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에서 채식하기
‘먹는 행위’는 생리적 욕구로만 설명될 수 없다. 허기를 느끼고 음식을 먹는 것은 우리의 본능에 가까운 일상으로 여겨지지만, 사실 먹는 행위는 꽤나 문화적이고, 정치적이기까지 한 영역이다. 이는 채식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오히려 채식은 더욱 짙은 빛으로 그러한 색을 띤다고 할 수 있다. 각자의 삶에 따라 같은 경험도 다르게 적히듯이, 채식 역시 제각기 다른 경험과 글자, 그리고 움직임이 되어 제 삶 속에 스며든다. 올해가 한 달 남짓 남은 오늘, 마치 ‘정글에서 살아남기’와 같은 비장함이 담겨있는 ‘신촌에서 채식하기’라는 이 글을 통해 나의 채식 이야기를 꺼내어보려 한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우선 어디든 들어가기로 하자.
에디터가 당신을 데리고 갈 첫 번째 채식식당은 명물거리 근처에 위치한 ‘뉴욕 비앤씨’다.
Veganism? Carnism?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채식을 결심했는지 명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올 초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에 다이어트를 시작하면서 내 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내가 먹는 것들에도 의식적으로 신경 쓰게 되었다. 음식을 직접 요리해먹기 시작하면서 야채를 즐겨먹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굳이 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다. 하루하루 조금씩, 그렇게 별 다른 노력 없이 새로운 식습관이 생겼고, 그러던 중 veganism과 carnism이라는 두 단어를 마주치게 되었다.

Veganism은 채식 중에서도 동물성 식품을 일체 먹지 않는 완전한 채식을 뜻하는 용어이며, Carnism은 습관적 육식, 육식과잉이라는 현상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고기신화가 만연한 한국사회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
어느 순간 고기를 찾지 않게 된 건 나에게도 고기가 제일 맛있는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불현듯 ‘너무 맛있는’ 고기반찬에 대한 위화감과 낯섦이 느껴졌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동안의 무의식적인 부채감이 원인이겠거니 싶지만, 당시엔 딱 그 정도의 느낌뿐이었다. 굳이 내 감정을 설명할 문장을 찾으려 노력하지도, 스스로를 채식주의자라 호명하지도 않았다. 나는 어떠한 대의도 없는, 그저 고기를 덜 먹으려고 하는 사람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그 무엇도 나서서 규정하지 않은 덕분에 채식에 대한 진입장벽이나 강박을 가지지 않을 수 있었고, 그것은 어느새 채식주의자가 된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

베지테리언 토핑과 두부스테이크가 올라간 퀸즈팩
그렇게 나는 불완전하게나마 채식을 하게 되었다. 초반엔 지인들에게도 말하지 못해 약속이 있을 땐 어쩔 수 없이 고기를 먹는 경우가 잦았다. 말은 하고 싶지만 사실 그렇게 엄격한 식단관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애써 배려를 바라는 마음까진 아니었기에 최대한 다이어트를 핑계로 피하되 불가피한 경우에만 고기를 먹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여전히 뭐라 정의내릴 수 없는 엉성한 채식이었다. 그러던 중 채식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육류도 먹는 사람을 가리키는 ‘플렉시테리언(flexitarian)’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고, 그렇게 난 스스로를 플렉시테리언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채식을 할 경우엔 생선류, 난류, 유제품까지 먹는 페스코 식단을 지켰다. 채식과 비채식의 중간, 그 어디쯤에 위치한 플렉시테리언이라는 불완전한 경계는 여전히 나에게 큰 부담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의 소울푸드인 떡볶이. 널리 사랑받는 만큼 세상엔 많은 종류의 떡볶이가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채식떡볶이를 먹을 수 있는 이대역 근처의 ‘덕미가 전골떡볶이’에 함께 가보자.
그렇게 채식을 실천하고 채식에 더욱 관심을 가지다보니 채식주의와 여성주의를 한데 묶은 담론을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 뭇 페미니스트들이 채식을 한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처음엔 유사한 예민함의 결을 지닌 문제라 그런 것인가 짐작만 하고 넘겼지만 얼마 안 있어 <육식의 성정치>라는 책을 통해 정면으로 그러한 담론을 마주하게 되었다. 해당 책에선 가부장제 내 여성과 동물이 지배, 혹은 소비되는 메커니즘의 유사성을 짚고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육식과 연결 지어 분석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우리사회가 오랫동안 여성을 향해 ‘먹는다,’라는 표현을 사용해왔음을, 여성을 마치 고깃덩이와 같은 욕망의 대상으로 여겨왔음을 알고 있다. 비(非)남성으로서, 사회의 주변부로서 이들의 존재성은 분명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채수로 만든 버섯야채떡볶이
비건으로 먹으려면 치즈, 계란, 어묵, 라면사리를 빼달라고 따로 요청하면 된다.
책을 읽던 무렵 우유가 생산되는 방식도 알게 되었다. 암소를 인공수정으로 임신시켜 젖을 짜내고, 다시 임신을 시키는 과정이 되풀이된다고 한다. 당시엔 매우 충격이었지만 생각해보니 당연한 거였다. 인간 여성의 몸도 임신을 할 때만 모유가 나오는 것을, 나는 왜 젖소는 항상 우유를 만들어낸다고 여겨왔을까. 무지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 후로 우유를 사먹지 않게 되었다. 같은 여성체로서 먹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치즈 등 가공 유제품을 아직까지 먹긴 하지만 우유 자체는 피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물권에 대해서도 점차 알아가며 하루에 한 끼는 비건식으로 먹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나는 현재 채식 중에서도 ‘우유를 먹지 않는 페스코이자 플렉시테리언이며, 하루 한 끼는 비건식을 지향하는 채식’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채식인 한 명의 기나긴 소개만 들어도 세상에는 얼마나 다양한 채식이 존재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게 채식은 ‘저항적 실천’이다.
그것이 주류문화에 대한 작은 대항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맥락에서 나의 채식은 먹는 정치가 된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곳은 우유, 버터, 계란을 사용하지 않는 비건 베이커리 ‘더브레드블루’다.
다이어터, 채식주의자이기 전에 진성 빵순이인 에디터와 일명 파란 빵집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채식사실을 밝히면 종종 듣는 오지랖 넓은 조언과 질문들-고기를 먹어야 힘이 나는 거다, 그 맛있는 걸 어떻게 참느냐, 편식해선 안 된다 등–이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순수한 무지 혹은 걱정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그래도 무례한 건 여전히 무례한 거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만의 근거를 가지고 채식을 비판하거나 채식 중에서도 더 ‘몸에 좋은’ 채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 역시 초기엔 그러한 정보를 찾아보며 무엇이 맞는 얘기인지, 계속 이렇게 먹으며 살아도 괜찮을지 갈팡질팡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저마다의 정상과학에 별로 동요되지 않는다. 그저 내 몸이 느끼는 대로, 나만의 균형을 찾아가며 적당히 살려고 한다. 다만 채식은 무조건 건강해지거나 살이 빠지는 식이습관이 아니다. 다른 식습관과 마찬가지로 개인이 하기 나름인 일이라 자칫 영양불균형을 초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채식인의 건강은 비채식인의 알 바가 아니니 이제 그만 각자 할 일이나 하도록 하자.

