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엄마와 함께한 신촌
나는 후천적 신초너이다. 신초너들의 대다수가 아마 후천적 신초너일 것이다.
(후천적 신초너: 태어날 때부터 신초너가 아닌, 어떠한 이유(주로 대학 입학)로 인해 후천적으로 신촌에 살고 있는 사람)
후천적 신초너에게는 보편적으로 가진 결핍이 있다. 바로 집, 그리고 가족에 대한 결핍이다. 이 결핍은 아마 생긴 이후로 절대 완전히 충족되지 않을 결핍이다. 왜냐하면 후천적 신초너들은 지방에서 상경한 경우가 많기에 졸업 후에도 서울에서 머물며 본가로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천적 신초너가 된다는 것은 기약없는 가족과의 분리의 시작이기도 하다.
서울과 가까운 지방에 본가가 있다면 주말을 이용해 가족과의 짧은 만남으로 결핍에서 비롯된 슬픔들을 해소할 수 있다. 하지만 주말 알바가 있다면? 혹은 본가가 편도로 반나절이 걸리는 먼 지방에 있다면? 가족과의 만남이 어려울 수 있다.
에디터는 이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되는 비련한 후천적 신초너이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였는가. 2019년 5월 6일, 어린이날 대체공휴일로 인해 본가에 갈 기적적인 기회가 생겼다. 에디터는 얼른 표를 끊었다. 5월 5일 오후 5시에 서울에서 출발하여 오후 10시에 본가에 도착하고, 5월 6일 오후 11시에 본가에서 출발하여 5월 7일 새벽 5시에 서울에 도착하는 기차표. 본가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단 25시간이지만 집에 갈 생각에 우울감과 피로감이 모두 날아간 상태였다.
하지만, 인간사는 새옹지마(인생의 길흉화복은 변화가 많아서 예측하기 어렵다.)라 하였는가.
전공 교수님께서 “너희들은 어린이가 아니니, 어린이날 대체공휴일에는 정상수업을 하겠다.”라는 충격 발언을 하셨고 에디터는 눈물을 머금고 표를 취소하였다.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날을 선언할 적에 수명의 3분의 1 이하의 나이를 가진 자는 어린이라 규정하였다 하는데, 요즘 같은 100세 시대에서 20대 초반인 에디터를 어린이로 봐주지 않는 교수님이 얄미울 따름이었다.
이를 가족에게 토로하였더니, 에디터의 모친께서 친히 딸을 위로하러 서울로 올라오시기로 하였다. 비록 신초너가 된 지 1년 남짓이지만, 딸이 신촌에서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엄마에게 완벽한 신촌을 소개해줘야 하는 의무가 생겼다. 에디터는 오후 5시에 신촌에서 알바를 끝내고 엄마를 맞이하였기에 저녁식사부터 후식, 숙박, 그 다음날 브런치까지의 가게 선정과 안내를 맡았다. 1년 동안 모으고 모은 수많은 맛집 DB와 카페 DB들을 대방출하여 가게들을 셀렉 하였고 엄마의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았다. 이러한 좋은 place들을 홀로 알고 있기에는 아쉬우니, 공익을 위해 잔치의 구독자들에게도 공개하려 한다.
- 고래 파스타
저녁 식사를 위한 식당을 선정하기 전, 에디터는 엄마에게 어떤 식당에 가고 싶냐 물었다. 엄마는 두 가지 기준을 제시하였다.
- 니 먹고 싶었는데 비싸서 못간 집
- 나 이런 음식 먹고살아. 걱정 마. 요런 집.
매우 어려운 기준이었다. 하지만 이내 두 가지를 충족하는 집을 어렵사리 떠올렸다. 에디터가 예전부터 눈여겨보았으나 친구와 가기엔 가격이 조금 부담스럽고, 분위기나 음식의 맛이 좋다고 평가받은 집. 바로 고래 파스타이다.
무한 리필 고깃집과 곱창 집들이 즐비한 골목 사이에 홀로 흰색 간판을 뽐내이는 고래 파스타, 2층에 위치하고 있어 찾기는 어려웠으나 들어가 보니 이래서 인기가 많구나 싶었다. 크지 않지만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진 공간, 전체적으로 파스텔 톤을 띠었고 그곳에 있는 나무 가구들이 더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하얀색 대리석 탁자는 뜬금없다고 느껴질 수 있으나 다양한 색감의 요리가 담긴 흰색 접시들이 나오기 시작하니 그림 같은 요리들을 받쳐 주는 도화지처럼 느껴졌다.
