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한 온도의 기록
적절한 온도
프랑수와즈 사강 <슬픔이여 안녕>
신촌역 3번 출구로 나오면 보이는 <문학의 거리> 판넬은 소소하고 느낌은 거창하다. 왜 뜬금없이 여기에 이런 판넬이 위치해 있는걸까 하다가도 그 앞의 서점을 보며 작게 납득한다. 문학의 거리라는 말이 주는 낭만이 마음에 들었으나, 단정한 홍익문고의 간판을 한 번 올려다보고 유리문을 밀며 들어갔을 때 내가 정작 계산한 책은 참고서였다. 사회에서 높게 쳐주는 가치가 무엇인진 몰라도, 그것이 현대에 와서 문학과는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내 착각인가?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이런 상황이 비단 문학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테다. 김사과의 소설 <02>의 한 문장처럼 “아무도 책을 읽지 않는다.” 그 대신 “사람들은 크고작은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고, 하루종일,” 그리고 작가가 말하길 “그건 당연하다, 왜냐하면 아름다우니까. 사람들은 이미지가 문자에 비해서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뜬구름 잡는 얘기가 아니다. 세상은 문자를 지겨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세상의 문자는 축약되고, 축약되다 못해 이미지로 대체되고, 기어이 뭉툭한 아이콘이 되어 자길 눌러주길 바라는 듯이 섰다. 그렇게 되면 나는 아주 가끔 청개구리처럼 글자가 그리워진다. 한 장씩 넘겨야만 하는 종이책의 글자라면 더더욱.

File:Susan Sontag (1966 author photo – Against Interpretation).jpg – Wikimedia Commons
“독서는 제게 여흥이고 휴식이고 위로고 내 작은 자살이에요.
세상이 못 견디겠으면 책을 들고 쪼그려 눕죠.
그건 내가 모든 걸 잊고 떠날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우주선이에요.”
<수전 손택의 말>
독서를 ‘작은 자살’이라고 표현한 수전 손택의 인터뷰에서 나는 일시적인 몰입과 단절이 곧 자살을 의미하는 것이겠거니 멋대로 상상한다. 나 역시 단절을 원할 때 기꺼이 글자를 찾는데, 이는 그가 말한 작은 자살과 유사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독서는 혼자 하는 것이면서도, 어떻게 보면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다. 독서를 한다는 것은 남이 매끄럽게 닦아놓은 사상의 길을 함께 걷는 일과 같다. 작가와 함께 걸을 때도 있고 인물과 함께 걸을 때도 있으며 내가 전혀 모르는 사례 속의 어떤 사람들과 함께 걸을 때도 있는데, 나는 그가 안내하며 내게 보여주는 새로운 영역을 천천히 따라간다.
요컨대 독서를 할 때 작가는 가이드이고 나는 팔로워다. 나를 완전히 몰입시키는 가이드도 있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가이드도 있다. 말을 이해하는 데만 한참이 걸려 부랴부랴 쫓아가야 하는 가이드도, 시종일관 나를 이죽거리게 만드는 가이드도 있다. 작가가 말하는 것들과 사사건건 충돌할 때면 사고의 과정은 순탄하지 않다. 머릿속은 완전히 과부화 상태가 된다. 오지의 비포장도로를 건너가는 트럭처럼 끝없이 덜컹거리며 나는 멀미를 느끼면서도 가이드를 쫓는다. 좌우지간 나는 혼자이면서도, 가이드가 끝없이 요구하는 소통에 발을 맞추어 간다.
