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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2021 · 11 · 03

164. 바코드

Editor 소한

 어릴 적 학교에 가기 싫어서 꾀병을 부려본 경험은 누구나 있지 않을까. 그냥 괜히 학교 가기 싫었던 어느 날 아침을 떠올려보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감 연기로 오렌지 맛 해열제 한 숟가락을 받아먹고 따끈한 전기장판 위에 누워서 나의 결석을 알리는 엄마와 선생님의 통화를 엿들을 때면 웃음이 비죽비죽 새어 나오지 않았나. 그런 달달함과 짜릿함이 꾀병의 묘미지만 나는 그런 것보다도 엄마가 자식에게 내어주는 따뜻한 관심과 다정한 손길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이런 영악한 어린 시절을 거쳐 이제는 성인이 되었건만, 오렌지 맛 해열제는 소주와 맥주로, 머리칼을 넘겨주던 엄마의 손길은 등을 두들겨주는 친구의 손길로 바뀌었을 뿐이다. 나는 여전히 삐뚤어진 방식으로 관심을 갈구하는 ‘관종’이 되곤 한다.

 가끔 그런 날이 있다. 괜히 술로 나를 괴롭히고 싶은 날. 분명히 아무 일도 없는데 속은 시끄러워서 나만 문제인 것 같은 그런 날. 그럴 때 근본 없는 비율의 소맥 제조와 무한 원샷, 폭풍 자작을 하다 보면 누군가는 꼭 물어봐 주기 마련이다. “근데, 너 진짜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하고. 정말 아무 일 없기에 대충 웃으며 손사래 치는 것 외에 별다른 선택지는 없지만, 나는 꼭 그 질문을 기다린 것 같다. 그냥 누가 대충이라도 신경 써 주는 것. 내 인생이 고꾸라지지는 않았는지 나 아닌 누군가가 주의를 기울여 주는 것. 그런 관심에 꽤 목이 말랐던 모양이다. 그리고 속으로는 ‘그래, 아무 문제도 없다. 내 인생이 어디 바닥에 처박혀있는 건 아니다.’하고 나를 다독여본다. 가끔 정말 최악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하지만 그런 관심과 애정, 확인을 늘 타인에게 기대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저 대사를 듣자고 매일같이 폭음하다가는 요절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연습을 하기로 마음먹은 거다. 나한테 관심 주는 것, 나에게 다정을 베푸는 것, 그리고 그 관심과 다정에 만족하는 것… 그런 시시하지만 대단한 일들 말이다. 이번 ‘혼술’이 그 연습의 일종이었다. 

 이번 연습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날씨는 꿀꿀하고, 잔치꾼들에게 추천받아 가려고 했던 술집은 닫혀있고, 웬 이상한 아저씨가 번호를 달라고 쫓아오는 바람에 종종걸음으로 도망치기 바빴다. 하지만 가끔은 도망친 곳에도 낙원이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얼떨결에 시작한 산책이 찾아준 곳,  ‘바코드’다.

 


삑 그리고 다음 삑 그리고 다음 영수증은 버려줘 마지막 존심을 위해.

 

 화려한 간판들 사이 무심한 흑백 간판이 그날따라 내 눈에는 돋보였다. 바코드의 입구 앞에는 작은 블랙보드 하나만이 있고, 온통 까맣게 칠한 벽으로 둘러싸인 계단이 마냥 산뜻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새까만 가게 문은 닫아두기 때문에 ‘오늘 영업 안 하시나?’하는 생각에 발길을 돌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 더 용기 내어 문고리를 돌려보자. 닫혀있는 것은 맞지만, 잠겨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만약 불행하게도 그날이 월요일이나 화요일이라면 잠겨 있는 게 맞으니 다른 날을 기약하자.

 


화려한 조명… 아니 장식이 감싸는 바코드와 사장님께 추천받은 자리.
사장님의 현란한 음료 제조 과정을 가까이서 구경할 수 있는 저 자리가 바로 나의 최애 좌석이다. 

 

 일단 문을 열면 화려하지만 단정한 내부가 반겨준다. “우리는 바로 이런 곳을 바라고 부르기로 했어요.”라고 말하는 듯한 ‘바의 정석’ 같은 공간이다. 적당한 데시벨로 잔잔하게 들썩이는 재즈가 이곳과 꽤 잘 어울린다. 

