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TO ZANCHI! · 신촌을 사랑하고, 추억하고, 기록하다
· 로그인
ART 2024 · 10 · 16

혼술의 미학

Editor 찬란

 

 

  과밤이 사라졌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음주의 불모지인 이대 앞에서 느낌 좋게 한잔할 수 있는 곳이 하나 없어졌다는 말이다. 이대 정문 옆 골목에 자리한 낮과밤 앞에 선 채로 은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래 걸은 탓에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아무리 이 근처에 술집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 이런 곳이 사라질 건 또 뭐야. 이곳저곳 다 공실로 남는구먼.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주제에 늙은이처럼 중얼거렸다.

 

  혼자 술 마시거나, 아니면 일주일에 7번 매—일 마시거나. 둘 중 하나만 해당되어도 알코올 중독 위험군이야. 너 그래? 음, 그럼 나는 빼도 박도 못하게 알코올 중독이군. 은현은 담백하게 대답했었다. 물론 현재까지도 유효한 말이다. ‘낮과밤’의 휘발로 인해 다시 은현은 노마드가 되어 이곳, 신촌을 떠돌아다닐지 모른다. 여기에서 포장해서 먹는 피자가 최고였는데.

 

  신촌, 이곳에서는 다들 옆구리에 사람을 단단히 끼고 다녀서, 혼자 외로이 고독을 씹을 수 있는 시간이 잘 없다. 떨어지면 세상이 두 쪽 날 것처럼 붙어 다니기 때문이다.

  종종 파란 고래 앞에서 세상에 오직 둘만 있는 것처럼 서로의 양 볼을 붙잡고 진하게 애정행각을 하는 러브버…아니 연인들을 볼 때마다, 같은 색깔과 모양의 과잠을 입고 우르르 시끄러운 술집으로 몰려가는 앳된 얼굴들을 볼 때마다, 핏대를 세우고 사회구조니 법이니 전공 팀플이 분명한 토론을 관망할 때마다 생각했다. 새내기 시절의 성연을. 

 

  과 오티에서 만난 성연은 신촌에서 나서 학창시절 내내 신촌역을 들락날락거리다가 대학에 와서도 이 동네를 활보하게 되었다고 발랄하게 설명했다. 저 멀리 경기도 북쪽 어떤 시골 동네에서 내려와, 북한군 본 적 있냐는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 미리 시뮬레이션 돌리고 있던 은현은 성연이 퍽 신기했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꽤 세련된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얘는 신촌역과 신촌기차역도 안 헷갈리겠지. 은현은 인과관계가 불명확한 생각을 마구잡이로 뽑아냈다. 아무래도 소주를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았다. 은현의 짧게 친 머리카락이 잘게 흔들렸다. 유난히 새하얀 성연은 이상하리만치 소주에 강했다. (반추해 보면 성연이 소주’만’ 먹는 날에는 취한 걸 본 적 없었다) 성연은 자연스럽게 그 무구한 얼굴로 인스타를 켜 은현의 손에 쥐여주었고 은현은 본인의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하나하나 꾹꾹 눌러 입력했다. 최선을 다해. 소주 때문인지 얼굴이 제법 홧홧했다.

  같은 강의에서 여러 번 마주친 이후, 은현과 성연은 자연스레 밥친구가 되었다. 신촌은 은현에게는 어색했고, 성연에게는 훤히 꿰고 있어 익숙한 곳이었다. 성연은 지도를 찾아보지도 않고 이곳저곳 맛집을 데려가 줬다. 지도 앱을 오른손에 달고 다니던 은현과 사뭇 달랐다. 양손이 자유로운 성연은 은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손쉽게 훑을 수 있었다. 은현은 성연과의 만남에서 항상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했다. 오른손에는 지도를 꼭 쥐고 있었으므로. 얼빠진 스스로를 약간 쑥스럽게 느꼈지만, 동시에 은현은 성연에게 끌려가며 ‘끌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프로젝트 수업에서는 죽어도 조장을 맡아야 하는 본인의 외골수적 성정이 성연 앞에서는 사그라드는 걸 신기해하면서.

