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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2017 · 10 · 09

잔치마당 시네마당 #우리의 20세기

Editor 정동

지난 휴일을 돌이켜본다. 간만의 여유로운 가을 아침, 반가울 줄만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고 오히려 낯설기만 하다.계절이 넘어가는 시기마다 으레 찾아오는 생각 때문이다. ‘벌써 시간이 이만큼이나 흘렀네’

1년만 거슬러가보자. 2016년 10월, 딱 오늘같은 늦가을날 당신이 열중하던 일은 무엇이었나. 가을 축제, 인기 드라마,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정치적 대사건, 그리고… 반복되는 인생 고민. 이를테면, ‘지금 행복한가?’
이 느닷없는 질문에, 어릴 적엔 자신있게 ‘응!’하고 대답한 적이 많았으리라. 그러나 요즘 들어 저 질문은 점점 슬프게 느껴지고, 두려워지고 때로는 짜증까지 난다. ‘아닌거 알면서 왜 물어?’ 누군가의 말마따나, 행복을 묻는건 불행하다는 뜻니까.
그래도 이 질문을 떨쳐버릴 수는 없다. 피한다고 피해지지도 않을뿐더러, 애초에 질문이란 어떤 답이라도 가져오기 마련이니까. 그저 자석처럼 답이 끌려오니까. 단지 그 답이 맘에 들지 않을 뿐이다. 그럼에도 더 좋은 답이 나오리라는 작은 기대는 남아있다. 하지만 그걸 가지고 무얼 할 수 있을까? 그게 유효하기는 할까? 이처럼 매년 찾아오는 걱정을 달랠 한 편의 영화가 있다. 바로 <우리의 20세기>다. 


1979년,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 할인마트 주차장에 놓인 자동차 한 대가 갑작스레 화염에 휩싸인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궁금증을 자아내는 이 황당한 이미지와 함께 영화는 시작된다.


뒤이어 나오는 나레이션은 단지 낡은 자동차의 엔진이 갑작스레 폭발한 일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 이유와 별개로 다소 맥락없게 느껴졌던 이 이미지는, 사실 영화 속 인물들에게 던져진 모든 상황을 함축한다. 이 이미지의 ‘황당함’ 혹은 ‘예측불가능성’이야말로 도로시아와 제이미의 삶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79년도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의 삶과 역사로서의 시대 각각은 굉장히 복잡하며, 그 둘의 관계 또한 첨예하게 얽혀있어 한번에 이해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영화는 성장 서사 안에 다양한 주제들을 담아냈고, 그 주제들은 제목 안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여기서 영화의 원제가 <20th century women>이라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 원제는 ‘여인들’보다 ‘우리의’가 좀더 쉽게 대중성을 획득하리라는 홍보배급사의 판단에 따라 잊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원제의 세 단어(20th, century, women)는 이 복잡다단한 영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다.


20th/ 시절


세기가 아니라 해를 세어보자. 꼭 스무번째가 아니더라도, 올해는 각자의 인생 몇번째 해다. 우리는 그 몇 번째 해들로 이루어진 역사의 시기를 ‘시대’라 칭하며, 삶의 한 시기는 어떤  ‘시절’이라 부른다. 제이미에게 1979년은 삶에서의 열다섯번째 해이며 그에게 이 해는 혼란스런 시절의 일부다. 이제 막 유행가에 심취하였고, 친구에게 성관계에 대해 묻기 시작하는 때다. 목적이니 방향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기보다 그 순간의 재미를 추구하는 때. 제이미는 재미로 잠시간 호흡을 정지하는 게임을 하게 되고 그 바람에 응급실에 실려간다. 아들을 더이상 혼란에 방치할 수 없다는걸 깨달은 엄마 도로시아는 자신이 운영하는 하숙집의 스물세살 에비와 제이미의 친구 줄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다소 황당한 요청에 대해, 에비는 어떻게 도와야 하는가 묻고, 도로시아는 에비가 제이미보다 고작 몇 살 많다는 이유로 ‘너의 (좀더 성숙한) 삶을 체험하게 해주라’고 말한다.

십대의 사춘기라는 상황 설정은 뻔하지만, 방황과 혼란은 결코 삶에서의 일정 시기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뻔함은 폭넓은 공감을 이끌어낸다는 장점을 갖는다. 열다섯이 아니라 스무번째 해를 훌쩍 넘겨 살아가는 이들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불안과 마주하고 있으리라. 이 보편적인 불안의 제시를 통해, 영화는 개인이 가진 불안을 관객에게 전달하고자하는 목표를 드러낸다. 영화 초반 엄마의 걱정을 받는 제이미가, 도리어 엄마에게 묻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엄마, 지금 행복해?’