 특이하게도 바코드에는 메뉴판이 없다. 그 대신, 사장님께서 일일이 손님의 취향을 물어 칵테일을 만들어주신다. 가격은 한 잔에 15000원이고, 가끔 그보다 더 값이 나가는 경우에는 미리 말씀해 주신다고 하셨다. 통장 잔고가 짤막한 대학생에게 만만한 가격은 아니지만, 먹어보면 충분히 지불할 용의가 생길 테니 사장님을 믿어보자. 만약 본인이 ‘술잘알’이라서 좋아하는 칵테일이 있다면 그것을 주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 같은 ‘술알못’이라면 사장님의 몇 가지 질문에 충실하게 답변하기만 하면 된다. 말주변이 없어도 괜찮다. 사장님은 ‘술알못’의 ‘느낌적인 느낌’까지도 찰떡같이 알아들으시는 분이니까! 그렇게 내가 사장님께 제공한 정보는 다음과 같다. 먹어본 술이라고는 소주와 맥주,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칵테일 몇 가지뿐이라는 것. 그것들은 하나같이 너무도 달아서 취향에 맞지 않았다는 것. 알코올 프리(Alcohol-Free)보다는 알코올을 프리(Free) 하게 먹는 걸 좋아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오늘은 왠지 상큼한 맛이 당긴다는 것. 이런 답변을 듣고 사장님은 바로 칵테일을 만들어주셨다. 

 


귀여운 하트 세 개와 마냥 귀엽지만은 않은 도수.

 

 첫 잔으로 ‘프렌치 김렛’을 받아들었다. 사장님께서 오늘 오후 5시에 준비하셨다는 신선한 라임즙 덕분인지 상큼한 맛이 강하면서도 술맛과 잘 어우러졌다. 계란을 섞어 낸 거품에서는 솜사탕 같은 느낌도 났다. 그런데 잠깐만, 어째 먹으면 먹을수록…. 

 

사장님, 비린내가 나는 거 같아요.

원래도 비린내에 예민하세요?

네. 아마 조금요.

조금이 아니신 것 같은데… 비린내를 느끼셨으면 그건 계란 흰자 때문이에요. 라임이 금방 날아가서 갈수록 난백 향이 나게 됐나 보네요. 드셔보신 술이 딱히 없다고 하셔서 부드럽게 넘어가게 하려고 넣은 난백이었는데. 하필이면 비린내에 예민한 분이었을 줄이야…

다음은 뭘로 하실래요?

이번엔 조금 단 게먹고 싶어요! 술맛은 약간 더 났으면 좋겠고요. 계란은 이제 싫어요! (장난)

부드럽게 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었네요. 알겠습니다.

 맞다. 나는 술맛이 많이 나는 칵테일을 좋아하고, 비린내에 민감하다. 술에 대한 식견은 짧으면서 술맛이 많이 나는 술을 좋아한다고 확신하는 것은 조금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시럽 맛만 잔뜩 나는 도수 낮은 술은 배 부를만치 먹어도 취기가 돌지 않아 농락 당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도수가 있는 술을 선호하게 되었다. 비린내는 그냥  싫어한다.   

 이런 어설픈 예민함도 바코드에서는 취향이 된다. 평소 같았다면 내 입에 소주를 두세 잔 털어넣어 비린내를 잡았겠지만 오늘은 내 입맛에 술을 맞춰보기로 했다. 이렇게 난백에 거부반응을 보인 뒤로 나는 사장님께 “Egg hater”로 불리게 되었다. ‘대체 계란은 왜 넣은 거냐’고 원망하는 듯한 눈빛이 생생하시다고… 그렇게 쳐다본 적 없다고 열심히 해명했지만 내 별명은 여전히 “Egg hater”다.

 


참고로, 바코드는 땅콩 맛집이다. 사람이 많으면 간혹 깜빡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내어달라고 말씀드리면 된다. 땅콩 요청 여부로 단골을 알아보기도 하신다고.

 


영-롱

 

 다음 칵테일로는 ‘잭 로즈’가 나왔다. 딱 한 모금 먹자마자 생각했다. ‘이거다!’ 달착한 사과향과 깔끔하고 적당히 쨍한 술맛. 뱃속에서 알코올이 화-악 퍼지는 느낌이 상쾌했다.

 

어떠세요?

맛있어요! 좀 전에 먹은 것보다 훨씬 입에 맞아요.

입이 고급이시네요. 이게 더 마진 안 남는 건데…

이거 진짜 마음에 들어요! 땅콩도 너무 맛있고요. 이게 첫끼라서 그런가…

이게 첫 끼요? 손님은 정말 저희가 찾던 인재네요.

‘인간 재앙’의 줄임말인가요? (웃음)

네… 간이랑은 아무래도 사이가 안 좋으시겠어요

장기들이랑은 두루두루 사이가 나쁜 편이에요.

저 이제 다음 잔 주세요! 도수 더 높은 거 먹어보고 싶어요!

도수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얼마나 많이 먹느냐가 중요한 거지.

지금까지 드신 것도 도수가 적진 않은데… 물론 언제나 도전은 환영입니다!

위스키는 드셔보셨어요?

아니요. 안 먹어봤지만 아무튼 좋아요!

 


뒤에 보이는 술인 Drambuie의 어원은 “Dram Buid Heach”이며, “사람을 만족시키는 음료”라고 한다.
에디터는 만족했다.