 

  새로움이 지나가니 권태로웠다. 상대적이군, 생각했다. 몇 번의 계절을 보내고 다시 같은 계절이 찾아왔을 무렵이었다. 날 때부터 살던 동네가 질린다는 생각은 추호도 한 적 없었다. 한 번도 새로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은현에게 그 동네는 그냥 공기 같은 것이었다. 반면 이곳, 신촌. (이름도 새 마을이다) 새로움과 상반되는 익숙함은 썩 달갑지 않았다. 마치 초콜릿을 먹다가 다시 이유식으로 돌아간 아기처럼. 이런 권태로움과는 별개로, 은현은 어딘가 헛헛함을 느꼈다. 여긴 혼자 지내기는 어려운 동네였다. 이 시끌벅적한 동네에 깊숙이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은 따뜻하고 고소하지만 어딘가 쿰쿰했다. 너무 살을 부비고 있었나. 끈적하게 엉겨 붙은 것 같다. 은현에게 필요한 건 온전히 스스로 권태로움을 이겨낼 힘이었다. 남의 도움을 받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시점이 은현의 인생을 망라한 사전에서 ‘기역’, 그중에서도 ‘권태로움’을 찾았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재될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 아니면 절대로. 나우 오어 네버.*

 

*본디 청춘은 비대한 자아 탓에 착각투성이 실수를 저지른다. 나름 귀여운 맛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은현은 온전히 혼자인 시간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고귀하고 엄숙한 지령을 손에 쥐고서, 철저한 이방인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을. 은현의 위치가 애매했기 때문이다. 성연같이 현지인도 아니면서, 어정쩡하게 신촌에 발을 걸치고 있는 사람. 위치가 애매하면 텅 빈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 마땅히, 1번, 띵한 머리와 2번, 아릿한 알코올이 있어야 한다. 3번은 안주인데, 이건 생각제련공장에 틀림없이 악영향**을 끼치니 일단은 빼고 짚겠다. 덧붙여 예리한 생각을 제련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고난이 필요한 법이다. 그렇다. 은현은 태어날 때부터 알코올 분해효소가 남들보다 월등히 적었다. 스무 살 어떤 오티 날 이후에도 소주만 마시면 얼굴이 홧홧하니 다 술 때문일 성싶었다.

  그럼에도 은현은 마신다 — 백해무익한 술을 왜 마시는 건지, 원. 그렇게 읊조리면서도 스물 언저리를 막 달리고 있는 은현은 아직 음주가 꽤 어른의 일처럼 느껴지더랬다.

 

**맛있는 안주를 먹는 건 마치 욕실 타일 줄눈 메우기와 같다. 울퉁불퉁한 홈들을 플랫하게 만들어줘서 더 이상 우울하게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은현의 줄눈을 메울 게 아니라 돋보기 들고 관찰해야 할 때. 참고로 은현은 1학년 글쓰기 교양 수업에서 ‘안주-욕실 타일 줄눈 메우기 설’에 대한 짧은 글을 썼다. 그 수업은 C+을 맞았다.

 

 

 

