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너에게 보내는 나의 공간
나눔에 대해 생각한다. 나눔이 따뜻한 이유는 아마도 주는 이의 마음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든 내 안의 가장 예쁘고 소중한 것을 주고 싶은 마음. 연말이 오면 어김없이 선물 교환식을 하게 되는 이유도 이 때문 아닐까. 이 지독한 추위를 이기기 위해서는 나눔의 온도가 필요하기에. 그리하여 우리는 조금 더 특별하고도 괴짜 같은 선물 교환식을 해보기로 했다. 신촌에서의 가장 소중한 추억을, 이를 가장 소중히 여기고 담을 수 있는 사람에게 주는. 너에게 나의 공간을 보내는 것이다. 공간을 선물한다는 것은 단순한 좌표를 넘어 그 공간에서의 셀 수 없는 울음과 웃음들, 고민과 다짐들, 희망과 좌절들, 그 모든 것을 함께 담아 보낸다는 의미이기에. 우리는 다른 그 무엇도 아닌 공간을 나누기로 했다. 앞으로 더욱 혹독해질 우리들의 겨울을 견뎌내게 해줄 그 공간들을.
뚝딱이 보내고 챌라또가 쓴 공간, [호밀밭]
뜨거울 것인가, 차가울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애매하게 따뜻할 바에는 차라리 냉동고 안의 얼음처럼 시리도록 냉정해지고 싶다고. 그러나 또 생각한다. 명분 없이 쌀쌀할 바에야 펄펄 끓는 솥에 담긴 무언가처럼 김 나게 열정적이고 싶다고. 그러나 그러기엔 나는 한없이 미지근하다. 가끔가다 애매하게 끓어오르고, 그러다 가끔은 또 애매하게 식어버리는. 그래서일까, 나는 이런 어중간한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게 되어 쓸쓸해질 즈음에, 주기적으로 자기주장이 확실한 것들을 찾아 헤매곤 한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하나 꼽자면, 그 건 팥이다. 이 세상 모든 팥순이라면 알겠지만, 팥은 언제나 옳다. 그러나 이 ‘팥’의 참된 진가는 바로 온도에 있다. 확실히 뜨겁고, 확실히 차가울 때 그 진가를 드러내는 팥. 그리하여 한여름과 한겨울이 그의 ‘리즈 시절’이라는 사실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로 다가오는 것이다. 아주 뜨거운 것도 잘하고 아주 차가운 것도 잘하는 그런 팥이 부러워 나는 애증의 마음으로 팥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너무 일찍 찾아와버린 어느 비 오는 겨울날, 나는 단팥죽을 개시한 팥빙수 가게, 호밀밭에 발을 들인다.

