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 그녀의 레인트리
만약, 힘들 때 돌아가 안기고 싶은 공간이 곁에서 사라져버린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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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트리, 소나기가 오면 피해가기도 하고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으로, ‘학창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곳으로 영원히 남아있겠습니다.’
‘영원히’라… 한 치 앞도 모르는 여정에서 어디까지일지 모르는 영원을 약속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함부로 영원을 말하지 않는다.
나는 이 영원을 약속하는 ‘레인트리’ 카페 사장님이 궁금했고, 인터뷰를 하고자 전화를 걸었다. 카페의 그 메시지가 이 곳은 영원히 내 소중한 피난처로 있어줄 것이라는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었을까, 번호의 부재를 공간의 부재와 결부시킬 생각조차 못했다. 기계음으로부터 거절 당하길 몇 번, 마지막이라며 sns계정에 연결된 연락처로 전화를 걸고자 휴대폰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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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주하는 현실이 벅찰 때면 종종 이곳으로 피신을 오곤 했다. 버티기 힘든 시험기간, 따뜻한 차와 팬케이크를 시켜두고 몸집만한 인형을 끌어안은 채 같이 온 누군가와 영양가 없지만, 분명 어떤 곳으로든 영양분을 주고 있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나만의 아늑한 공간, 쏟아지는 비를 피할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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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희 근데 그 가게 내놔서요…”
“아…내놓으셨다구요?”
영원한 부재를 약속받았다. 이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내게 꽤나 큰 상실감을 남겼다. 순간 아림이 떠올랐다. 아림은 나와는 동기로, 신촌에서 자취를 하는 중이다. 가족은 전부 외국에 있는데 엎친 데 덮친 격, 기숙사 추첨에도 미끌어진 이유 때문이었다. 그녀는 힘이 들 때면 그리움을 표했고, 나는 그녀가 한국에 발 닿을 곳이 없음에 공감하며 함께 먹먹함을 느껴주곤 했다. 그녀에게도 돌아갈 곳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아림은 신촌을 돌아올 수 있는 곳으로 여기고 있을까? 나는 아림의 레인트리가 어디에 어떤 식으로 존재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녀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비가 오던 날, 카페 벨라프라하에서 그녀와 만났다.
스스로를 소개해줘.
음…나는 일단, 지금은 ‘마음을 열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어. 특히 요즘 들어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 같아. 작년의 나는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의 나를 숨기려고 했던 사람이었어. 그래서 서울에 적응 못 했다는 걸 들키기 싫어서 동기들과 교류도 많이 안하고 그랬던 것 같아. 그런데 요즘에는 사람들도 더 많이 만나서 얘기하고, 이 곳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면서 마음을 열고 있는 중이야, 여러 방면에서.
오랜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난 원래 엄청난 집순이야. 그런데 이렇게 코로나 터지고 그래서 집에 더더욱 있어야 하는 상황이 되어서… 더 잘 집에 있고자 최근에는 재난 지원금도 받아서 집 꾸미기에 열중했어. 막 자취방에 있는데 눈에 띠게 불편했던 것들(약간…저기 각도가 마음에 안 든다던가 그런 것)을 고치려고 이것저것 사는 중이야. 아 그리고 이전엔 나를 숨기고자 하니까 점점 내가 나를 부정했던 것 같아. 그런데 최근에는 여러 방면에서 마음을 열고, 못하는 것 좀 인정하고 그랬더니 나에게도 마음이 열려서 그렇게 살고 있어!
최근에 고등학생 시절을 보냈던 장유*에 갔다 왔잖아. 장유에 갔을 때 느낌은 어땠어?
장유에 갔더니 오히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이 신촌에 적응했음을 느꼈어. 예전에는 못 느꼈던 불편한 것들이 느껴졌달까. 내가 살던 집을 보니 정말 작게 느껴지기도 하고. 예전엔 나의 부족한 부분들을 외면하고 살다보니까 신경도 많이 쓰였고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알게 모르게 많이 받았었는데, 장유에 가면 편한 친구들에게 그 피곤함에서 왔던 스트레스들을 풀고 왔었던 것 같아. 그냥..짜증을 내는 식으로. 그런데 이번엔 나를 받아들이니까 마음이 안정되어서 그런지 그곳에 가서도 편하고 즐겁게 리프레쉬하고 올 수 있었어.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동
그러면 너는 거기 가니까 예전처럼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을 받았어?