  현은 근 몇 개월간 열심히 신촌의 ‘혼술’ 스팟을 찾아다녔다. 성연이 알려준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본인의 입지를 넓혀나갔다. 연 바부터 술식당 소규모까지, 파가니니, 더 빠, 오아시스, 어딘지 기억도 나지 않는 밥집에서 반주를 하기도 했다. 송준옥에 가면 잔술을, 부탄츄에 가면 아사히를 시켰다. 마땅히 2인석 이하 좌석이 마련되지 않은 가게에서는 안주를 포장해 가기도 했다. 일단 고심해서 술을 고르면, 여기에 어울리는 안주가 저절로 생각난다니까. 은현의 입버릇이었다. 은현의 주위 사람들은 모두 은현이 선주후식先酒後食을(분명 은현이 멋대로 만들어 낸 말일 것이다) 선택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모두가 일행과 함께인 가운데 혼자를 즐기는 본인을 새삼스레 자각할 때마다 어딘지 기분이 좋아졌다. 은근히 술에 취한 건지, 아니면 혼자인 본인에 취한 건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은현은 그날도 신촌역 1번 출구 쪽 골목골목을 탐험하다 생소한 가게를 발견했다. 이런 가게가 있었던가, 싶으면서도 죽일 놈의 호기심은 시동을 걸고 박차를 가했다. 어느새 은현의 발은 주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가게 쪽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건조하지만 퍽 차갑지도 않은 주인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방 구석에 있는 건지 어딘가 먹먹한 목소리였다.

 

  본디 혼술의 매력은, 나를 아껴준다는 느낌에서 시작한다. 그래야 지속력이 있다. 물론 대충 먹다 남은 노가리 쪼가리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그냥 먹태를 사올 걸, 후회하며 초록병을 비우는 것도 나름대로 즐거운 일이다. 그렇지만 약간은 아쉽지 않은가, 은현은 생각한다. 조금씩 조금씩 배를 채워주는 따뜻한 안주와 홀짝홀짝 마실 수 있는 술이 있다면 그때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피로가 풀리니 노곤노곤해지고, 안주 한 입, 술 한 모금 하다 보면 어느새 얼굴은 익숙한 홧홧함으로 물든다. 그러면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일을 해보고 싶은 호방함을 장착할 수 있다. 은현은 내향인이다. 그동안 했던 27번의 MBTI 검사가 은현을 두고 내향향 인간이라고 낙인찍어버렸다. 하지만 이때만큼은, 사장님께 자연스럽게 말을 걸 수 있다. 은현이 사장님, 부르니 무뚝뚝해 보이던 입꼬리가 장난스레 올라갔다. 개구진 인상이었구나.

 

그래서 그 사람한테 헤어지자고 했거든요. 그러더니 별말이 없데요? 그렇게 미지근하게 안 보게 되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만났는데요, 근데 사장님, 이거 하이볼 뭘로 만든 거예요? 집에 좀 사놔야겠네.

빨리 말이나 좀 더 해봐요. 중요한 곳에서 끊어, 정말. 

아, 어디까지 말했지? 음, 뭐 그래서 그분은 깨끗하게 가시던데요.

…김빠지네요.

제가 헤어지자고 했어요.

알아요. 방금 말했잖아요.

아니… 못 들었을까 봐요.

 

  무구한 얼굴의 성연은 또래보다 어려 보이는 편이었다. 잘 웃고 사람을 좋아했으며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일에 재능이 있었다. 은현의 손을 잡는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은현은 성연에게 항상 덥석 잡혔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날아갈 것 같았지만 쉬이 티 내지 않는 것이 미덕인 법. 은현은 이상하리만치 아이처럼 들뜨는 걸 피하려고 애를 썼다.

 

  비슷한 맥락으로, 은현은 했던 얘기 또 하고 했던 얘기를 또 하는 술자리의 흔한 철수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은현이 처음 봤던 철수는 스무 살 삼월의 어느 동아리 회식에 있었다. 그 철수는 동아리 내에서 팔불출로 유명했다. 모든 술자리에서 핸드폰을 과장스럽게 올려두고 애인의 얼굴로 꽉 찬 잠금화면을 은근슬쩍 보여줬다. 밤 열 시가 되면 벌떡 일어나 전화하며 헐레벌떡 밖으로 나갔다. 그것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돌아다니는 소문에 따르면 그 철수는 기어이 애인에게 뻥 차였다고 한다.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고. 그때부터 철수는 열 시가 되어도 삐걱대는 술집 의자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 있었다. 짜디짠 눈물과 이별론에 대한 돌림노래를 곁들이면서. 은현은 서른 다섯번째 듣는 그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논리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철수가 침방울을 튀기며 이별론을 설파할 때마다 술자리의 사람들이 점점 줄었다.

