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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2017 · 09 · 20

잔치마당 시네마당 # 서울국제건축영화제

Editor 왕 잔치

꿈처럼 기억되는 장면들이 있다. 그 순간에는 의미를 찾을 수 없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 가끔씩 떠오르는 삶의 장면들. 숱하게 생겨나고 잊혀지는 기억 속에서 아득히 그러나 선명히 그려지는 추억의 장면들.

나에게도 그런 장면이 있다. 나의 지긋지긋한 고향, 서울에 도착한 첫날밤. 20년 전 어느 밤, 나는 부모님과 함께 차를 타고 이 도시에 도착했다. 말로만 듣던 서울. 앞으로 살게 될 아파트로 향하던 중 거리의 주홍빛 야경을 바라보며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여기서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까? 어떻게 살게 될까?’

이 도시를 처음 만난 순간

그 질문에, 서울은 기상천외 파란만장한 일들로 대답했다. 이 도시에서 각종 사건에 맞닥뜨린 나는, 때로는 기쁘게, 때로는 묵묵히, 때로는 울분을 터뜨리며 그 길을 걸어왔다. 그닥 달갑지만은 않은 길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그 길을 걸음으로써 서울인, 즉 서울라이트가 되었다. 이렇게 한 도시의 한 사람이 된 나는 가끔씩 어린 내가 했던 순진한 질문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치기도 한다. ‘ 무슨 일이 일어나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질문은 하나의 오프닝이었다. 마치 ‘옛날옛적에…’와 같은 이야기의 첫 시작. 혹은 검은 스크린 너머에서 들리는 나레이터의 첫소절. 하지만 나는 서울에 쓰인 나의 이야기를 오래도록 사랑하지 못했다. 스물한 살 무렵, 예쁜 집 사진에 이끌려 생애 첫 건축책을 읽게 될 때까지.

그 책을 통해 나는 집 한 채에도 다양한 이야기의 실타래가 얽혀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간에 머무르는 사람, 공간을 짓는 사람을 비롯해 공간을 지나치고 바라볼 무수히 많은 이들의 삶이, 건축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건축은 단순한 공간의 창조가 아니라 삶의 그릇을 담아내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작업이며, 이런 작업이 모이고 모여 하나의 도시가 만들어지고, 그래서 건축과 도시는 이야기를 담아내는 동시에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는 작은 진실을 깨달은 것이다.

헌데 이 작은 진실을 알아차리는건 꽤나 힘든 일이다.  그렇기에 작게나마 그 진실을 만날 자리가 필요하다. 운 좋게도 신촌에는 매년 그 진실을 마주할 기회가 찾아오니, 바로 올해 9회를 맞이한 서울국제건축영화제가 그 기회이다.

 

 건축영화제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사람’

제 9회 서울국제건축영화제를 맞이하여 아트하우스 모모에서는 9월 11일부터 6일간 25편의 영화가 상영되었다. ‘도시/나누다’를 주제로 한 이번 건축영화제는 총 5개의 섹션(어반스케이프/마스터&마스터피스/건축유산의 재발견/비욘드/특별전)으로 구성되었다.

건축영화를 단순히 건축물을 지루하게 찍어놓은 영화 혹은 건축/토목 과정을 기록한 영화 등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건축영화의 핵심은 물리적인 건축물을 카메라에 담는 것이 아니다. 건축영화는 영화적 형식을 통해 ‘건축’과  ‘사람’ 간의 다양한 ‘관계’를 다루는 데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관계는 개인적일 수도, 사회적일 수도 있다. 영화가 관계의 사회적 측면에 대해 더 자주 다룰 경우, 작품 속 고민은 도시와 인간 삶의 관계에 대한 고민으로 확장된다.

이번 영화제는 섹션별로 다양한 작품을 다루었고, 덕분에 관객이 경험할 수 있는 건축x영화와 사람의 관계에 대한 고민의 스펙트럼은 한층 더 넓어졌다. 건축영화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며, 어떠한 주제를 다루는지 궁금하다면 아래의 여정을 한번 따라가보도록 하자.

우선 건축과 도시에 대해 딱딱하고 무거운 인상만 받은 이들을 위해, 가장 작지만 가장 흥미로운 ‘특별전’을 먼저 소개하고 싶다. ‘특별전’은 말하자면 진입장벽(?)이 가장 낮은 섹션이다. 건축학도들만큼이나, 영화광 심지어는 여행광들까지도 만족시킬 ‘특별전’의 작품들은 서울을 비롯한 여러 도시들의 매력과 이색적인 이야기를 선보이는 영화들이다. <칠수와 만수>, <파리의 에릭 로메르>, <로마> 등을 통해 도시의 다양한 풍경과 도시민의 심리를 경험하다보면 크고, 규격화되고, 복잡하게만 느껴지던 도시가 조금은 부드럽고 친숙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또다른 건축학개론,  <로마>