행복하냐는 제이미의 물음에 대해 도로시아는 ‘행복하냐고 묻는건 우울의 지름길이야.’라고 태연히 대답한다. 그러나 그녀의 태연한 미소는 내면의 불안을 감추기에 역부족이다. 더 많은 해를 살아낸 도로시아 역시, 자신의 삶에 존재하는 불안을 피할 수는 없다. 게다가, 작품 속에서 도로시아는 개인의 불안을 사회적 층위로 확장시키기까지 한다. 20년대에 태어나 대략 1930년대에 제이미와 같은 방황의 시절을 보냈을 도로시아의 삶도 여전히 흔들리긴 마찬가지니까. 그녀 역시 쉰 살을 훌쩍 넘긴 인생의 또다른 ‘시절’에, 개인의 삶을 뛰어넘는 사회적 혼란,  즉 ‘시대’의 혼란을 목격하고 있으니까.
 

Century / 시대
 
도로시아-제이미 모자관계는 사실 20세기 미국 사회의 전반부-후반부의 관계에 대응된다. 대공황시기에 태어나 2차대전과 냉전을 겪은 구세대는 도로시아로 대변되며, 60년대에 태어나 저항문화와 반전 그리고 로큰롤을 체득한 신세대는 제이미로 상징된다. 문제는 구세대가 신세대를 걱정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겨난다. 구세대가 보기에 신세대가 맞이한 새 시대는 말그대로 답을 찾을 수 없는 혼란이다. 철십자 혹은 붉은색처럼 눈에 띄는 적에 대한 공포는 사라졌으나, 그 대신 보이지 않는 ‘무의미’의 위기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영화에도 등장하는 79년도 지미 카터 대통령의 ‘자신감의 위기(Crisis of confidence)’ 연설은 그런 시대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인간의 정체성은 이제 그가 ‘무엇을 하는가’보다 ‘무엇을 가졌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래전에 깨달았습니다. 소유와 소비는 삶의 의미에 대한 갈망을 결코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를 채우기 위해 애쓰지만 결국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시기. 의미를 위해 소비하는 게 아니라, 소비를 위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시기가 바로 70년대 말 미국이다. 이같은 사회의 공허와 불안은 제이미를 비롯한 하숙집 구성원들에게도 똑같이 전달된다. 비록 구세대로서 카터의 연설에 적극 공감한 도로시아만이 유일하게 연설에 대해 ‘아름답다’고 찬탄했지만. 어쨌든 도로시아가 아들 제이미를 걱정하는 개인적인 문제는,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사회적 불안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도로시아는 제이미에 대한 걱정 이면에 존재하는 자기 세대의 불안감을 쉽사리 파악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같은 자기 세대의 불안감은 결국 도로시아 자신의 삶에 대한 고민과 이어져 있다는 것도.
한편, 밀물처럼 쓸려온 무의미의 위기에 투쟁한 이들이 없는 건 아니다. 그 공허함 속에도 가치를 추구한 이들이 있었다. 오히려 70년대 말 미국에서는 사회 현상과 구성원에 대한 인식 변화를 위한 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그 중에는 바로 여성주의 운동도 포함된다. 

 
Women / 여인들

에비와 줄리 두 사람, 아니 두 여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제이미를 돕고자 한다. 그러나 제이미나 도로시아처럼 에비와 줄리 역시 혼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줄리의 경우, 이미 남자들과 몇 차례 성관계를 가진 적 있으며 바람직한 관계란 무엇인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에비의 경우, 겉으로는 자유분방한 사진가지만 속으로는 자궁경부암으로 속앓이하는, 진정한 사랑을 더이상 믿지 않는 인물이다. 그 둘이-정확히는 조금 더 나이를 먹은 에비가 먼저-70년대를 살면서 사랑, 관계 그리고 사회적 지위에 대해 답을 내리는 방법 중 하나는 여성주의였을 것이다.
영화 속에는 당대 출간된 책 혹은 글의 인용구가 적잖이 등장한다. 그중 에비가 제이미에게 소개해주는 책(‘Our Bodies Our Selves’)은 제이미에게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다. 책을 정독한 제이미는 한 소년과 오르가즘이 무언가에 관해 나름의 심각한 논쟁을 벌인다. ‘여자애가 느끼는 오르가즘이 진짜가 아닐 수도 있어. 오르가즘은 그렇게 단순한게 아니야…’ 결국 제이미는 소년에게 얻어맞게 되고, 그런 아들을 보며 도로시아는 아들의 상태가 호흡 중지 게임 때보다 나아진 게 없다고 생각하며 혀를 찬다.