이 날은 엄마와 함께 간만큼 먹고 싶었던 것을 다 시켰다. 오렌지 샐러드, 트러플 버섯 크림 파스타, 이베리코 등심 스테이크, 크림브륄레까지-
(엄마를 위한 식당 선정이 아니라, 나를 위한 식당 선정인 것 같은 느낌이 자꾸만 들지만 내가 행복하면 엄마도 행복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애피타이저로 나온 오렌지 샐러드는 상큼하고 가벼워 좋았고, 트러플 버섯 크림 파스타는 버섯 향이 솔솔 나면서도 너티하고 고소하여 좋았고, 이베리코 등심 스테이크는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여 식감이 풍성해서 좋았고, 크림 브륄레는 다 아는 맛이지만 다 맛있는 맛이 조화롭게 어울려 좋았다.
결론은 애피타이저부터 메인메뉴, 디저트까지 완벽했다.
- 카페 페라
식당에서 디저트까지 먹긴 하였으나 카페를 사랑하는 엄마와 나는 카페가 필수 코스이기에 두 번째 장소로 발을 옮겼다.
엄마와 함께하는 카페의 선정 기준은 맛, 그리고 인테리어이다.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와 엄마의 인테리어의 선호 방향성이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 20대 동년배들은 분위기(a.k.a 인스타 감성)를 중요시 여기지만 엄마 아빠 동년배들은 깔끔함을 중요시 여기는 듯하였다. 작년에 엄마가 서울을 방문하였을 때 신촌의 파이홀을 같이 갔는데, 나무 상자들을 엎어 의자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매우 의아해하셨다. 파이의 맛에는 만족을 하셨으나 계속 가구들을 유심히 보셨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 아빠에게 “요즘 아(이)들은 이상해.. 가구도 아닌 나무 판때기들을 엎어서 의자로 써..”라고 전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저번 일을 만회하기 위해서 인스타 감성보다는 깔끔함을 추구하는 전통 있는 카페를 선정하였다.
바로 이대 앞의 “카페 페라”이다.
맛은 물론이고 엄마의 기준에서 인테리어도 좋으며 무엇보다 뷰가 최고다. 2,3,4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카페 페라의 정문은 매우 좁으나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넓어진다.
4층은 통유리 문이 있어 이화여자대학교가 한눈에 들어오기에 뷰가 아주 좋다. 카페 페라는 딸기 타르트가 가장 유명하기에 먼저 딸기 타르트를 시키고 그와 함께할 아메리카노, 바닐라 라떼를 시켜서 뷰를 감상하며 엄마와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원래 엄마와 함께 카페를 자주 가곤 하는데, 맛있는 것을 함께 먹는 것도 좋지만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어 더욱 좋다. 중2병보다 무섭다는 대2병을 앓고 있는 에디터는 요즘 눈물이 많아져서 이 날 엄마와 대화하며 많이 울었다. 집을 떠나 넓은 세상을 마주하고 나의 존재가 하찮다고 느껴져 잔뜩 위축되어 있었는데 내가 누구보다 멋있다고 생각하는 우리 엄마가 나보고 대단하다고 말해주니 내가 짱인게 맞는 것 같더라. 나의 근본인 엄마 아빠가 이렇게 멋있는 사람인데 내가 못날 수는 없는 것이다.
- icos 게스트하우스
눈물의 대화를 마치고 이제 휴식을 취하러 숙소로 갔다. 신촌의 호텔은 너무나도 유흥업소들 사이에 위치해 있어서 대신 이대역 쪽의 안락한 분위기인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해놨었다.
옛날 주택을 리모델링한 게스트하우스였다. 마당에 라일락 향이 가득했던 곳.
엄마에게 온갖 꽃들의 이름을 물어보고 향기를 맡으며 정원을 즐겼다.
하지만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온 집안이 삐걱거려 새벽에 드나드는 사람들 때문에 엄마는 잠을 설쳤다고 한다.