응응. 내가 좋아하는 하천 옆 길에서 계절마다 듣던 노래들이 있는데 거기를 지나가니까 딱 그 생각이 났어. 아 이 날씨면 이 노래를 들으면서 애들이랑 학교 마치고 가던 때인데, 하면서. 좋았어!
신촌의 자취방은 편안하고 아늑한 너만의 공간이라는 애정 섞인 생각이 들어?
요즘엔 좀 그렇게 된 것 같아. 예전엔 물건 정리도 안 되어있고 해서 볼 때마다 짜증이 났었는데, 이젠 정리가 되어 그런지 꼭 비가 오면 집에 있고 싶어. 선선하게 문 열고 이불 덮고.
아까 계절마다 들었던 노래 얘기 했잖아, 그럼 그렇게 비가 올 때 자취방에서 이불 덮고 듣고 싶은 노래는?
카더가든의 나무.
이젠 하도 많이 먹어 질린다며 내게 건냈다.
너는 가족들이 외국에 있잖아, 사실 난 그렇게 지내본 적이 없는데 약간 유학하는 느낌일 것 같아. 돌아가고 싶을 때에도 쉽게 그럴 수 없는. 너만 홀로 신촌에 남겨지고 느낀 감정이 뭐였어? 이제 곁에는 친했던 이들도, 가족도 없고 혼자라는 걸 실감했을 때.
기억나는건 그냥, 외롭기 보단 항상 어딘가에 정착할 데 없이 붕 떠있는 느낌. 기숙사도 유일하게 살고 있는 곳이기는 하지만 우리 집은 아니었고, 한국에는 돌아갈 집도 없고. 집이 없으니까 내 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자꾸 내 짐들을 버리곤 했어. 막 친구들이 준 소중한 것들 가지고 있고 싶은데, 이모네 집에 맡기기에도 또 그 집의 짐이 될 테니까…난 맨날 짐을 최소화해야해. 계절 지난 옷이 조금 헤졌으면 그냥 버리고. 그래서 난 그냥 항상, 쥔 것 없이 내 몸만 떠있는 느낌이었어.
보고 싶지는 않아?
이것도 그냥 보고 싶은 것 보다는.. 어딘가로 돌아가고 싶은데 그럴 곳이 없다는게 보고 싶은 것보다 힘들지. 그것 때문에 보고 싶다는 생각은 많이 안하는 것 같아. 막 ‘집에 가고 싶다’ 그래도 집이 없고(웃음), 어딘가 그립긴 한데 그 그리운 장소가 없고.
너가 대학에 들어와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 신촌인 거잖아, 너에게 신촌이란?
솔직히 말해서 제 2의 고향 뭐 이런 건 안 될 것 같아. 아무리 오래 살더라도. 여긴 너무 넓고 사람도 다양하고 못 가본 곳도 너무 많고… 내가 살고 있고 앞으로의 시간도 보낼 곳은 맞지만 아직까진, 내가 컸을 때 다시 돌아와서 살고 싶을지는 모르겠어. 음 그래서 나에게 신촌이란…학교. 무슨 느낌이냐면, 약간 누가 너한테 고3 다시 할래? 하면 아니라고 대답하면서도, 돌아보면 힘들었지만 그것들도 다 좋았던 추억들로 미화가 되고 재밌었다고 기억이 되는, 그런 시기잖아. 나한테 신촌은…그런 곳. 잘 설명하고 있는지 모르겠다(웃음)
그러면 장유와 신촌을 비교하자면? 너의 마음 속 이미지로.
장유는 우거진 숲. 신촌은 비쩍 마른 나무 한 그루의 느낌? 장유에 가면 숲에 간 것 처럼 조금 일상에서 벗어나 리프레쉬가 되는데, 사실 신촌은 내 일상이라 그런지 리프레쉬가 되지는 않아서.
신촌에서 살면서 가장 좋았던 곳 혹은 추억이 많은 곳은 어디야?