숨은 파수꾼을 찾게 되는 색감과 공간
호밀밭. 밀의 옅은 황토색을 닮은 나무집의 문을 열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따스한 공기와 풍경이 반긴다. 좁지 않은 가게를 채운 원목의 가구들과 벽돌 벽의 무수한 낙서들, 그리고 단촐하나 개성 강한 메뉴판까지. 팥과 우유얼음 그리고 두 개의 말랑쫀득한 떡으로 이루어진 시그니처 밀크빙수를 필두로, 녹차, 커피, 딸기, 과일 등 탐스러운 빙수들이 눈부신 존재감을 뽐낸다. 그러나 그중 마음에 콩 하고(아차, 팥이지!) 들어온 문구는 다름 아닌 ‘단팥죽 개시’ 였다. 계절제 메뉴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개시’라는 말 때문 아닐까. 지금밖에는 먹지 못할 귀한 메뉴를 운 좋게 내 선택지 안으로 가져왔다는 착각 비슷한 느낌. 추운 겨울 시린 손을 꺼내어 우산을 들고 달려온 시간을 이미 보상받은 듯한 그 문구에 홀려, 밀크빙수와 단팥죽 모두를 주문해버렸다. 뜨-찬-뜨-찬의 ‘끔찍한 혼종’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는 그 조합에서 난 무언가를 찾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로 가도 팥으로만 가자!
꾸미지 않은 것들을 보면 당당하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 호밀밭의 팥빙수와 단팥죽은 당당한 형태로 내 앞에 왔다. 하이얀 우유 얼음과 투박하고 정직한 팥 한 그릇으로 기호에 맞게 섞어서 먹을 수 있는 형태로 나온 팥빙수와 빨간색 국그릇에 뚜껑이 닫혀 나온 팥죽. 궁금한 마음에 뚜껑을 열어본 단팥죽은 그야말로 행복주머니 같았다. 열자마자 풍기는 따뜻한 시나몬 향과 더불어 큼지막하게 들어 있는 밤, 떡, 그리고 은행들. 눅진하고 따뜻하며 많이 달지 않은 팥에 고명을 얹어서 한 숟갈 두 숟갈 퍼먹다 보면 괜히 어릴 적 행복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온갖 따스한 기억들의 촉매제라고나 할까. 정신을 차리고 이번엔 차가워지기로 결심한다. 눈 같은 얼음에 팥을 조심스레 부은 뒤 살짝 섞어 입에 넣어 보니 부드럽고 달큰한 우유 향과 꾸밈없는 꽉 찬 팥의 식감이 원투-펀치를 때린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이 맛도 따뜻하고 행복했던 기억을 반추하게 한다. 참 이상하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예뻐할 수 있을 때까지,
뜨거운, 그게 아니라면 차가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단팥죽과 팥빙수를 번갈아 가며 먹으며 역설적으로 깨닫는다. 뜨겁고 차가운 게 뭐 그리 큰 문제일까 하고. 우리는 저마다의 온도로 행복할 것이라고. 차갑거나 뜨겁거나 미지근하거나, 혹은 그 사이쯤 있는 그 어떤 온도로라도. 미지근한 사람으로 사는 것도 차갑고 뜨겁게 잘 사는 것만큼이나 대단하고 행복한 삶임에 분명하다고. 남아있는 미지근한 단팥죽에 몰래 우유 얼음을 올려서 먹어본다. 내 온도는 무엇일까. 아까보다 차가워진 공기 속으로 나아가며 옷깃을 여민다. 그리고 다짐한다. 나만의 온도를 잃지 않아야겠다고.
“뚝딱의 편지”
호밀밭은 내가 2018년 12월부터 알바를 시작하게 되면서 근 1년간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장소이다. 그리고 2019년 10월에 알바를 그만두게 되면서 예전만큼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애정을 가지고 가끔 들르는 장소이다. 언니는 2019년 3월에 잔치에서 나와 처음 만났고 2019년 12월에 잔치를 나와 함께 나간다. 근 1년간 매주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자주 보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당신과 여전한 애정을 가지고 가끔 만나며 계속 인연을 유지하고 싶다. 갓 나온 팥죽처럼 너무 뜨겁지도 방금 만든 빙수처럼 너무 차갑지도 않고 조금 식은 팥죽, 조금 녹은 빙수처럼 우리 사이가 미지근하고 오래도록 유지되는 온도이길 바라며! 미적지근해도 그 맛은 깊고 진하길 바라며!
챌라또가 보내고 러폴이 쓴 공간, [장도리 곰탕]
연희동의 가을은 아직 진행 중이었습니다. 학교 기숙사에 사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학교 셔틀을 타고 올라간 학교 뒷산 앞의 연희동 골목들은 오후 한중간에도 잠들어 있었지만 단풍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미 낙엽이 모두 떨어진 저 밑 동네와 달리, 연희동의 가을은 아직 진행 중이었습니다.


생각보다 외딴곳에 있었던 가게.
3시 20분 셔틀을 타고 연세대학교 북문으로 나가, 높은 굽의 신발 때문에 조금 천천히 걷다가, 다 지나간 줄 알았던 가을에 눈이 팔렸다가, 빵집의 빵 냄새에 코가 팔렸다가, 4시가 다 되어서야 느지막이 도착한 가게 안은 한산했습니다. 이렇게 걸어와 곰탕 가게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것은 처음이라, 텔레비전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메뉴판에 수육도 있다는 걸 기억하면서 곰탕 하나를 주문합니다.
깍두기, 무말랭이, 배추김치, 삶은 소면, 이름을 정확히 모르는 푸른 나물 된장 무침, 보라색 잡곡밥, 뚝배기. 곰탕이 나오자마자 차갑게 식은 양손으로 반갑게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후후 불어 떠 넣습니다. 불어도 어차피 입이 다 델 온도일 때 입안에 넣을 거면서 왜 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하고, 큼직한 무말랭이를 한 입 합니다. 달달하면서 아삭아삭한 식감에 허겁지겁 잡곡밥을 곰탕 국물에 빠트립니다.

