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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2017 · 09 · 27

잔치마당 시네마당 #고양이 케디

Editor 왕 잔치

  고향 부산에서, 우리 집은 꽤나 높은 산 위에 있었다. 한 번 집을 나서면 그 언덕을 내려온 것이 아까워 어떻게든 꾸역꾸역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버거운 하루가 저물고 더 이상 귀가를 미룰 수 없는 시간, 털레털레 오르던 그 언덕길에서 사람보다 더 자주 마주친 건 길고양이들이었다.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다 문득 느껴진 시선에 고개를 돌리면 어김없이 골목골목마다 나를 빤히 들여다보는 길고양이들. 잠시 멈춰 서서 시선을 교환한다. 긴장된 목덜미, 금방이라도 튀어 오를 듯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다. 경계심 가득한 그 모양새 위로 하루에 지쳐 날카로워진 내 모습이 겹쳐 보인다. 괜한 동질감에 조심스럽게 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간다. 다섯 걸음도 채 떼기 전에 길고양이는 웅크렸던 몸을 튕겨내며 어두운 골목 너머로 사라진다. 입맛이 썼다. 며칠인가 그런 일이 반복되자 그들에게 다가가 보는 것은 포기하게 되었다. 언덕을 오를 때면 여전히 길고양이들을 마주치곤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눈동자는 내 발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집사’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해온 인간이 스스로 고양이의 집사임을 자처하며 고양이들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일이 벌어졌다. “나만 없어. 진짜 사람들 고양이 다 있고 나만 없어.” 하는 아우성이 각종 SNS를 통해 터져 나왔다. 넋을 놓을 만큼 귀여운 고양이들의 영상이 연일 타임라인을 점령했다. 고양이를 소재로 한 짧은 만화나 그림들에 미소 지으며 에디터 본인도 하마터면 ‘랜선 집사’ 대열에 합류할 뻔 했다. 그러나 이내 휙 몸을 돌리며 나를 외면했던 부산의 길고양이들을 떠올리면서 간신히 중립을 지켰다.

 

<고양이 케디> (Kedi, 2017)

 

  부산의 길고양이들은 어느덧 기억에서 멀어지고 쏟아지는 고양이 영상 공세에 랜선 집사 쪽으로 마음이 조금 기울 무렵, 고양이의 천국이라는 이스탄불의 고양이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고양이 케디> (Kedi, 2017)를 보았다. 러닝타임 내내 화면에 보이는 것은 딱 세 가지. 고양이, 사람,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이스탄불의 풍경이다. 이스탄불의 인구가 1500만 명이라는데 고양이는 2000만 마리 쯤 되어 보일만큼 많은 고양이들이 스크린을 스쳐간다. 고양이는 먼 옛날 오스만 시대부터 이스탄불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고 한다. 지금도 고양이와 사람이 꽤나 공평하게 도시를 나눠 쓰고 있다. 제 집 드나들듯 이스탄불의 가게며 집을 드나드는 고양이를 누구 하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특별히 네 발 달린 털짐승을 질색하는 것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미소짓게 할 장면들이 시종일관 펼쳐진다.

  사실 영화는 대단한 서사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인간과 고양이 사이의 관계를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휴먼 감동 실화처럼 소개하지도 않는다. 담담하고 따뜻하게 이스탄불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는데 이들은, 그러니까 사람들과 고양이들은 다들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 제 멋대로 살다가 새끼를 밴 후 책임감을 갖게 된 고양이, 고양이를 통해 소통의 결핍을 채운 남자, 구역을 평정하고 싶어 하는 이 구역의 미친 고양이, 고양이들을 돌보며 스스로를 치유하고자 하는 여자, 너무 예의발라 배가 고파도 가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창문만 두드려 대는 고양이, 고양이를 돌보는 것을 일종의 종교적 사명으로 여기는 남자, 고양이, 사람, 고양이, 사람, 고양이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이스탄불의 모든 이들이 고양이를 사랑하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이스탄불에서 고양이가 사라지는 일은 도시의 영혼 한 조각을 잃게 되는 일일 거에요”라는 대사가 전혀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아름다운 이스탄불의 전경과 정겨운 골목 구석구석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사람과 고양이는 모두 이스탄불의 아름다운 풍경 안에서 공존하고 있다. 이 곳에선 길고양이니 집고양이니 하는 구분은 크게 의미가 없다. 이스탄불의 고양이들은 나를 외면했던 부산의 길고양이들이나, 지금 한국의 집사 열풍의 주역들과는 다르다.  고양이는 모든 사람의 고양이고, 사람은 모든 고양이의 사람이다. 길가에 세워진 커다란 물통에는 “개와 고양이를 위한 물입니다. 다음 생에 목마름으로 고통받고 싶지 않다면 건드리지 마세요” 라는 문구가 붙어있다. 감히 확신하건데, 뒤의 문장이 없더라도 아무도 그 물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동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도 사랑할 수 없죠” 고양이를 철천지 원수로 여길 줄로만 알았던 생선가게 주인 아저씨조차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스탄불 출신이라는 제다 토룬 감독은 이런 공존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상공에서 넓게 촬영한 이스탄불의 풍경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고양이의 시점을 따라 카메라를 움직이기도 한다. 고양이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은 곧 고양이를 대하는 사람들에게로 이어진다. 카메라가 고양이를 비추는 곳엔 어김없이 고양이와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그들은 고양이와 그들을 품고 있는 이스탄불도 사랑할 줄 안다. 어떤 시민들은 시에서 주도하는 개발 정책으로 터전을 잃고 위기에 처할 고양이들을 걱정하기도 한다. 그 것은 곧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걱정이기도 하다.