좋았던 곳은 위치상 딱 신촌이 아니기는 하지만. 경의선 숲길! 사람 지나다니는거 멍 때리면서 볼 수도 있고.. 음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얘기할 때면 다 카페로 가잖아. 그런데 카페라는게 그 정도의 돈을 지불할 능력이 되는 사람들만이 올 수 있는 건데, 공원은 그런 부담 안가지고 편하게 모여서 이야기하고 그럴 수 있잖아. 그래서 얼마건 언제건 누구든 그렇게 자연을 보면서 여유롭게 있을 수 있다는 게 좋았어. 그리고 추억이 많은 곳 하니까 생각난 게 있는데, 나 처음엔 이대랑 신촌이 이렇게 가까운지 몰라서 한동안 그 거리를 지하철 타고 다녔어. (웃음)그렇게 해서 자주 가던 신촌 ‘시작 스터디 카페’도 기억이 많이 나지. 그 때는 정말 약속 시간까지 한 시간이라도 중간에 뜨면, 그 스터디카페에 앉아서 공부하고 그랬던 게 생각이 나. 모든게 서툴렀지만 그냥 잘해보고 싶어서 다 열심히 하려고 했던 기억.
그럼 마지막으로 너의 레인트리는 ‘지금’ 어디에 있어?
정말 나한테는 어려운 질문 인 것 같아 (웃음)… 지금 생각나는건, 카페 ‘주야창천.’ 그냥 신촌에 산 이후로 내가 상황 따지지 않고 거의 매일 가는 곳이야. 무인 카페라 주인도 없고 조용한 공간이라서 좋아해. 그리고 또 노래가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와. 난 시끄러운걸 싫어해서 가요 그런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여긴 지브리 영화의 클래식 버전 OST가 자주 나와. 지브리 영화도 엄청 좋아하거든. 그래서 이렇게 비오는 날 큰 창가 옆 자리에 앉아서 책 읽으면 정말 좋아.
이런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힘드네… 아 장소가 아니어도 된다면..영화 리틀 포레스트! 자연과 관련된 조용한 것 좋아해서 이걸 보면 힐링되고 그래. 그래서 자주 그 사진이나 클립 영상을 봐. 고딩 때 나를 엄청 괴롭혔던 애가 있었어. 막 걔가 내 신발을 버린 적도 있었고. 그런데 선생님은 내가 친구가 더 많다고 내가 강자니까 사과하라고 그러고. 뭐 결국 나중엔 해결됐지만.. 그 때 나는 정독실이라고 전교 20등까지 모아놓고 공부하는 공간에 매일 가서 공부를 진짜 열심히 했어. 거기가 내가 유일하게 갈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그러던 날 엄마가 야자 째고 영화 보러 가자고 한거야. 그렇게 해서 봤던 영화가 리틀 포레스트야. 그 때 나에게는 그 일이 어딘가 모르게 엄청 극적인 일이었어. 그렇게 어울림 없이 공부만 하다가 야자를 째고 본 초록색 풍경이, 뭔가 정말 머리를 정화시키는 느낌. 그래서 요즘도 조용하게 혼자 있고 싶을 때 보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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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트리, 당장 내리는 비를 피할 수 있는 나무여야만 그 이름값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지금 바로 달려가야 하는데 물리적 공간이 없다고 해서 정말 내가 위로받을 공간이 사라지는 걸까.
레인트리를 물었는데 본인의 이야기를 쏟아내는 그녀를 보며 나는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신촌에서 공허함을 느꼈던 아림도 자신의 취향에 맞는 공간을 찾았고, 그녀가 어디를 가든 아름다웠던 추억 속에 잠겨 잠시동안의 따뜻함을 줄 수 있는 영화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성격, 취향과 맞는 것 안에 있으면 그게 무엇이든 행복감을 느끼고, 밖에서 오는 소나기는 잠시 잊혀진다. 결국 내가 나를 더 생각해주고 알게되는 것, 그게 레인트리의 뿌리다. 그것만 있다면 레인트리는 언제든 다시 자라날 수 있다.
만약, 힘들 때 돌아가 안기고 싶은 공간이 사라져 버린다면… 아니 그런 것처럼 보인다면, 내 레인트리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지 들여다보자. 레인트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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