오랜만에 엄마와 잔 딸은 그것도 모르고 쿨쿨 잤다. 자다가 내가 이불을 차길래 더운가 싶어서 전기장판을 꺼줬다가, 새벽이 되니 찬 기운이 돌아 전기장판을 다시 켜줬다가… 엄마만 바쁜 밤이었다. 어쩌면 돌봐주어야 하는 딸이 없어야 엄마가 더 푹 잘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할 일이 많다고 찡찡대다가 30분 후에 깨워달라는 말을 남기고 그대로 자버린 나의 얼굴을 닦아주고 스킨과 로션을 발라주고, 다음날 아침에는 씻고 나온 나의 머리도 말려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엄마 앞에서 어린이가 맞는데 (거의 신생아에 가까울 정도이다.) 이쯤에서 다시 한번 전공 교수님의 선택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 고르드
브런치 장소는 무난하게 베이커리 카페로 선정하였다. 꽤 유명하고, 자리가 넓고, 종류가 다양한 베이커리 카페, 고르드. 8시라는 이른 시간에 오픈을 하기에 작년에 엄마가 신촌에 들렸을 때에도 아침을 먹기 위해 왔던 곳이다. 그때에는 비주류 메뉴를 먹어서 만족스러운 평가를 얻지 못했으나 이번에는 안정적이게 고르드의 대표 메뉴인 앙버터와 마늘 바게트, 그리고 시식메뉴를 먹어보고 엄마가 맛있다고 한 크림치즈 팥 빵을 골랐다.
아메리카노와 바닐라라떼도 함께 시켰다. (나는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커피, 엄마는 뜨죽따*뜨거워 죽어도 따뜻한 커피) 엄마의 믹스커피에 사브레를 찍어 먹는 것으로 시작한 커피 인생이지만 엄마는 쓰다고 못 마시는 아메리카노를 내가 마시는 것을 보니 나도 좀 컸나? 싶기도 했다.
앙버터와 마늘 바게트 모두 기공이 커서 먹는 소리가 매우 맛있게 들렸고, 맛 또한 평균 이상이었다. 음료도 무난했고, 결함이 없어 만족스러웠던 장소이다.
함께 빵을 나누어 먹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가 알바 시간이 다 되어 먼저 일어섰다. 엄마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가는 길 문득 슬퍼졌다. 또 언제 엄마를 볼 수 있으려나 싶었다. 작년, 그러니까 대학교 1학년 때는 집에 있다가 다시 신촌으로 갈 때에도 별로 슬프지가 않았었다.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는 곳이고 집에 가면 모든 것이 그대로이니까. 하지만 이제는 엄마 아빠가 내 짐을 점점 치우기 시작했고 이사를 생각 중이시고 아마 이사를 하면 내 방은 없겠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완전히 우리 집에서 떠난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내 미래를 생각해보았을 때에도 다시 엄마 아빠와 사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 같아서 좀 슬프다. 그걸 이제야 느낀다.
어렸을 적 엄마가 퇴근하면 엄마가 다시 떠나버릴까 봐 오빠와 나는 설거지하는 엄마 밑에 온 장난감을 다 끌어와 다리 옆에 꼭 붙어서 놀았다고 한다. 지금은 그럴 수 없지만 마음만은 그때와 그대로인가 보다. 사실은 나는 이제 어린이가 아닌 것이 맞지만 엄마 아빠와 같이 있고 싶고 어리광 피우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멀리 있어 더 애틋한 감정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집에 오래 머물면 또 짜증이나 내겠지 싶지만 항상 그리운 것이 엄마 아빠인 것 같다.
하지만 먼 곳으로 대학을 온 데다가 주말엔 알바한다고 못 내려가는 불효녀를 어찌할 수 있으랴, 유일한 그리움 해결 방안은 엄마 아빠가 신촌으로 놀러 오는 것뿐이다. 올 때마다 더 발전된 코스를 안내해줄 터이니 자주 놀러 오시길.
엄마와 함께한 신촌은 평소보다 더 따뜻했다.
[ 고래파스타 ]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7안길 10-3 [ 카페페라 ]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52-45 [ icos 게스트하우스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2다길 63 [ 고르드 ]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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