붉은 흥국쌀이 들어간 치아바타와 따뜻한 아메리카노
스스로를 돌보며 내가 원하는 음식을 먹을 때의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스스로에게만 의미 있는 일은 자기만족 같아서 싫으니?”
위 문장은 에디터의 인생 웹툰 <연민의 굴레>에 등장하는 대사이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부정적인 맥락에서 쓰인 ‘자기만족’을 나 역시 좋지 않게 여겼던 기억이 난다. 대학생이 되어 여러 번 웹툰을 다시 정주행했을 때도 여전히 이 문장은 내게 자기만족일 뿐인 행동을 은근히 경멸하는 듯한 문장이었다. 아마도 그건 내 생각이 그랬기 때문일 거다. 나는 항상 나에게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타인이 되었든 사회가 되었든, 무언가에 기여해서 변화를 만들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살기 위해 아등바등 애쓰면 애쓸수록 내 영향력의 미미함을 자주 목격하게 되었고, 그럴 때마다 끝없이 무기력해지기도 했다. 어쩌면 다이어트와 채식을 시작하게 된 건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한동안 내 몸에 귀를 기울이면서 온갖 종류의 나를 괴롭히는 생각을 멈추었다. 생각을 멈추니 글과 말, 그 밖의 다른 것들도 멈춰졌다. 그저 요리를 하며, 요가와 운동을 하며 생각을 비우고 또 비웠다. 그렇게 한 차례의 사계절이 지나가는 지금, 이제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스스로에게만 의미 있는 자기만족이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내가 변한다는 것은 나를 둘러싼 세상이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나는 다만 나로서 내 삶을 살아가면 된다. 채식을 하고 나의 온 세상은 변화하였다. 그러니 나부터 잘하자. 내가 잘하면 되는 일이다.

내가 변하니 신촌도 변하더라.
신촌에도 채식옵션을 표기한 가게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비단 신촌만이 아니라 한국사회에서 채식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너무도 많은 음식들에 고기가 들어가 있으며, 채식을 향한 사회적 시선도 아직까진 그리 달갑지 않다. 하지만 별 수 있는가, 그렇다고 채식을 포기할 순 없으니. 귀찮더라도 일일이 재료를 살펴보고, 특정 재료의 가감을 요청하고, 스스로 채식소비를 늘리며 ‘채식할 자유’를 더욱 확장시켜 나가는 수밖에 없다. 말이 거창해서 채식할 자유이지, 사실 이건 어느 식당엘 가든 채식 메뉴 하나쯤은 먹을 수 있는 사회를 바라는 소박한 요구이기도 하다. 비거니즘을 다룬 한 다큐에서 ‘채식인에겐 한 끼 한 끼가 운동’이라는 말을 본 적이 있다. 앞으로도 변해갈 내 세상을 위해, 나는 오늘도 나의 하루를 충실히 살아가고 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어준 감사한 당신은 오늘 어떤 하루를 살고 있을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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