 수상작이자 미국 FBI의 내부고발자 ‘스노든’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시티즌포>를 보게 되면서 에디터는 다큐멘터리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다.

심각한 신변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미국 국민의 인권을 수호하고자 한 스노든은 현재 가족들과 함께 망명상태이다.
그리고 지난 8월 27일, TV에서만 관람해왔던 EIDF 상영작을 드디어 신촌의 극장 스크린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화여대 내부에 위치한 아트하우스 모모는 제14회 EIDF가 진행된 서울의 독립영화관 세 곳 중 하나다. 에디터가 이번에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관람한 EIDF 상영작 중 눈의 띄는 작품은 ‘아흔 살 소녀 블랑슈’와 ‘바그다드에서 온 편지’였다.
‘아흔 살 소녀 블랑슈’는 댄스 워크숍을 수강하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이야기로, 이번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과 시청자`관객상을 동시 수상했다. 수업이 진행될수록 학생 중 한 명인 블랑슈 할머니는 안무가 티에리를 사랑하게 되는데, 사랑에 빠진 그의 표정과 몸짓은 이상하리만큼 예술적으로 느껴진다. 영화는 약간 떨어진 곳에 멈춘 시선으로 블랑슈를 바라보지만 관객은 블랑슈의 턱없는 순수함에 천천히 감화된다.
예상했을 법 하면서 예상하지 못했을 법 한 결말부.
‘바그다드에서 온 편지’는 1910년대 영국인 중 유일한 아랍 외교 전문가이자 여성이었던 거트루드 벨의 삶을 조망한 영화이다. 감독은 벨이 아랍에서 영국에 있는 친구, 연인, 그리고 주로 가족에게 썼던 수많은 편지들과 주변 인물들의 가상 인터뷰를 통해 벨의 인생을 재구성한다. 내레이션을 맡은 틸다 스윈튼은 거트루드 벨의 목소리로 편지를 읽기에 가장 적절한 배우지만, 그의 목소리는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 되고 말았다. 벨이 제1차세계대전의 역사에서 차지한 의외의 위치와 무시되어 온 중요성을 고려하면, 그의 업적을 중점적으로 다룬 드라마틱한 연출도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신에 영화는 벨의 출생부터 죽음까지 지나치게 세세하게 설명한다. 매력적인 소재를 살리지 못한 평이한 진행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거트루드 벨이 대단히 흥미로운 인물인것만은 분명하다.
알고 보면 브람스의 팬이 많은 것처럼, 이렇게나 매력적인 다큐멘터리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많다. 제14회 EIDF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던 대학생 신동연 씨도 그 사람들 중 하나다. 상영작 중 ‘라스트맨 인 알레포’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던 그는 영화제의 관객들에게 다큐멘터리가 다루는 다양한 토픽에 주목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생각 외로 다큐멘터리가 다루는 주제는 방대하고 흥미롭다는 것이다. 이번 EIDF의 상영작만 보아도 자식을 두고 아마존으로 들어가버린 감독의 어머니 이야기(<아마조나>), 복합정신장애를 가진 디나와 아스퍼거증후군이 있는 스콧의 결혼 준비 이야기(<디나>), 로널드 레이건의 정치 퍼포먼스에 대한 기록(<레이건 쇼>) 등 제각각의 주제가 눈에 띈다. 신동연 씨는 아마 이후 매년 EIDF가 상영하는 작품들을 보러 오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
특히나 실존인물을 대상으로 하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사람들이 쉽게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인물이 소재인 다큐멘터리를 보면, 주변사람들이 인터뷰하는 부분과 같이 조미료가 가미되어 있지 않은 흔적들을 볼 수 있어요. 그런 흔적들을 통해 인물의 생애를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거든요.”
-신동연(22)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폴은 자신이 브람스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지만, 결국 시몽과 함께 연주회에 간다. 폴이 복잡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온 그 날부터 그들의 사랑은 시작된다.
아직 당신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헷갈린다면 우선 오늘 ‘아흔 살 소녀 블랑슈’부터 감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어쩌면 극장 다큐멘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시작될지도 모르니까.
(‘아흔 살 소녀 블랑슈’를 비롯한 제14회 EIDF 상영작은 현재 D-BOX(http://www.eidf.co.kr/dbox) 에서 유료 서비스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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