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 스물 셋의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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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여기서 일 년 전 이때쯤에
우린 세계 일주에 대해 말했고
캣파워를 듣고 있었지
지금은 그때도 우리도 남지 않고
거리를 지나는 수많은 발자국만이
세차게 울리고 있어
–
김사월, 세상에게
최근 난 울음이 부쩍 많아졌다. 예상하지도 못한 순간에, 가령 길에서 혹은 도서관에서 터지는 울음은 날 자주 당황스레 만든다. 다행히 내 울음은 눈물보단 울먹임이 많아 참기 쉽다. 재빠르게 입술을 깨물고 숨을 강하게 압박한다. 꾹꾹. 아직 울음이 덜 차, 넋을 놓고 울기엔 난 겁이 너무 많다.
다만 이 노래를 듣고는 2분 가까이 훌쩍거렸던 것 같다. 어쩔 수 있겠는가. 부르던 가수도 노래를 멈추고 우는데. 사람의 기억은 언제나 울컥 쏟아져 각자를 적신다.
“김사월 좋아하니”
언젠가 목요일, 신촌에 있던 내게 옛 친구 혁이 연락을 했다. 내 인스타에 올린 콘서트 티켓 사진을 봤는지, 몇 년 만에 인사치고는 너무 가벼워 웃음이 나왔다. 잘 지내냐고, 신촌이라면 밥 한 끼 먹자고. 급하게 약속을 잡은 우리는 다모토리 근처를 10분 정도를 헤매다 겨우 작은 마라탕 집에 갔고, 각자 맥주 한 병씩을 마시고 나왔다. 가을밤은 날이 좋았고 들떠있는 사람이 많았기에 경의선 숲길에 다다른 우리는 조금 산책하기로 했다. 숲길 바닥엔 작은 조약돌이 있고 나무가 있고 예쁜 가로등이 있어 걷기 좋았다.
혁은 3년 전 스무 살 그때 그대로였다. 동그란 금테 안경과 악성 곱슬머리, 품이 넓은 청바지, 아버지 옷장에서 훔쳤다는 각진 블레이저 까지. 붉은 잠망경 아래 서 있는 모습이 반가워 단숨에 가 안겼다. 여전히 힙합을 조롱하고 내게 밴드 음악을 들이미는, 에곤 실레와 데카당에 푹 빠진 혁. 철 지난 사르트르와 델타시퀀스를 얘기하는 혁과의 스무 살을 나는 자주 곱씹는다.
혁아 기억해. 우리 신촌 까마귀 포차에서 했던 첫 미팅. 넌 진행하느라 바쁘고, 난 꿀 먹은 병아리처럼 아무 말도 못했던 날. 왜 그렇게 겁이 많았는지. 마셔도 마셔도 말은 나오지 않고 어색한 웃음만 터지더라
혁아 그것도 기억하지. 너 자퇴 날. 내가 너 집에 바래다주던 길. 우리 학교에서 술 먹고 그 추운 겨울 새벽녘에 벌벌 떨며 서대문, 이대 지나 세브란스 넘어 홍대까지 둘이 걸었잖아. 무수히 이어지던 갈래갈래 길. 네가 그때 들려준 첫사랑, 아버지, 슬픔 모두 기억해.
혁아 나 군대 가기 이틀 전, 그러니까 크리스마스이브에 갔던 콘서트도 기억난다. 민머리인 나랑 자퇴생인 너랑 순대국밥 먹고 갔던 신촌 지하 벙커 작은 록 콘서트. 콘서트 이벤트에서 받은 책 제목이 ‘연애 없이 사는 법’인 게 얼마나 웃기던지.
우리 했던 미술 동아리도 생각나. 너 회장, 나 부회장. 밤을 파묻으며 캔버스를 찢고 틀을 만들고 벽화를 지워나갔는데.
그러나 굳이 지난 얘기를 꺼내지 않아도 할 말이 많았기에 추억은 그저 목 뒤로 삼켰다. 나는 내 실패뿐인 연애담을 중얼거렸고 혁은 간간이 웃었다. 넌 어떠냐는 내 질문에 혁은 한참 말이 없었다. 난 굳이 되묻지 않았고, 잠깐 침묵이 흘렀지만 어색하진 않았다. 혁은 여전히 생각하고 있는 듯 보였기에 난 다시 내 근황을 떠들었다.
신촌의 반듯한 길을 지나 구불구불한 홍대의 뒷골목에 다다를 때쯤에야 혁은 입을 열었다.
“난 아직도 못 찾았어.”
“아.”
기억한다. 스무 살에도 혁은 늘 고등학교 첫사랑과 같은 사랑을 찾고 있었다. 결이 맞는 사람. 존경 할 수 있는 사람. 삭아 없어지는 삶에서 함께 도망쳐 나올 사람. 그래, 아마 잊기 힘들 것이다. 늦은 밤 괜스레 이불속에 숨어 하던 그 애와의 통화도 몰래 짓는 눈웃음에 귀가 빨개지던, 손 둘 곳조차 몰라 어설펐던 입맞춤 같은 것들도.
“그냥 내가 그때 많이 어렸나 봐. 그런 건 이제 없는거겠지.”
애써 누군가에게 다가가도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식어버린다며, 혁은 예의 그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이 사이 교정기까지 넌 그대로구나.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어떻게 세상에 둘만 있는 것처럼 그렇게 꼭 안아 입을 맞추고 이마를 기댈 수 있었는지. 늘 차갑던 그 애가 눈만 마주쳐도 배시시 웃게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기쁨과 아프고 애타는 마음이 있었을까 궁금하다. 무엇이 너를 어두운 가로등 밑에서도 설레며 기다리게 했는지 묻고싶다. 하지만 나는 그저 어설픈 위로를 하며 말을 아꼈고 우리는 무거운 주제에서 벗어나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며 홍대역으로 향했다.
“다음에 보자”
“그래 나중에 전시회나 가자”
혁은 아까 그 무거웠던 얘기는 모두 잊은 듯이 교정기를 보이며 씩 웃었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고 돌아서는 혁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날 전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 쏟아 내야만 했다.
말해주고 싶었는데, 아직 남아있다고. 혁아, 네가 찾는 게 아직 남아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그 마음들을 그리려 애쓰고 있다고. 가령
경의선 숲길.
능소화 핀 담쟁이 덩굴 담 앞. 꼭 끌어안은 마음에