<불량공주 모모코> 속 결국 소통의 엔딩
불량 공주 모모코(下妻物語/2004)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혼자 하고는 있지만 혼자 할 수 없는 일’은 독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영화를 볼 때 감독의 시선을 카메라로 따라가고 음악을 들을 때도 자연스럽게 의도된 멜로디에 끌려간다. 혼자 취미를 즐기고 있다고, 단절되어 있다고 느끼는 순간의 대부분이 실은 긴밀하기 짝이 없다. 누군가 우울을 견디지 못하고 잘라낸 감정을 우리는 시로 읽고, 외로움을 찍어낸 노래를 오래 곱씹으며 비슷한 감정을 공유한다. 하다못해 외부의 모든 것을 제하고 골방에 틀어박혀 혼자 사유한다고 해도 결국 그 사유의 뻗친 뿌리는 타인에게서 끌어온 삶의 양식이다. 내가 온전히 혼자서 할 수 있는 생각이라는 게 있나,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주고 살아온 우리는 좋든 싫든 시간과 차원을 넘어 끝없이 소통할 수 밖에.
이처럼 “따로 또 같이”는 인간이라는 종의 징그러운 특징이다. 나는 나이지만 나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안의 타인은 오래오래 남아 나를 구성하고 나를 해체하고 다시 구성한다. 인스타그램만 켜도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공유하는 촘촘한 On-Line상태가 지겨워서 나는 더 콩벌레처럼 혼자이고 싶다고 외쳐보지만, 완전한 단절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렇게 뭉친 찰흙 속에 숨겨진 유리조각처럼 발견하고 번번히 놀란다.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영화 <불량공주 모모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인간은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는거라고요.’, 영화의 초반에 시니컬하게 ‘홀로서기’를 주장하던 모모코는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점차 변화한다. 모모코가 이치코의 스쿠터에 매달려 함께 달려나가는 엔딩은 그래서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던 것 같기도 하다. 결국 인간은 소통하는 존재일 수 밖에 없다는 메시지가 잔잔해서.
신촌 속 소통을 위해 단절된 공간
냉탕과 온탕을 오가듯이 매번 소통과 단절을 시도하지만 완전한 소통 상태도 완전한 단절 상태도 없었다. 이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썩 좋은 해결책이 되지도 않는다. 단절되고 싶은 욕망이 지나친 상태나, 연결되고 싶은 욕망이 지나친 상태나 피로하긴 마찬가지이다. 날 좀 내버려 두라고 징징거려봤자 나는 혼자 남을 수 없고, 제발 곁에 있어달라고 애원해봤자 나는 누구도 붙들어 놓을 수 없다. 신촌의 카페에서 혼자 놀기를 전전하며 수두룩 빽빽한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긴 하지만, 결코 함께 있지는 않은 경우처럼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소통과 단절 사이 어중간하게 한 발 걸친 독서를 즐기기에 나쁘지 않은 공간이다. 일차적으로 사람이 많기 때문이고 이차적으로 그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늘 신촌은 넓고 사람은 많고 커피가 차갑다.

오늘도 역시 프랜차이즈 매장은 넓고 사람은 많고 직원은 친절하며 에어컨의 온도는 적당하다. 책은 너무 무거운 것이여서는 안되지만 너무 가벼운 것이여도 안된다. 명도가 낮은 오렌지빛 조명이 따듯하고 은은하다. 나는 수 없이 눈을 깜빡인다. 침묵 이상 소음 이하의 소리들이 카페의 공간을 떠다닌다. 안에는 나처럼 작은 단절을 즐기기 위해 습관적으로 사이렌의 몸을 찾아들어온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덜 지난 여름의 감각을 느끼며 나는 공기에 녹아들어가고 있다.
정신을 차려보면 거의 다 녹아버린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밍밍하기 짝이 없다. 냉기를 빼앗긴 미지근한 음료 대신 몸 전체가 차갑게 식었다. 여름에 에어컨을 튼 실내는 너무 쉽게 서늘해졌고, 빠르게 소름이 돋았고, 끄면 이전보다도 더 더워졌다. 이처럼 적절한 온도를 찾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독서를 마치고 다시 가방에 집어넣은 책은 어쩐지 올 때보다 가볍게 느껴진다. 책에 영혼이 있다면 그것의 어느정도는 나에게 붙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리고 내 안에서 아주 오래 살아 숨 쉴 것이라고 생각하면, 결국 단절을 통해 얻은 것도 소통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 신촌에서 혼자 즐기고 돌아가는 독서란 드물게 소중한 나의 ‘적절한 온도’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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