 

 세번째 잔이자 나의 첫 위스키는 ‘러스티 네일’이었다. 술에서 나는 꿀향과 나무향이 좋아서 자꾸만 잔을 굴려봤다. ‘녹슨 못’이라는 이름이 정말 잘 어울리는 맛이다. 그러니까 뭐랄까… 우리가 동전을 먹어본 적은 없지만, ‘동전맛’이라고 하면 왠지 알 것도 같은 그런 느낌이다.                                                                                                                                      

 

그런데 오늘 술이 필요한 날이셨나 봐요.

나름요.

왠지 들어오시는데 술에 대한 의지가 느껴졌어요. 

정말요? 겸사겸사 이유가 있어요. 혼자 바에 와보는 게 버킷리스트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하네요.

이거 먹고 마포대교 가시나요?

아니요. (웃음) 그렇게까지 버킷리스트는 아니에요.  위시리스트 정도로 해둘게요.

그런데 만약에 정말로 그렇다면, 사장님 부담감이 너무 크지 않으시겠어요?

그렇죠. 제가 너무 힘들겠죠. 예전에 그런 친구가 진짜 있었거든요. 그날 죽을 거라고 하더니 다행히도 벌써 오 년째 와요. 결혼도 했고요.

해피엔딩이네요.

그렇죠. 이제 강남에 건물도 있어요.

세상에… 저라면 이제 삶에 대한 의지가 넘칠 거 같은데요.

글쎄요. 그런데 제가 보기엔 삶에 대한 의지는 재산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빚으로 결정되는 거 같아요. 

 

살면서 저 술을 다 먹어 봤으면 좋겠다. 삶에 대한 의지가 충만해진다.

 

 사장님은 다른 손님을 응대하러 가시고, 위스키를 홀짝이며 술기운에 따끈해진 목덜미를 괴고 있으니 슬슬 웃음이 비죽비죽 새어 나왔다. 오늘 나에게 준 관심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장님께 받은 도움이 꽤나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비린내에 민감하다고 했지만, 누구보다 젖비린내 나는 건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잔 더 먹고 싶다고 외치는 마음의 관성은 눌러두고 이제 그만 아쉽게 일어나자. 오늘의 연습을 잘 마무리해야지.  

 

바코드를 나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만난 간판. 나 안 죽는다니까 그러네…

 

 바코드를 나서는 길, “꼭 살아남으세요!!” 하는 사장님의 웃음 섞인 외침이 내 뒤통수에 꽂혔다. ‘저 죽으러 가는 사람 아니라니까요!’라는 대꾸는 속으로 삼켰다. 집에 잘 돌아가는 것까지 성공하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귀가에 신경을 쏟아야 한다. 굳이 집에서 한 시간이나 걸리는 신촌에 온 건 바로 이걸 연습하기 위함이기도 했으니까. 15% 남짓한 휴대폰 배터리와 슬슬 술기운이 올라오는 나. 모두 살뜰히 챙겨서 집으로 돌아가 보자고.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핸드폰을 붙잡고서 가까스로 집에 도착했다. 깨끗하게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알코올로 따끈하게 데워진 몸을 뉘였다. 두툼한 이불까지 덮으니 그 포근함이 퍽 마음에 들었다. 나른하게 잠이 들기 전, ‘도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많이 먹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 떠올랐다. 일상의 언어로 바꿔본다면 ‘농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빈도가 중요하다.’ 정도일까. 오늘처럼 나에게 술 한 번 잘 대접해 주는 것도 좋지만, 삼시 세끼 ‘잘’ 챙겨먹이고, 빈속에 커피나 술 붓지 않고, 적어도 새벽 두시 전에는 잠자리에 드는 일상적인 관심과 다정이 삶을 유지하고 지탱하는 데 훨씬 중요하다는 뜻은 아닐까. 

 엄마를 속여 넘겼다고 굳게 믿던 어린아이가 거나하게 취해 집에 기어들어오는 성인으로 자라기까지는 꼬박 스무해가 걸렸다. 그리고 한 해가 더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저 성인일 뿐, 어른은 아니다. 이제 어른이 되려면 몇 해가 더 필요할까. 나는 몇 병의 술을 비워야 어른이 될까. 

 바코드에 방문했던 첫날에 내 표정이 어땠기에 삶을 응원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요즘도 멀쩡히 살아서 바코드에 곧 잘 간다. 이전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되도록이면 속을 채우고 술을 먹는다는 점과 제 정신으로 집에 들어오는 날이 조금 늘었다는 것, 그리고 바코드를 알기 전보다 통장이 더 빈곤해졌다는 것 정도이다. 일상을 잘 채우고 다듬는 일은 내게 여전히 쉽지 않은 숙제다. 술도 관심도 남들보다 조금 더 필요한 나는 꽤나 귀찮은 사람인 게 틀림없다. 그래도 이런 나 자신을 힘껏 감당하다가 가끔씩 약간의 다정을 빚지며 살아가보기로 했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어른이 되어 누군가의 머리칼을 넘겨주고 등을 두들겨 주며 그 빚을 청산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바코드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9길 26 지하1층

월, 화 휴무

수~일 18:00 – 2:00

010-9029-6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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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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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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