무말랭이 무말랭이. 곰탕과 무말랭이.
가게 안은 화초가 많았고 자리는 모두 원목 색으로 칠해진, 할머니 댁에 놀러 가면 보이는 짙은 갈색에 무성히 짙은 녹색의 합이었습니다. 자리에 앉아 첫 국물을 뜨는 순간 이미 식사를 마친 다른 자리의 두 손님마저 나가버리고, 텅 빈 가게 안에 국회 이야기가 나오는 텔레비전 뉴스와 함께 단둘이 남겨졌습니다. 주방 안에서 도란도란 대화 소리가 작게 들릴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 천천히 곰탕 국물을 뜰 수 있었습니다. 창밖을 보지 않고도, 뽀얗고 하얀, 흰 눈을 모아서 녹이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어린아이들이나 생각해낼 수 있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곰탕 국물을 뽀얗게 빤히 바라보면서 시간을 오래 들여 우려낸 국물에 담긴 시간을 스스로에게도 나눠 주고 있었습니다. 2019년이 어느새 12월에 다다르고 있었고 곰탕 국물은 몇 시간을 우려내야 올해를 나름의 치열함으로 살아 온 나의 시간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해 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휴대폰을 한 번도 보지 않고 40분 동안 곰탕 한 그릇을 천천히 먹었습니다. 나와 곰탕 한 그릇, 그리고 반찬 네 가지. 나는 40분을 오롯이 다음 숟갈을 어떻게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이번에는 국물에 밥이랑 고기를 같이 떠서 입안에 넣은 다음에, 국물이 모두 넘어가기 전에 빨리 무말랭이를 입안에 넣자. 다음에는 국물에 밥만 같이 떠서 입안에 넣은 다음에, 나물을 빨리 넣어서 씹다가 배추김치 큰 조각을 먹자.
당장 눈앞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놀라, 당장 지나가고 있는 연희동의 가을을 붙잡았듯이, 곰탕 국물 한 숟가락, 한 모금에 담긴 시간에 감사하기 위해 매 다음 숟가락 위가 그 전보다 더 맛있을 수 있도록 궁리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혼자 앉아 있으면 외로울 리가 없는 것처럼 곰탕의 뽀얀 국물 앞에서 에디터는 정말 사십 분의 시간을 잘게 쪼개어 깊이깊이, 빨리 더 많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깊이, 깊이 마음 안으로 걸어 들어간 시간을 가졌습니다.
연희동의 가을은 아직 다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곰탕 국물도 그러하며 이 둘은 시간에 쫓겨 살았던 나에게는 잊히기 너무 쉬운 것들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달으며 곰탕 국물을 마지막 하나까지 모두 비웁니다. 정말 따뜻했습니다.
“챌라또의 편지”
뽀얀 얼굴이 숨겨둔 깊이가 참 닮았다. 하얗고 소박하지만 그리하여 그 진함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알아채기 어려운. 하지만 이를 알아챈 이상 후퇴란 없다. 점점 깊이 빠져들 수밖에. 그래서 말해주고 싶었다. 넌 참 깊은 사람이라고. 다시 생각해보면 뽀얀 얼굴에 잘 어울리는 깊이와 진함인 듯하다. 그래서 선물한다. 내가 춥고 허기질 때마다 그 모든 허기를 완벽히 채워 준 나만의 비밀 공간을. 이 한 그릇이 널 더 깊고 단단하게 해주길 바라며.
러폴이 보내고 리코더가 쓴 공간, [라벨 플레르]
“다예야, 생일 축하해! “
스무 번째 생일을 맞던 날, 나는 처음으로 꽃을 선물 받았다. 커다랗고 노란 해바라기 한 송이를 품에 안고 온 언니는, 그 언니는 말이다, 내게 꽃을 틔워주었다. 유난히 지난하고 버거운 여름을 겪어낸 생일이라 그랬던 걸까. 생각지도 못한 축하, 생각지도 못한 해바라기는 이내 꽃밭 같은 걸 꾸려 균열의 빈틈을 메웠다. 그리고 같은 날, 나는 새로이 배운 것이 있었다. 나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꽃을 전해야지. 꽃은 언젠가 지고야 말겠지만 네게 배로 큰 꽃밭이 생겨날 것을 나는 아니까. 마치 내가 해바라기를 보면 언니가 떠오르는 것처럼 너도 그 꽃을 볼 때마다 날 잊지 못할 게 뻔하니, 어찌 보면 꽃은 사라지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내가 너에게 가득 차도록, 밖은 추워도 네 안은 봄일 수 있게 꽃을 줘야지.

화려한 불빛이 가득한 골목 사이, 라벨플레르는 고요히, 그러나 선명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흰 외벽과 하얗게 빛나는 간판이 건물의 붉은 벽돌과 대비되어 인상적이었다. 벽에 나 있는 큰 창문 너머로는 바삐 움직이는 사장님이 언뜻언뜻 보였다. 부쩍 추워진 날씨 탓에 따스한 가게 안으로 급히 들어가려던 찰나, 지금까지 얼마나 자주 꽃집을 방문했었는지 잠시 헤아려보았다. 아마 한 손으로도 꼽을 수 있겠지. 그만큼 나는 누군가에게 꽃을 선물한 적이 없었다. 이곳도 수빈이 공유하지 않았다면 선뜻 들어서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수빈은 내게 공간과 함께 꽃을 선물할 용기를 주었다.

