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 거리, 물들다. <피아노 치는 이정환>
‘모든 음악에는 색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즘이었을까, 내가 절대음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뒤를 돌고 있어도, 악보를 보지 않아도 음을 들으면 무슨 음인지 알 수 있는 게 흔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름 설렜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내가 좁은 우물 안에서 ‘나는 최고야!’를 외치고 있을 때 우물 밖 사람들은 더욱 뛰어나다는 걸 알게 되면서 절대음감이라는 것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 흥밋거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누구나 한 번 쯤은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을까. 자다가 생각난 수학 공식이 세기의 발견이 된다든가, 그림 한 번 그렸을 뿐인데 새로운 화풍을 창조해낸다든가, 알고보니 나는 재벌가의 숨겨진 딸이라든지 하다못해 꿈에서 본 번호가 로또 1등 번호가 된다는 그런 특별한 일들이 나에게 일어날 것이라는.
나도 내가 그런 사람일 거라는 생각을 아주 잠시 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절대음감이라는 게 엄청 특별하고 특이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더 대단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바람 빠진 풍선이 된 것만 같았다.
그럴 때 찾아낸 허탈감으로부터의 탈출구는, 나만이 할 수 있는 표현 방식을 만드는 것이었다. F장조는 푸른색, C장조는 노란색, 플랫이 붙을수록 옅어지는 조의 색깔…. 음악이 들리면 색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나의 세계는 더욱 풍성해져갔다. 그래서 음악 듣는 걸 정말 좋아했다. 모든 악기마다, 심지어 사람의 목소리마다, 표현되는 색깔과 농도와 그림은 너무 다양해서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기 때문이다.
내 머리속엔 공간이 하나 있어서, 노래를 들을 때면 노래의 색으로 물들곤 한다.
특히 예전부터 좋아했고,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악기는 피아노다. 맑고, 아름다우며, 단단한 소리를 낼 수 있는 수학적이면서도 예술적인 악기. 그래서 신촌역 3번출구는 길을 기억 못하는 나에게도 깊이 각인되었나보다. 3번출구의 계단을 오를 때부터 들리는 피아노 소리는 연주하는 사람마다, 연주되는 음악마다 신촌 거리의 색을 다르게 덧칠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3번출구의 피아노는 어느 누군가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매일매일 연주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신촌의 토요일 저녁, 신촌을 매주 다른 색으로 물들게 하는 마법같은 두 시간을 선사하는 사람이 있다.
신촌역 3번출구, 3월부터 11월, 매주 토요일 오후 6시.
그의 유튜브 채널 이름이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피아노 치는 이정환입니다.
사실 잘 치기보단 잘 뿌숩니다.”
.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사람들이 이미 많이 몰려 있었다.
6시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도착했을 때 3번출구의 계단에서부터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늦은 나에게 빨리 달려와 연주를 들으라고 발에 힘을 실어주는 것만 같았다.
버스킹은 좋아하지만, 싫어하기도 한다.
사실 버스킹을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한다. 거리를 아름다운 음악으로 채우는 건 정말 좋지만, 절대음감으로 태어난 이상 귀가 예민해서 음정이 맞지 않으면 정말 괴롭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람의 버스킹은 정말 신기했다. 음이 틀려도 거슬리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인지라 피아노를 치다보면 손이 미끄러져 음을 틀릴 때도 있는데, 틀린 부분도 연주의 일부분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몰입하게 되었다. 이 사람은 이 곡을 어떤 느낌으로 칠지, 한 음을 치면 그 다음 음이 어떻게 될 지 궁금해져서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글을 쓰는 지금도 느낌을 되살리려 동영상을 틀었다가 두 개나 멍하니 봐 버렸다.)
피아노를 ‘치고’ 있다.
또, 그는 ‘피아노치는’ 이정환이기도 하지만, 피아노 ‘치는’ 이정환이기도 했다. 두 시간 내내 피아노만 치면 아무리 좋은 곡이라도 지루하기 마련인데, 피아노를 ‘치면서’ 변주를 줬다. 피아노의 건반은 선율을 연주하고, 몸체는 타악기처럼 이용하는 것이다. 몸체 뿐 아니라 팔꿈치로, 머리로 피아노를 치면서 다양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유투브에 그가 자작곡 ‘Witch house’를 연주하는 영상이 있다. 자작곡으로만 피아노를 ‘치는’줄 알았는데, 위 사진의 곡은 John Smith의 ‘All of me’라는 다른 사람의 곡인데도 피아노를 치면서 박자를 넣는다는 것이 신선했다.
인형탈 치는 이정환
그렇기에 공연도 지루하지 않았다. 이날 갑자기 인형탈 아르바이트가 다가와 음악을 감상하면서 춤을 췄는데, 인형탈도 마치 예정된 버스킹의 일부처럼 만들어버렸다. 연주하면서 인형탈이 춤 추는 모습을 보고 웃기도 하고, 피아노 앞으로 인형탈이 다가오자 피아노 대신에 인형탈의 머리를 툭 치기도 하는 여유도 있었다.
문득, 한 시간 넘게 연주를 보고 있었던 나를 발견했다. 연주에 따라 신촌은 환희에 찬 분홍색으로, 벌꿀같은 황금빛 노란색으로, 햇빛 한 줄기가 닿은 깊은 바다의 푸른색으로 물들면서 머리 속의 팔레트를 채워나갔다.
나는 음악으로 가득 찬 마음을 품고 신촌을 걸었다.
신촌역 3번출구 앞, 매주 토요일 저녁 6시에 시작되는 그의 연주는 3월부터 11월까지만 한다고 한다. 18년 12월 1일을 끝으로 올해의 연주는 끝났지만, 내년에는 신촌의 거리가 어떻게 물들지 기대된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이야기를 남겨주세요.
‘모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