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에게
신촌은 모든 것을 지켜보았지. 이곳에는 너와 내가 나눈 시덥잖은 농담, 함께 흘린 웃음, 그리고 미처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진심 따위가 켜켜이 쌓여있다. 후- 하고 불면 날아갈 것 같았던 기억의 파편들이 이제는 이곳에도 저곳에도 있으니 S, 나는 너를 묻으며 살아가지는 못하려나.
S에게.
단 한 줄의 문장이라도 네 심장에 닿길 바라 이 글을 쓰지만 홀로 곱씹은 시간이 네게 모두 전해질 것 같지는 않다. 꼭 늦봄에 난 것 같은 너는 웬걸 눈 밟는 소리와 죽은 입김, 메마른 입술과 건조한 하늘, 그리고 영원히 잠든 밤과 함께 내게 온다. 참 이상한 일이지, 나는 멈춰있는데 시간은 자꾸만 흐른다. 우리가 울지 않았던 날들에도 손톱은 자라고 별들은 죽었을 터다.
시간은 이미 다 존재한다고 한다. 우리가 공간의 XYZ축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는 것처럼, 3차원이 이미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는 무한한 영화의 한 장면들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고. 모든 순간은 이미 존재하고 정해졌다고, 공간처럼. 내 삶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일 터, 어쩐지 서글퍼졌다. 시간은 겹겹이 쌓인 종이처럼 멈춘 한순간들이 모여서 모두 존재하는 책 같은 것이니 사실 시간은 흐르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언젠가 네게 그런 말을 했었다. 죽지 못해서 살아있었고 숨이 잠겨 가라앉는 날들을 지나왔지만 분명 그 중엔 아름다운 날들도 있었다고. 그런데 내가 네게 전해주었니, 그 날들은 네가 있어 빛나던 날이었다고, 기억을 거닐면 항상 그곳엔 네가 있어서 웃음이 났다고, 꼭 달래꽃 내음이 노랗게 서린 것 같았다고, 그렇게 말해주었니.
나는 곧 죽고 싶다가 다시 잔뜩 집어 먹히고, 꽤나 낭만스럽게 내 손에 죽어달라고 할까, 밤의 척추는 퍽 푸르러서 허공에 바스러지고 온전한 것은 하나도 없어 곧 흐려졌다가 다시 흩어졌다 날카로웠다 사라졌다가… 멍청한 것이 오래된 제 숙명이요, 나는 네가 비틀대며 젖은 몸을 이끄는 것을 본다. 달빛은 반질거리는 눈동자만 진탕 문지르고 밤안개가 되고 싶다던 널 도통 이해할 수가 없어
잠들 수 없는 밤과 깨어날 수 없는 아침을 반복한다. 자꾸만 감기는 눈은 창밖의 별을 좇고 또 생각한다. 왜 그랬어야 했는지 왜 그랬는지 그러지 않을 수는 없었는지, 원망과 후회와 불신이 가득한 밤. 언젠가 눈이 반짝이던 때 참 이상한 생각을 했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생각, 영원한 관계 또한 존재치 않고 어쩐지 나는 모든 걸 붙잡고 주저앉는 것 같다는 생각.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아름다운 게 아닐까, 유한하기에 불확실하기에 불안정하기에 더욱 고귀한 게 아닐까, 그렇기에 내가 너를 사랑한다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내 모든 생각의 끝은 항상 너였다. 대체로 말도 안 되는 잡소리를 너는 중요한 것 마냥 들어주었지. 그러나 개중에 진심이 아닌 말은 없었다. 미친 소리라고 해도 좋은 말들을 너는 퍽 소중히 대했다. 참 이상하다 너는 왜 항상 나를 기다려야만 했을까. 너는 왜 담담히 내 이야기를 들어줬을까. 나는 그러지 못했는데 너는 왜 항상 그래야만 했을까. 네게 너무 벅차진 않았을지 모를 일이야. 네게 밀어준 것이 빛조각이었는지 날붙이었는지는 모를 일이지. 그럼에도 흔들리는 손을 잡은 것은 너이고 나는 이미 죽은 별들을 보며 속삭인다, 네가 행복했으면 한다고.
오늘따라 별이 희미하다, 밤도 까무룩 잠들어 죽은 밤 너는 무엇이 서러워 그리도 울까. 네 가슴을 열면 무엇이 가득할까, 물의 뼈가 잔뜩 들어있을까 바랜 봄의 조각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닐까. 꼭 별 부스러기들이 가득할 것 같아. 그러나 나는 여태 그랬듯 그중 무엇도 알지 못하고 오래전 죽은 별들의 노래만 하릴없이 부른다. S, 빈번히 잠드는 몸뚱이를 이끌고 사는 것이 얼마나 버거운 일인지를 너도 알겠지. 상처투성이인 채로도 우리는 또 걸을 것이다. 잘려나간 목소리로 말을 하겠지, 전부 괜찮다고, 모두 괜찮아질 거라고. 하지만 나는 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럼에도 묵묵히 걸을 수밖에, 속아 넘은 채 다시 쓰러지기 전까지 투명한 입김만 뱉으며 걸을 수밖에.
내가 나보다 먼저 죽어 나뒹구는 손톱과 같은 신세가 되지 않은 것은 네 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언젠가 이 긴긴밤이 지나갈 것을 안다, 모든 순간이 얇게 쌓여 빛이 나겠지, 그러니 S, 늦봄이 오기까지 비틀대며 내 곁에서 걸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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