꽃집은 내내 봄인가? 꽃을 보면 어쩐지 마음이 간지럽다. 주고받은 기억들 때문인 걸까.
짤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자 따뜻한 공기가 두 볼을 녹였다. 동시에 ‘아 예뻐라’하는 탄성이 마구 튀어나와 조금 민망해진 것도 있었다. 더 정신이 팔리기 전에 사장님께 작게 인사를 드리고는 내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꽃집이라 꽃이 가득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라벨플레르는 공간이 넓은 편인데도 유독 꽃내음이 넘쳤다. 가게 한켠에는 미리 만들어 놓으신 꽃다발 여러 개가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종류도 매우 다양했고 색감도 알록달록한 게 눈을 사로잡았다. 졸업 전시나 크고 작은 행사에 들고 가기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작고 소담한 꽃다발을 생각해 두었기에 사장님께 따로 말씀을 드렸다. 사장님은 꽃 냉장고에서 싱싱한 꽃들을 골라 예쁜 포장을 덧입히고는 내게 엽서를 건네셨다. “선물하시는 거죠?” 센스 있는 사장님의 배려 덕분에 작은 카드도 적을 수 있었다.
꽃집을 나설 때엔 가게의 온기를 담아서인지, 꽃을 안은 울렁이는 마음 때문인지 그닥 추운 기운이 들지 않았다. 이제 네게 꽃을 전하는 일만이 남았다. 선물은 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주는 사람도 행복해진다 하지 않았나. 꽃다발을 품고 겨울 길을 걷는데 벌써부터 그 얼굴이 그려져 웃음이 나왔다.

예쁘죠?
그 애를 생각하면 짙은 남색이나 초록색이 보인다. 그런 너와 어울리는 빛깔은 무엇일까 조금 고민을 하다 아무래도 보색의 꽃이 서로를 빛내줄 것 같아서 노란 꽃을 골랐다. 맑지 않은, 녹진한 노란색을 가진 프리지아를 말이다. 프리지아는 봄에 피는 꽃이라는데, 매서워지는 바람 사이에서 너가 좋아하는 계절을 선물할 수 있어 퍽 다행이고 기뻤다. 꽃을 선물하는 일은 단순히 꽃을 주는 행위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걸 이렇게 깨닫는다. 더 자주 라벨플레르를 들려야겠다. 더 자주 꽃을 선물해야지.
누군가로부터 선물 받은 공간에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선물을 전하는, 이 멋진 일을 또 언제 해볼 수 있을까? 내게 라벨플레르를 선물한 수빈에게 감사함을 전하며 난 이만 꽃을 주러 가보아야겠다.
“러폴의 편지”
아직 신촌으로 넘어오기 전, 학교 건물 이름을 지도에 검색해 찾아다닐 무렵 친구의 클래식 기타 공연을 위해 꽃다발을 샀어야 했다. 학교 안에 꽃집이 있는 줄 알기도 전이었기 때문에, 신촌 꽃집을 검색해 들어간 곳이 라벨플레르였다. 꽃집에 원래 꽃이 많은 건 당연한 줄 알면서도 그게 그렇게 포근하고 너무 화려한 감 없이 온통 꽃으로 담뿍 담겨 있다는 게 아름다웠다. 회의 때마다 앉아있는 다예를 보며, 근황토크를 담백하게 마무리하는 다예를 보며 라벨플레르가 생각났다. 마음으로 느낄수록 따뜻한 공간, 마음으로 느낄수록 따뜻한 사람. 그리고 다예가 좋아하는 필름 카메라가 꽃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한 번 셔터를 누르면 고칠 수 없이 영원히 새겨지는 이미지가, 가장 아름다운 철은 가장 짧은 순간인 꽃과 역설적으로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라벨플레르를 떠올렸다.
리코더가 보내고 뚝딱이 쓴 공간, [취미사]
이대역 5번 출구에서 조금 걸어가면 필름 현상소 “취미사”를 만날 수 있다. 필름 카메라를 좋아하는 다예가 요즘 사진에 부쩍 관심이 많은 나에게 이 장소를 선물해주어서 가보게 되었다.

문이 새카매서 쉽게 지나칠 수 있다. 나는 지도를 켜고 갔음에도 지나쳐버려서 GPS가 도착지를 넘어선 것을 보고 되돌아와 겨우 취미사를 찾았다. 새카만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에는 새카만 암막 커튼이 쳐져 있고 아래로 계단 몇 칸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 옆에는 “머리조심(겸손)”이라는 빨간 글씨가 붙여져 있는 철문이 있다. 처음에는 커튼을 젖히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줄 알고 열심히 뒤적거렸으나 갈라진 부분이 없길래 밑으로 내려가 보았다. (이제 생각해보니 커튼 안쪽이 필름을 현상하는 암실인가보다.)