‘특별전’을 통해 건축과 도시라는 단어가 말랑말랑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면, 이제는 건축과 도시에 담긴 ‘사람과 삶’ 이야기를 들을 차례다. ‘어반 스케이프’ 섹션은 말그대로 도시와 맞물려있는 사람들의 삶을 주제로 하여, 건축과 도시에 대한 고민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영화들을 다룬다. 극영화 혹은 다큐멘터리 등 형식에 상관없이, 영화적 재미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리스본에는 누가 사는가>, <이태원>같은 작품들이 있다. <리스본에는 누가 사는가>는 유럽의 대표적 관광지 리스본의 이면을 여실히 드러내는 영화다. 특히 리스본 변방의 가난한 다문화 구역 모라리아(Moraria)의 사례를 들어, 관광객은 늘어나는 반면 거주민은 오르는 집세를 감당하지 못해 도시를 떠나는 현실을 집중조명했다. 지역 원주민, 상인 그리고 관광객 등 다양한 사람들의 인터뷰와 그 내용에 걸맞는 이미지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에 대한 단순한 이해를 넘어 그 이면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삶을 적절히 담아냈다.

 

리스보너가 리스본을 떠나는 이유

<이태원>은 개별 등장인물의 삶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관찰하는 영화다. 영화는 기지촌이자 유흥가였던 이태원에서 청춘을 보내고 노년을 맞이하는 세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다. 미군 클럽에서 줄줄이 쌓인 카드를 계산하느라 바빴다던 나키, 바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면서 ‘무거워 뒤지는 줄 알았던’ 레게 머리까지 시도해보았다던 영화, 미국인 남편과 함께 길을 걸으며 양갈보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던 삼숙.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그들에게는 ‘입구에서부터 마음이 확 편해지는 동네’ 이태원에서 벌어진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통해 관객은 공간과 삶의 관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다.

 

도시민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절로 생각난다

‘어반 스케이프’를 통해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한껏 체험하고 나면, 조금 더 용기 있는 이들은 ‘마스터&마스터피스’ 섹션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제목에서부터 유명 건축가들의 이름이 들어가, 왠지 모르게 문하생의 마음으로 보게 되는 <알바로 시자와 담배 한 대를>, <안도 타다오>는 건축가의 작업 스타일과 가치관을 잘 담아낸 영화들이다. 특히 <안도 타다오>는 단순한 기록으로서의 영화가 아닌, 영화적 재미가 살아있는 영화로서 일반 대중에게도 큰 흥미를 끌만한 작품이다.

이외에도 건축과 영화의 만남처럼 서로 다른 예술 분야의 만남을 통해 영감의 확장을 시도한 ‘비욘드’ 섹션도 눈에 띄었다. 본 섹션의 대표작으로는 반 고흐의 그림체로 매 컷을 채운 애니메이션 <러빙 빈센트>가 있다. 건축과 영화의 만남처럼, <러빙 빈센트>는 영화의 조상격인 회화와 영화의 만남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반 고흐의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영화 , <러빙 빈센트>

영화를 넘어 건축과 도시에 관해 좀더 깊은 토론을 나누고 싶은 이들에게는 ‘호스트 아키텍트 포럼’이 있다. 총 네 차례의 포럼에는 영화감독, 건축가, 도시계획가 등이 참여하여 건축학도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건축과 도시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3차 포럼 ‘건축, 계속 해도 될까요?’에서는 도시재생, 첨단 기술과의 결합 등 건축의 트렌드와 발전 방향에 대해 논의할 뿐만 아니라, 건축가 혹은 예술가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작업을 해야하는가에 대해 충분히 고민할 수 있다. 일반 상영회에서와 달리, 포럼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 질문하고 그들과 소통함으로써 ‘나’와 ‘도시’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더 나아가서는 삶의 이야기를 반추할 원동력과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신이 있는 곳

건축과 영화는 모두 공간에 시간을 담아내는 예술이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건축의 경우에는 실제의 공간에, 영화의 경우 상상의 공간에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공간에 시간을 흘려보내는 주체는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의 행위와 생각은 서사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공간과 공간에 담긴 삶은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의미는 우리가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다.

물론 신촌을 비롯한 서울과 그곳에 쓰이는 우리 삶은 영화의 짜인 각본과는 달리 정돈되어있지 않는, 도무지 시작과 전환점을 알 길이 없는 이야기이다. 그럴 때  건축영화 한 편을 보라. 그때 당신은 우리가 걷는 공간이 우리의 삶을 담아내는 특별한 그릇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삶의 이야기를 어떻게 정리하고 채워나갈지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후에 당신은 걸음걸음마다 공간과 그곳의 이야기를 더 잘 느끼게 될 것이다. 건축은, 도시는, 걸을 수 있는 영화니까.

왕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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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잔치

잔치의 시선으로 신촌의 장면과 사람, 장소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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