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 라르고 살롱: 오발탄 같은 사람들
라르고 살롱: 오발탄 같은 사람들
때로는 알 수 없는 무기력함이 나를 찾아온다. 입시를 끝낸 작년 이 맘 때도 그랬던 것 같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보고 싶은 사람도, 무언가 하고 싶은 일도 없이 가만히 있고 싶을 뿐이었다. 계절 탓이라고 해야 할까. 그저 그렇게 단순하게 치부하고 싶지 않지만 더 깊은 생각을 하고 싶지도 않다. 어차피 지나갈 하루고 언젠가는 다시 마주하게 될 하루니까. 그 생각에 이르기 전, 나는 신촌과 이대를 지나 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혼자 방황을 했다.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렇게 목적지를 잃은 채 날아간 총알처럼 주위를 맴돌다가 지하의 한 가게에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여기 앉아도 될까요?
네 편하신 곳으로 앉으세요.
나는 긴 테이블이 놓여있는 자리에 홀로 앉았다. 내 옆으로 와인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여기는 왼쪽이구요. 와인은 오른쪽에도 더 있어요.
음식은 어떻게 드시겠어요?
저는 와인 잘 안 마셔봐서 모르는데, 어떤 게 좋을까요.
처음이시라면 레드 와인을 권해 드릴게요. 안주는 음… 저녁 뭐 드셨어요?
저 샌드위치 먹었어요.
가볍게 드셨네. 군만두 어때요? 군만두는 비비고꺼 써요. 그래서 맛있어요.
네 좋아요.
메뉴를 정한 뒤에도 가게 메뉴판을 의미 없이 바라봤다. 뒤에 놓인 4인용 탁자 테이블에서는 일본인들의 말소리가 음악 소리와 비슷한 크기로 들려왔다.
가게는 언제부터 하신 거예요?
한 5개월 정도 됐어요.
이 근처는 어떻게 아셨어요? 여기가 쉽게 알 수 있는 곳은 아닌데.
돈이 없어서요. 찾다 보니까 여기가 있더라구요. 원래 저는 연남동에서 가게를 했었어요. 거기서 몇 년 하다가 다른 일을 하려고 이것저것 넣어봤는데 저를 뽑는 데가 하나도 없었어요(웃음). 그냥 다시 돌아 온 거죠.
왜 다른 일을 찾으려고 하셨어요? 이곳도 너무 좋은데요.
자영업하는 사람들은 금방 꿈이 생겨요. 그게 뭔 지 아세요? 월급쟁이가 되는 거예요. 저도 그런 삶을 바랬죠.
요리를 따로 배우신 거에요? 가게는 어떻게 차리시게 되셨어요.
아니요. 그냥 아내한테 해주다보니까 하게 된 거예요.
혹시 전공 여쭤 봐도 될까요?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요.
음… 들으시면 놀랄 거 같은데 제 전공은 지금 저한테는 정말 쓸모가 없어요. 전공 때문에 재취업하기도 애매했죠.
오 궁금해요. 근데 사장님 저도 대학생이거든요. 제 전공도 어디 가서 쓸모 있다는 소리는 잘 못 들어요. 제가 더 쓸모없을 걸요?
우리는 알 수 없는 실랑이를 몇 번 벌였다.
에이 그게 저예요. 손님 무슨 과인데요?
저는 독일어 전공이에요.
완전 좋네! 이게 어떻게 쓸모가 없어요. 독일 다녀와야겠네. 베를린이 최첨단 기술의 도시이잖아요.(사장님의 피셜. 에디터는 처음 들어본 얘기다.) 가면 배울 게 많을 거예요.
사장님은 전공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신학 전공했어요.
할렐루야. 어떻게 이런 일이… 저 교회 다녀요.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와인잔을 닦아냈다.
저는 지금은 안다녀요. 10년을 공부해봤는데 도저히 모르겠더라고요.
그럴 수 있죠 많이 힘드셨겠네요….제가 저번에 여기 한 번 들렀었거든요. 혹시 기억하세요?
그래요? 언제였죠. 저 웬만하면 손님들 다 기억하는데.
근데 그때는 뭐 안 먹고 메뉴판만 열심히 보다 갔어요. 다음에 오겠다고 하고.
아~ 기억나요. 그때 뭐 앉아있다 가지도 않았잖아요.
네 맞아요. 사장님만 계셨었잖아요. 있으려면 같이 이야기를 나눠야 할 거 같아서 그날은 아니다 싶었어요, 그때는 그냥 혼자 있고 싶었거든요.
그런 날도 필요해요. 그래도 기억하고 오늘 와줘서 고맙네요. 그래서 그날은 뭐 먹었어요?
혼자 사케동 먹었어요 윗집에서. 그날은 되게 무기력했는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그날도 지나가는 하루일뿐이었는데 사장님도 이럴 때가 있으셨어요? 가장 무기력한 때가 언제셨어요.
전 지금이요. 10년 전만큼 육체가 따라주지도 못하고 또 그만큼 심적으로 지치더라구요. 어디로 어떻게 가야될 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사는 거죠. <오발탄>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거기서 마지막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어쩌다 오발탄 같은 손님이 걸렸어. 자기 갈 곳도 모르게.” 이 말이 요즘 빙빙 돌더라구요. 늙어서 그런가.(웃음)
오 오발탄… 사장님도 글이나 영화 좋아하시는 거 같아요. 메뉴판에 뜨문뜨문 적힌 거 보면.

일요일은 영화 모임도 합니다. 사장님 <오발탄> 틀어주세요.
맞아요. 저 글 쓰는 거 좋아해요. 요즘도 종종 쓰고 있죠.
저도 글 써요. 별 거는 아니고 그냥 사람만나고 쓰는 글. 사장님이랑 대화한 거 글로 적어도 돼요?
당연하죠. 안 될게 뭐 있어요.
사진도 좀 필요한데 몇 장 찍어도 돼요?
당연하죠. 안 될게 뭐 있어요. 아, 제 얼굴만 안 나오면 돼요.

말씀이 끝나자마자 총알같이 뒤를 돌아보셨다.
그럴게요. 근데 오늘 나눈 이야기들을 제가 다 기억하고 적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다 기억이나 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 기억나는 대로만 써요. 다 담아낼 필요도 없어요 사실.
나는 남은 비비고 만두를 입에 넣고는 몇 방울 남지 않은 와인을 마셨다.
자주 오겠다는 말은 안할게요 사장님. 그냥 기억나면 또 올게요.
그래요 언젠가 한번은 꼭 들러줘요.
올해 안에 그럴게요.
주말 잘 보내요. 아 주일 성수 꼭 하시고요(웃음).
방음벽이 붙여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가게 안에 울려 퍼지던 음악소리가 촛불 꺼지듯 훅하고 날아갔다. 나는 시장 골목 사잇길을 따라 걸었다. 찬 바람이 겉옷을 파고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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