투박한 철문에 비해 너무나 멋진 공간이 펼쳐졌다.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공간이었다. 조심스럽게 그 공간에 들어가자마자 주인분께서 이름, 번호, 이메일 주소를 적는 명단을 내미셨다. 나는 필름 카메라를 써본 적이 없는데 한번 도전해보고 싶어서 온 것이라 필름 현상을 위한 절차인듯한 문서를 내민 주인분께 다급히 “전 필름 카메라가 없어요.”라고 외쳤다. 뒤이어 의아해 보이는 주인분께 “필름 카메라 대여가 가능하다던데 빌릴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니 명쾌한 표정을 보이시곤 대여 가능한 카메라 기종들을 보여주셨다.
10종 이내의 카메라들을 보여주셨는데, 역시나 난 아무것도 모른다. DSLR만 써봤지 필름 카메라는 써본 적도, 아니 아예 본 적도 없다. 이것저것 설명해주시는 주인분께 다시 황급히 “저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말하니 다시 명쾌한 표정을 보이시며 알겠다는 듯이 두 가지 카메라로 추려서 설명을 해주신다. 둘 중 조금 더 비싸지만 사진이 더 예쁘게 나온다는 기종을 골랐다. 가격은 필름 카메라 대여, 필름, 현상 및 스캔까지 합쳐서 단돈 2만 원! 새로운 경험에 대한 대가로는 매우 저렴한 편이다.

“필름 카메라” 자체가 궁금해서 취미사에 온 것이라 무엇을 찍을지 정해놓지는 않았다. 무작정 밖으로 나와 취미사가 있는 동네, 염리동 구석구석을 찍어보기 시작했다. 내가 하루 머물렀었던 게스트하우스 화단을 시작으로 음악 관련 도서를 파는 초원 서점, 나란히 집게에 꽂혀있는 빨랫감들, 철물점 앞의 물병 속 금붕어, 오토바이가 외로이 서 있는 사거리, 말라비틀어져 가는 풀들, 트럭 밑 고양이, 한서 초등학교 안의 비석, 지붕 위에서 날 바라보는 고양이, 그리고 소금길의 조형물들을 찍었다. 찍을 만큼 찍고도 필름의 수가 10장 정도 남았길래 나머지 분량은 다시 취미사로 들어와 내부에서 사진을 찍었다.
찰칵, 드르륵. [34] 찰칵, 드르륵. [35] 찰칵, 드르륵. [36] 드르르르르르르륵 [35] [34] [33] … [1] “딸깍”
한 장 한 장 사진을 찍을 때마다 필름이 감기는 소리가 짧게 짧게 들리다가 36장의 사진을 다 찍자 필름이 도르르륵 말리는 소리가 길게 들린다. 숫자가 내림차순으로 줄어들다가 [1]에 도달하고, 필름이 나갈 준비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딸깍” 소리가 들린다.

36번째로 찍은 사진
카메라에서 필름을 꺼내어 현상을 맡겼다. 두어 시간 기다려야 된다고 하셔서 바로 맞은편의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기다렸다. 오랜만에 느끼는 설레는 기다림이었다. 곧 메일을 확인해달라는 문자가 도착했고, 현상을 마친 필름을 받으러 가기 위해 다시 취미사에 들렀다. 필름과 내가 찍은 사진들이 작게 나열된 사진 한 장을 받아들고 나서는 길, 첫 방문인데 6번이나 취미사의 새카만 문을 열고 닫은 것이 웃겨 살풋 웃었다.
익숙한 장소에만 계속 가서 10개가 꽉 채워진 쿠폰이 여러 개가 된 요즈음, 오랜만에 새로운 장소에 대한 탐방이 꽤나 재미있었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카메라로 새로운 동네를 둘러보는 경험을, 내가 사는 곳 바로 옆에서 할 수 있다니 세상은 참 좁고도 넓다. 바로 옆인데도 이렇게 다르고, 내 일상의 바로 옆인데도 이렇게 색다르다. 가끔 가까운 곳으로의 여행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며 취미사 탐방을 마친다.
“리코더의 편지”
다현아, 너도 사진을 좋아한다고 했지? 내가 필름 사진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할 무렵, 학교가 끝날 때마다 달려가던 현상소 있어. 약간은 깊숙한 염리동 골목에 자리를 잡은 그곳은 무척이나 안온하고 친절하게 모두를 반겨주었지. 취미사는 다현이 너도 반갑게 맞이해 줄 거야. 내가 그곳에 녹여둔 시간들이 너에게 스며 썩 멋진 사진들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어디를 선물해야 하나 고민했던 날들이 무색할 만큼 취미사가 네게 즐거운 시간을 선사하길 바라.
라봉이 보내고 보구밍이 쓴 공간, [더 파이브 올스]
경의선 책거리 근처, 술집이 있을 리가 없어 보이는 조용한 골목을 긴가민가하며 걷다 보면 고양이가 있는 칵테일 바, 더 파이브 올스가 있다.