세브란스 앞 버스 정류장.
이른 별 위로, 또 구름 뒤로 입 맞추는 연인들에게

혹은 토끼굴 뒤편
작은 골목길에서 바스러져 터지는 울음에도

혁아 네가 찾는게 남아있다고
그러나 내 그림이 아직 비루한 걸 알기에, 떠나는 혁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설픈 위로는 상처만 준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겁이 많아 말하지 못했다. 그래도 언젠가 혁, 네가 찾는 마음을 그림에 담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언젠가 혁, 네가 정말 지칠 때 위로가 되길 바라며 그림을 그린다.
그날. 그런 생각을 하며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혁을 나답지 않게 멀리멀리 지켜봤다. 혁의 곱슬머리를, 각진 블레이저를 끝까지 지켜봤다. 차가 생각보다 일찍 끊겨 조금 돌아서 걸어오는 길. 귀에 꽂은 이어폰에선 우연히도 다시 그 노래가 흘러나왔기에, 난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고 숨을 참아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 내내 그렇게 발걸음은 느려졌다. 나의 애정하는 혁. 멸종한 실존주의자 혁. 네가 그곳 어디 남아있을 사랑을 찾길 바란다.
–
세상에 잘했어 괜찮니 힘들었지
말해줄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누구를 찾아 헤맨 걸까
눈 뜨면 내 목을 조르는 영수증에
네가 건네준 1달러도
그저 돈이 돼버리는 게 너무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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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월, 세상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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