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향꽃
그런 때가 있다. 관심갖지 않았던 것들에 주목하게 되고,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에 감사하게 되는 그런 때. 열린 창문 사이로 선선하게 부는 바람이 고맙고,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정화되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고맙다. 항상 불었던 바람인데, 항상 고개만 들면 보이는 하늘인데. 평범했던 것들이 특별해지는 그런 순간들.
나에게는 가을의 밤이 그렇다. 길었던 하루를 마무리하며 익숙한 사람들과 술 한잔을 기울이는 여느 때와 같은 평범한 하루의 끝도, 그것이 가을의 밤이라면 추억이 된다. 길었던 하루를 그래도 무사히 마무리했다는 것, 술 한잔을 기울일 여유가 있다는 것, 무엇보다 그 술을 함께 기울일 수 있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 이러한 소박한 감사는 추억의 핵심이다.
신촌의 가을 밤을 붉게 물들이는 향꽃
오늘도 가을밤 추억을 하나 더 만들고자 이제는 익숙하지만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익숙하지만 소중한 장소를 찾았다. 입구에만 들어서도 소박함과 정겨움이 물씬 풍기는 이곳, 신촌 향꽃. 지하 특유의 눅눅한 냄새, 오래된 통나무 냄새와 어우러져 은은하게 풍겨오는 부침개 냄새는 긴 계단을 내려가는 나의 마음을 더욱 애타게 만든다.

향긋한~ 전 냄새가~ 계단을 타고 솔~솔~
빠르게 계단을 내려와 가게로 들어서면 그 소박함과 정겨움의 깊이는 더욱 깊어진다. ‘전통 민속주점’이라는 테마와 알맞게 가게의 대부분이 토속적이고 전통적인 소품들로 장식되어 있다. 피로에 지친 사람들의 무게를 오랜 시간 견딘 탓에 머리가 다 벗겨진 것일까. 약간은 미안한 마음으로 반질반질 윤이 나는 나무 의자에 앉아 가게를 둘러보면 조선시대 주막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호출벨 대신 걸려 있는 찌그러진 꽹과리, 오래 앉아 있으면 눈이 침침해지는 희미한 등불, 손가락 집어넣어 숭숭 구멍 뚫고 싶은 창호지까지. 이밖에도 옛날 감성 자극하는 다양한 소품을 구경하고 있으면, 어느새 잡생각은 사라지고 얼른 시원한 동동주 한 잔 딱 들이켜 거나하게 취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다.


벨 누르지 마세요 꽹과리에 양보하세요
언제까지 생각만 할까. 이제는 정말 향꽃의 자랑,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동동주에 취할 시간! 정감 넘치는 주전자에 담겨 나온 동동주를 밥그릇인지 국그릇인지 모를 잔에 가득 담으면, 그 뽀오얀 자태가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 넘치는 정만큼 가득 담긴 잔을 들고 우렁찬 건배와 함께 한 입에 털어 넣고 무심한 듯 손등으로 입을 슥- 닦으면,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애주가인 탓에 동동주도 꽤나 마셔봤는데, 오늘따라 그 맛은 왜 이리 더 달콤한건지. 오늘 하루가 고된 탓일까, 오랜만의 술자리가 반가워서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좋은 사람들과 함께여서일까.

향꽃의 동동주 맛이 더 특별하게 느껴진 이유에는 안주도 있을 것이다. 향꽃의 기본 안주는 콩나물무침, 김치와 라면, 이 세가지가 전부다. 집에 있는 반찬이었다면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음식들이 왜 여기서는 이렇게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지. 하지만 콩나물의 짭쪼름함과 김치의 아삭함, 라면의 꼬들꼬들한 면발이 이루는 동동주와의 케미는 향꽃에 가 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황홀함이다. 평범했던 것들이 특별해지는 또 한 번의 순간.
기본 안주를 넘어 조금만 욕심을 더 내자면 필요한 것은 바로 큼지막한 전이다. 종류가 다양하면 더 좋겠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된다. 노릇노릇 잘 구워진 노르스름한 감자전과 조그마한 간장 종지 하나면 충분하다. 그냥 먹으면 다소 심심한 감자전을 한 조각 찢어 간장에 콕 찍어 먹으면 입 안에 퍼지는 짭짤한 맛. 이어서 바로 동동주 한 잔으로 싹 입가심을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입 속은 다시 동동주의 새콤달콤한 향으로 뒤덮인다. 이게 바로 단짠단짠의 행복일까.

우리는 향꽃의 안주를 책임지는 기본 안주 삼총사!

감자전 간장 샤워하기 2초 전.JPG
예로부터 동동주는 소박한 행복의 상징이었다. 뻘뻘 땀을 흘려 가며 열심히 일한 농부들이 기다리는 것은 꿀맛 같은 쉬는 시간에 먹는 꿀맛 같은 새참. 최선을 다해서 일하고 오랜 시간을 부대끼며 지낸 정든 사람들과 함께하는 그 찰나의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을까, 얼마나 소중했을까. 아마도 그 찰나의 시간이 다시 고단한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 농부들의 원동력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최근 들어 나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아침 일찍부터 늦은 오후까지 이어지는 수업에, 해도해도 끝이 없는 무수한 과제, 모든 대학생의 숙명인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한 알바에 이리저리 치이다 보면 속절없이 하루가 훌쩍 가 버린다. 그럼에도 그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또 감사한 이유는, 내 사람들과 함께 하는 기분 좋은 술자리가 나를 기다리고, 적당히 취해 알딸딸한 기분으로 쐬는 시원한 밤바람이 나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나와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 곁에 있기만 해도 든든한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들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가을밤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것. 오늘도 내 하루의 끝은 어느새 소박하지만 그렇기에 더 소중한 감사로 물든다. 고된 하루에 지친 당신, 지금 당장 소중한 사람과 함께 정이 넘치는 향꽃에서 시원한 동동주 한 잔을 들이키며 일상을 마무리하는 것은 어떨까?

오늘도 수고한 나를 위해, 건배!

향꽃
주소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7안길 39
영업시간 : 매일 17:00 – 05:00 연중무휴
연락처 : 02-325-4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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