한적한 골목을 걸으며 작고 조용한 술집을 상상했는데 웬걸 반지하의 가게에는 사람이 가득해서 빈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자리가 생기길 간절히 바라며 홍대를 한 바퀴 돌고 오자 가장 원했던 창가 자리가 선물처럼 비어있었다. 복작복작한 분위기와 약간 어둡지만 따뜻한 조명으로 가게에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정신없이 바쁜 요즘이라 날이 추워진다고만 생각하고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은 잠시 잊고 있었는데, 어느덧 연말이 코앞에 다가왔음이 느껴졌다.
3마리의 고양이가 있다 하였는데 방문한 날엔 아쉽게도 2마리밖에 보지 못했다. 자리마다 가득 차 있는 손님들 사이를 여유롭게 누비며 주인 행세를 톡톡히 하고 있는 고양이들은 가까이 다가서면 귀찮다는 듯 째려보며 빠르게 달아나지만, 한참 술을 마시다 보면 어느새 근처에 와서 앉아있곤 했다. 한 번은 화장실 안에 고양이가 있어 깜짝 놀라 인사했는데 순식간에 화장실 벽 모퉁이에 있는 구멍으로 사라졌다. 가게 벽 뒤에 있을 고양이들만의 비밀 공간을 상상하며 이 가게의 주인이 고양이임을 확신했다.

더 파이브 올스에는 정말 다양한 술과 안주가 있었다. 나폴리탄, 중화식 냉라면, 야끼소바가 noodle이라는 한 카테고리 하에 함께 묶여있다니. 난생처음 보는 안주의 조합에 웃음이 났다. 두꺼운 메뉴판을 한참 들여다보며 고민한 끝에 간신히 커리부어스트를 골랐다. 소세지와 커리 소스는 기대 이상으로 잘 어울렸다. 배가 부른 탓에 다양하게 시켜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 다음번 방문 시에는 반드시 배고픈 상태로 와서 이것저것 시켜보리라 다짐했다.
세상에는 칵테일이 몇 종류나 있을까? 더 파이브 올스에는 무려 460여 종류의 칵테일이 있다. 더 놀라운 점은 대부분의 칵테일 가격이 6000원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칵테일에는 고유 번호가 매겨져 있다. 좋아하는 칵테일을 주문해 마시거나 마음에 드는 이름의 칵테일에 새롭게 도전해 볼 수도 있지만, 첫 방문인 만큼 새로운 방법으로 칵테일을 마셨다. 더 파이브 올스를 선물해준 이가 추천해준, 이름하여 ‘재앙게임!’ 메뉴판을 보지 않고 함께 온 이에게 번호를 추천하고, 추천받은 번호에 해당하는 칵테일을 마시는 것이다. 도수는 논알콜부터 아주 독한 것까지 매우 다양했다.
시작은 23살이 1달 남았기에 231번과 1달 후면 24살 이기에 124번을 골랐다. 혹시나 이 글을 읽은 후 더 파이브 올스를 방문할 사람에게 스포일러가 되지 않도록 구체적인 칵테일 이름은 적지 않을 테지만, 23살이 1달 남은 것도, 1달 후면 24살인 것도 꽤나 독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역시 쉽지 않구나 싶었다. 함께 방문한 이가 수학을 아주 잘하기에 소수가 아닐 것 같지만 소수인 157과 소수일 것 같지만 소수가 아닌 177번을 고르며 (숫자 변태들 같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157번은 요상한 시럽 약 맛이 났고, 177번은 달콤하지만 짰다. 숫자를 고르고 그 숫자에 해당하는 칵테일이 어떤 맛일지 기대하며 기다리는 시간은 설레고 즐거웠다. 연말 분위기와 다양한 술, 즐거운 대화로 인해 생각보다 아주 오래도록 창가에서 앉아 다양한 번호를 음미했다.