  은현이 다음으로 만난 철수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그 철수는 두 학번 위의 학생회장이었다. 원체 말수가 적은 은현이 마음에 들었는지 족보며 밥이며 꽤 챙겨주는 선배였다. 어느 하굣길에 그 능글능글한 위인이 어떤 사람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을 발견했다. 철수는 필사적으로 떠나는 그를 붙잡고 있었다. 매몰차게 뒤돌아선 철수의 애인은 철수에게 몇 마디 더 하고 영영 가버렸다. 몇십 미터 밖에 있었지만, 철수의 눈이 그렁그렁한 게 보였다. 모노드라마 한 편을 본 기분이었다. 쯧쯧. 후배들 앞에서는 여유 넘치더만.

 

  그리고 은현은 오늘 기어이 철수가 되었다. 가만히 있는데도 눈물이 나왔다. 눈물만 나면 참 좋겠는데 꼴사납게 콧물도 질질 흘렸다. 사장님과 웃으며 얘기를 마치고 또 오겠노라 인사도 능글맞게 툭 던지고 왔는데, 괜히 사장님한테 별 쓸데없는 것까지 말했나 후회하기 시작했다. 아오, 씨. 왜 이렇게 우울하지. 분명 괜찮았는데. 

 

  커다랗고 시커먼 사람이 신촌역 증명사진 부스에 기대서 울고 있으니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쳐다봤다. 지랄이다, 정말. 은현은 맞은편 거울 안에 있는 철수에게 말했다. 그래도 철수는 성연이를 놓치진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니까 더 암담해졌다.

 

  야! 이 쪼다 같은 놈아. 너 그거 도망이야. 그냥 뭣도 아니고 피하는 거라고. 어디서 졸라 핑계야, 나쁜 새끼야.

 

  그때 성연이는 처음 듣는 구성진 욕을 한 바가지 해줬더랬다. 그것마저도 다시 듣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아이씨… 공일공… 철수는 숫자 여덟 자리를 마저 눌렀다. 받지 않는 전화를 꼭 쥐고 증명사진 부스에 기대 울고 있는 철수의 모습이 가히 진정한 신촌의 청춘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신촌의 청춘은 너무나도 취약해서 옆구리에 누군가를 끼고 다니지 않으면 무너지기 일쑤다. 그렇지만 우린 그걸 모른다. 이 동네에는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이가 이상하리만치 없다는 사실도 쉽게 눈치채지 못한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그들은 실수에 실수를 거듭하며 겸손을 몸소 학습한다. 가난한 미숙함. 그런 청춘. 파랗다 못해 시퍼렇게 멍든 그런 청춘은 이 바닥에 수두룩하다. 우리는 모두 철수였다. 그러다 청승맞게 초록 병 혼자 기울여도 보고 그런 것이다. 이상하지 않다. 일필휘지로 써 내려가는 구질구질한 청춘의 역사는 나중에 보면 썩 나쁘지 않다. 허영과 겉멋을 싹 뺀 상태라는 전제하에. 

 

  은현은 전화를 받지 않아 소리샘으로 연결한다는 딱딱한 목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냥 그 전에 종료 버튼을 눌러버렸다. 어쩌면, 성연의 부재를 직접 확인하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철수는 천천히 개찰구로 몸을 옮긴다. 발걸음에 힘이 없다. 

 

 

 

p.s.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술은 낭만 있다.

찬란
AUTHOR PROFILE
찬란

잔치의 시선으로 신촌의 장면과 사람, 장소를 기록합니다.

COMMENTS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이야기를 남겨주세요.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