 

둘 중 누가 가게 주인일까?

 

  이스탄불 사람들과 고양이들의 공존에서 더 흥미로운 지점은 고양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고양이들의 태도다. 사람들은 때때로 고양이를 돌보고 먹을 것을 제공하지만, 결코 고양이보다 우월하거나 지배적인 위치에서 그들을 대하지 않는다. 그들의 자유를 존중한다. 내가 먹이를 주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먹이를 줬는데 내 무릎에 올라오지 않는다고 해서 섭섭해하지 않는다. 오는 고양이 막지 않고, 떠나는 고양이 붙잡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영화 속 한 시장 상인과의 인터뷰 도중 일어난 일은 상징적이다. 어른 고양이에게 던져져 죽어가는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다른 상인의 손을 통해 그 상인의 손에 전달된다. 그는 그 고양이를 보며 진심으로 가슴 아파하지만 ‘그것이 자연의 섭리’라며 어쩔 수 없어 한다. 뒤이어 새끼 고양이를 조심스레 안아 들고 동물 병원으로 향하지만 새끼 고양이를 이렇게 만든 어른 고양이를 마냥 나쁘다고 비난하진 않는다. 그는 고양이들의 세계를 존중하며 다만 그 안에서 자신이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찾을 뿐이다.

 

배가 고프면 창 밖에서 창문을 긁어대는 젠틀맨, ‘두만’

 

  사람을 대하는 고양이의 모습 또한 놀랍다. 사람들에게 먹을 것이나 피난처를 제공받기도 하고 때론 애교도 부리지만, 고양이는 스스로를 사람의 반려동물로도, 사람을 그들의 집사로도 여기지도 않는다. 매일같이 먹이를 주고 친하게 지내는 인간일지라도 자신이 달가워하지 않는 부위인 꼬리를 만지면 화를 낸다. 실제로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인간이 우위에 있다 할지라도 인간을 두려워하거나 의지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고 누군가 고양이의 요구를 들어주었을 때 그들이 바로 무릎에 올라와 애교를 부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릎 대신 발 밑에서, 고양이가 맘이 내킨다면 다른 것을 선물해 줄 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삶이 미소짓는 행운의 순간을.

  “고양이가 발 밑에서 당신을 올려다보며 ‘야옹’ 한다면 그건 삶이 당신에게 미소 짓는 거랍니다. 행운의 순간이죠.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순간입니다.”

  악어와 악어새 같은 단순한 상호 의존적 공생 관계를 넘어서, 이스탄불의 사람과 고양이는 진정으로 공존하고 있다.

 

‘케디’는 고양이 이름이 아니라 고양이를 뜻하는 터키어 Kedi다.

 

  <고양이 케디> 라는 제목 때문에 나는 케디라는 고양이가 언제 나오나 궁금해하며 영화를 지켜봤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그런 고양이가 나오지 않기에 의아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케디(Kedi)란 단어는 터키어로 고양이라는 뜻이었다. 굳이 재차 번역하자면 <고양이 고양이>가 영화 제목인 셈인데, 곱씹어 보면 정말 잘한 번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길고양이, 집고양이 같은 인간 위주의 구분 없이 고고함과 자유로움을 잃지 않는 고양이의 고양이다움을 잘 표현한 것 같다. 물론 부산에서 나를 피하던 길고양이들이나 집사를 수족처럼 부리는 집고양이들이 ‘고양이다움’을 잃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은 고양이의 천국 이스탄불이 아니니까. 형제의 나라, 이스탄불 사람과 우리 사이에도 문화적 차이가 있듯 이 또한 국적이 다른 고양이들 간의 문화적 차이일 뿐이다. 그런데 에디터는 사람과 고양이, 서로가 서로를 대하는 그 태도만큼은 괜히 부럽다. 사람과 고양이라는 각자의 정체성을 떠나 서로의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긍정하는 그 태도가, 몹시도 부럽다.

  “사는 법을 알게 되면,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된다” 이스탄불엔 철학자들만 사는지 화면에서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도 이런 얘기를 한다. 한때 에디터에게는 고개를 휙 돌려 사라지는 고양이를 보며 섭섭해 하던 때가 있었다. 적어도 그 때 보다는 지금, 사는 방법을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다. 그만큼 사랑하는 법도 조금은 더 알게 되었길 바란다. 다가오는 추석에 고향 부산에 내려가면 여전히 그 언덕 길엔 고양이들이 있을 것이다. 고양이가 또 다시 고개를 돌려 어두운 골목 너머로 사라진다 해도 이제는 섭섭해 하지 않겠다. 그래도 혹시라도 고양이 한 마리가 내 발 밑에 다가와 삶이 미소 짓는 순간을 선물해준다면, 그건 정말 멋진 일일 것이다.

왕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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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잔치

잔치의 시선으로 신촌의 장면과 사람, 장소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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