안녕 23살, 안녕 24살
다가오는 연말엔 더 파이브 올스에서 당신의 소중한 사람과 의미 있는 번호를 선물 주고 선물 받으며 설렘 가득한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265번을 추천한다 :-))
“라봉의 편지”
솔직히 말하자면 그저 좋아서. 풀어 말하자면 첫눈에 나는 그 공간을 보고 내 거다!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아마도 나는 금방 사랑에 빠지는 편일 테다. 물론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한번 보고 다 알기는 쉽지 않지만 나는 첫눈에 그 공간과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그건 보경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이번 학기 잔치가 시작되고 나서 만난 이보경이라는 사람은 첫눈에 보기에도 아, 내사람. 같았달까. 쓰고 나니 낯부끄러운 연애편지 같아졌지만 아무튼 간! 언니가 주는 편안함과 그 공간에서 느낀 기분 좋음이 어딘가 닮아있어서, 나는 쉽게 더 파이브 올스를 떠올렸다. 사실 서로가 서로에게 장소를 추천해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나는 묘한 운명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이름도, 맛도 모르는 칵테일을 앞에 두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날을 기대하며.
보구밍이 보내고 라봉이 쓴 공간, [판자집]
공간은 이야기를 담는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공간은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들은 공간의 소유자가 담아낸 것이기도 하고, 공간 속 물체들로 이루어지기도 하며, 공간 자체에서 생겨나기도 한다. 이야기는 정적인 공간 속에서 동적으로 움직인다. 공간은 그런 이야기를 드러내기도 하고, 숨기기도 한다. 오래 보아야만 의미를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 반면, 처음부터 낱낱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공간이 있기도 하다. 어떤 공간은 이야기가 없는 것이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이번에 방문한 판자집은, 공간이 가진 이야기가 너무도 많았던, 그리고 숨김없이 그 이야기를 보여주던 곳이었다.
신촌역 4번 출구에서 나와, 경찰서를 끼고 돌면, 붉은 간판이 눈에 띄는, 그러나 마트라기보다는 동네 슈퍼와 비슷한 느낌의 연세로 마트가 나온다. 연세로 마트를 기준으로 오른쪽을 바라보고 길을 걷다 보면 언제쯤 도착이야? 하는 생각이 들 때 즈음 주점 판자집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당신은 어쩌면 판자집의 외양에 실망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섣부른 판단은 후회를 낳는 법. 날이 춥다. 판단은 잠시 제쳐놓고 판자집의 문을 열어보자.

그 언젠가 초등학교 때나 보았던 철제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분명 초면인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판자집은 오래된 친구처럼 사람을 맞이한다. 동그란 조명들은 판자와 나뭇대로 이루어진 천장에 조금은 위태로운 모양새로 달려있고, 과연 여름에 이걸 사용할 수 있을까 싶은 선풍기들이 조명과 조명 사이에 매달려있다. 벽면에는 옛날 신문과 사람들의 낙서와 뒤엉켜 메뉴들이 존재한다. 온갖 것들이 한데 엉겨 붙어 조금은 난잡스러워 보여도, 각자 제자리에 알맞게 존재한다는 듯 묘하게 조화롭다. 꽤 이른 시간임에도 판자집 안에는 두 테이블이 차 있었다. 완전한 타인들의 목소리가 마치 가게의 일부인 양 느껴진다.
공간을 한차례 눈에 담고, 소매를 당기는 친구에 서둘러 자리에 앉으면 이 가게에 있는 어떤 사람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식탁과 마주하게 된다. 여기저기 있는 상처들과 사람들의 흔적은 식탁의 인생이 녹록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날 에디터와 친구는 분명한 목적, 파전에 동동주라는 목적이 있었기에 애써 메뉴를 훑는 수고로움을 버린 채 해물파전에 동동주를 주문했다. 주문하고 다시금 공간을 읽다 보면 다양한 글씨들이 눈에 띈다. 빛바랜 신문지들 속의 이야기들이 보이고, 그 속에서 질서 없이 존재하는, 언젠가 방문한 사람들의 메모들이 보인다. 누군가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사상에 관해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그날의 추억을 새겨놓기도 했다. 그들이 적어 내린 삶의 이야기는 벽면을 가득 채우다 못해 천장을 지지하는 나뭇대에까지 침범해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텍스트로 가득 찬 벽면을 읽다 보면 시간 가는 건 한순간
벽면 속 글자들을 읽다가, 친구와 어떤 메모가 가장 오래되었는지 찾는 실없는 게임을 하다 보니 어느새 시킨 메뉴들이 턱턱 자리를 잡는다. 얇고 바삭하게 구워진 해물파전과 살얼음이 깔린 동동주가 곱게 자태를 뽐냈다. 뜨겁고 바삭한 파전 한입, 동동주 한 사발. 파전은 입속으로 들어가 다양한 식감을 냈다. 바삭하고, 부드럽고, 탱글하다. 차가운 동동주는 몸속으로 들어가 열을 낸다. 이가 시릴 만큼 차가운 것이 목울대를 통과하고 나서는 그리 뜨거워지는 것이 퍽 모순적이라서 비식비식 웃음이 났다.
오래된 친구와, 우리보다 오래된 것이 분명한 술집에서, 미처 못 나눴던 이야기를 나눴다. 쉽사리 꺼내지 않는 바닥의 나까지 싹싹 긁어내어 보여준다. 솔직한 나를 보이기에 알맞은 공간, 알맞은 사람. 이야기하다가, 술을 마시다가 보면 동동주는 금세 바닥을 보이고, 파전은 파편만이 남아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한잔 더 할까. 하는 마음과는 달리 배는 가득 차 있었기에 아쉽게 몸을 일으킨다.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몸을 일으키자 허리의 뻐근함이 그제야 몰려온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의 탓인가. 아니, 자세가 나쁜 나의 탓이겠지.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어느새 나는 이 공간을 변호하고 있었다.
허리를 통통 치며 겉옷을 입다가 친구가 꽤 발랄한 목소리로 말을 건다.
‘어, 나 2005년 찾았어.’
아까까지 하던 오래된 메모 찾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2005년의 메모를 가리키며 웃는다. 그래, 네가 이겼다. 그의 손을 들고 몇 번 흔들던 나는 이겼으니까 네가 계산해. 하는 말을 남긴 채 바깥으로 나섰다. 입김이 나오는 거리에서 판자집을 앞에 두고 나는 공간에 대해 생각한다. 판자집은 뭐랄까. 너무도 솔직한 공간이었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점철된 공간. 세월과 함께 쌓여진 그 이야기들은 완전한 타인인 내게도 부끄럼 없이 그 속내를 비친다. 그래서인지 그 속에 들어가면 솔직해진다. 그 솔직함이 부러워 그런 것인지, 혹은 매 순간 그리 솔직하지 못하게 살아가는 자신을 내려놓고자 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것은 판자집의 솔직함은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판자집을 뒤로하고, 왁자한 거리를 오래된 친구와 걸으며 나는 노래 하나를 흥얼댄다.