여성주의가 다수의 사람들에게 공감될 수 없는 고민이라고 할지언정(by 홍보를 위해 제목을 의역한 배급사), 여성주의는 분명 누군가에게 성장의 과정이자 시대의 고민이었다. 따라서 ‘여인들’의 관점에 따라 영화를 보는 것도 커다란 의미를 가질 것이다. 등장인물들의 고민은 한 ‘시절’과 ‘시대’를 공유함으로써 서로 맞물려있으며 따라서 성장통을 겪는건 비단 제이미 뿐만이 아닌 다른 두 여인이기도 하니까. 제이미가 나름의 생각으로 행복과 사랑에 대해 고민하는 것처럼, 에비와 줄리도 시대의 새로운 사고와 가치로 자신의 삶에 대해 답을 내보는 것뿐이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면, 오르가즘 논쟁 사건으로 인해 도로시아는 더 이상 위탁이 어려워졌다 생각하고 내키지 않는 간섭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참을 수 없게 된 제이미는 결국 줄리와 함께 도망친다. 그러자  도로시아는 (에비를 포함한) 의리있는 하숙집 친구들과 제이미를 찾으러 나선다. 도로시아가 기어코 제이미를 찾아냈을 때, 제이미는 묻는다. ‘도대체 왜 이러는거야?’
그에 대한 도로시아의 대답. ‘난 그저 네가 행복하길 바래…’


<우리의 20세기>는 결국 불안한 시절과 피할 수 없는 시대, 그치지 않는 물음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작품이다. 물론 거대한 주제를 작은 가족드라마에 담아내려다보니 가벼운 컷조차도 의미의 과부하에 걸린 듯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무게감은 어쩌면 인물의 삶과 시대 자체가 주는 혼란스러움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혼란에 직면하는 일은, 행복을 바라다 지쳐버린 우리가 고민까지 놓치지 않도록 하는 작은 희망을 갖게해주지 않을까.
‘행복하길 바란다’는 도로시아의 말에, 제이미는 ‘난 괜찮을거야’라고 대답한다. 도로시아는 그제야 안도의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그녀는 며칠 후 다시 고민을 시작했을 것이다. 영화 중반부 에비가 불임 가능성을 선고받았을 때 도로시아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 힘들겠지만 잠깐만 지나면 괜찮을거야. 하지만 다시 또 고통스러워지겠지…’ 구세대 도로시아가 짬으로 얻게된 통찰이 하나 있다면, 삶에 대한 고민과 질문은 잠시 사라진듯해도 언젠가 다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마지막 장면에서 제이미의 대답을 들은 도로시아의 미소에는 질문을 집요하게 좇은 것에 대한 후회가 아닌, 고민에 대한 작은 해답을 얻은 기쁨과  기대가 담겨있다. 한편 제이미의 혼란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자신의 불안을 깨달은 한 여인 도로시아의 미소와, 정작 제이미보다는 ‘괜찮다’고 말하기 어려웠던 에비와 줄리 두 여인 때문에 영화의 제목은 바로 <20세기 여인들>이 더 어울리는 것인지 모른다. 이 여인들은 곧 혼란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우리 자신의 초상이기 때문이다.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질문, ‘행복해?’ 혹은 ‘잘 하고 있는걸까?’. 그에 대한 답은 언제 찾으며, 답을 찾더라도 그 답이 맞긴 한건지, 또 스스로 찾은 답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수는 있을지, 걱정은 줄줄이 늘어져 결국엔 스스로 꼬여버린다. 우리를 둘러싼 상황은 낡은 자동차 엔진처럼 언제 터져버릴지 모르니까. 언제 불타는 자동차를 목격할지 모르는 것처럼, 삶이란 결코 예상하거나 확신할 수 없으니까.

그래도 섣불리 멈추지 않길 바란다. ‘지금 행복하냐’는, 괴물같은 질문을 애써 피할 필요는 없다. 다만 그저 계속해서 무언가를 좇자. ‘뜻대로 되는 일은 없다’ 혹은 ‘반드시 되고 말거야’ 양자 중 하나를 맹신하지  않고서. 그렇다면 오늘의 당신이 아주 잠시 작년을 회상할 때처럼, 미래의 당신도 오늘을 기억하며 한줌의 미소를 머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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