가끔은 이상한 것에 꽂히기 쉽잖아요
친구는 네가 무슨 세일러문이냐며 웃었다. 친구는 모른다. 내가 그곳에 또 하나의 이야기를 쌓고 왔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이야기는, 아마도 내가 부른 가사라는 것을. 판자집 속에서는 누구보다 솔직했지만, 문을 닫고 나온 후에는 그다지 솔직하지 못한 나를, 그 메모를 발견한 사람들은 모를 테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로 가득 찬 그 공간에 나를 한조각 새겨두고 온 것이 못내 뿌듯하였기에, 의미는 그리 중요치 않았다. 날은 추웠지만 배는 불렀고, 친구와 나눈 이야기는 따뜻했다. 집을 향하면서 나는 다시 기분좋은 미소를 짓는다. 언젠가 솔직함이 필요할 때, 나는 다시 판자집을 떠올릴것이다. 떠올리기만 해도 조금은 솔직해질 것만 같던 공간을.
“보구밍의 편지”
이전에도 곧잘 말하곤 했지만 나이 든 공간을 좋아한다. 어리고 불안정한 나에게 나이 든 공간은 어떠한 형용할 수 없는 위로를 준다. 따뜻한 힘을 가진 공간에서 아끼는 사람들과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술잔을 부딪치는 것은 나에게 가장 큰 행복이다. 이번에 처음 잔치에 들어와 모든 게 낯설었던 나를 따뜻하게 대해준 팀장 소정이에게 항상 고맙다. 너가 알런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너는 항상 힘이 되어주는 든든한 선배였다. 추운 겨울이 지나기 전, 판자집의 뿌연 창가에 앉아 막걸리 잔을 부딪치며 너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퍽 길어진 우리의 선물 대 잔치다. 고백하자면, 여기서 하나 더. 뽀너스 선물이 있다. 바로 이 글을 위해 허름하고 작은 동네 술집에 모여 메모장을 켜고 고백하듯 각자의 공간을 선물하던 장면이다. 우리의 모습을 그려 내어 엽서로 만들고 싶을 만큼 아직도 눈에 선하고 동화 같았던 장면. 선물하는 공간의 예쁨을 설명하기 바빴고, 또 그 예쁨을 한 자라도 놓칠까 바알간 얼굴로 황급히 받아적기 바빴던. 카페에서는 어느새 캐롤이 흘러나오고, 송년회와 신년회가 달력을 채워 갈 지금. 올해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서로의 공간을 나누어보는 건 어떨까. 나의 공간이 너의 공간으로, 그렇게 다채롭게 ‘우리’의 공간으로 채워질 때까지. 공간들이 떠는 수다로 이 밤이 끝나지 않을 때까지. 그렇게, 따뜻하게 아주 오래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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