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 김하민
덥고 습한 오후였다. 콧잔등 위로 땀이 송골송골 내려앉았다. 신촌역 버스정류장에 내려 유플렉스 쪽으로 걸어가자, 코로나가 무색할 정도로 신촌 거리는 마스크를 낀 채 활보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화장품가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블랙핑크 신곡, 빨간잠망경 앞 늘어선 스파의류 매대, 빨간 유니폼을 입고 잠깐만 스티커를 붙여달라는 KT 직원들. 전형적인 여름 신촌이었다.
방학을 이용해 팀원 누군가를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는 오늘의 기회가 나는 조금 설렜다. 아마 뒤풀이에 참여하지 않아 잔치 팀원들과 얘기를 많이 나눠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탓일지 모른다.
약속시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창천교회 부근 한 카페를 찾았다. 그런데 웬일인가, 이층에 올라갔더니 벽면 구석자리에 익숙한 옆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저 혹시 김하민 씨 아니세요?”
“어 네 안녕하세요..!”
신촌에 많고 많은 카페들 중 우연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긴가 민가 했는데. 본인이 자주 오는 카페고, 오늘도 몇 시간 전부터 와 있었다고 했다. 나는 아이스커피를 주문한 뒤 계절수업 과제를 했고 그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을 마저 읽었다. 약속한 일곱 시가 되었고, 나는 여러 번 마주쳤으나 한 번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사람과의 인터뷰를 시작했다.

하민, 바녕, 잔치 2020-1 신입부원.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소개 해주실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바녕’이라는 에디터명으로 활동을 시작한 김하민 이라고 합니다!
‘바녕’의 뜻을 잠깐 설명드릴게요. 제 본명이 물 하(河)에 하늘 민(旻)인데, 물에 비친 하늘이라는 뜻으로 부모님이 지어주셨어요. 그 이미지에 꽂혀서 reflect라는 단어를 인스타그램 아이디에도 넣어 쓰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폼나는 것 같아 쓰기 시작했는데 실제로 무언가가 물에 비치는 이미지를 실제로 카메라로 담기 위해 먼저 감상하고 관찰하는 과정에서 반영이라는 작용 자체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어요. 대상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비치는 물의 현재 상태와 특성에 따라 왜곡되어 나타나는 작용이 좋아서요. 세상의 많은 현상들이 그런 식으로 보여지니까요. 무엇을 판단하는 과정에서도 항상 나의 시점이 들어가고, 대상은 비치는 것일 뿐이고.
사실 ‘반영’이라는 한자어가 좀 딱딱한 것 같아서 연음으로 풀어 ‘바녕’이라고 써 보았는데 조금은 후회 중입니다… 너무 귀여워 보이려하나?
노리신 거 아닌가요? (웃음)
이번 봄학기가 에디터 바녕님 전역 후 첫 학기라고 들었어요. 오랜만에 돌아 온 학교는 어땠는가요?
맞아요, 이번 3월에 전역을 해서 칼복학했습니다. 아 정말 폭풍 같은 한 학기가 지나갔어요. 원래는 언론홍보영상학부 전공인데 이번에 사학과 수업을 몇 개 들으면서 새로운 학문을 접하기도 했고요. 제가 생각했던 사학과 수업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다 느꼈어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해 내 의견도 마음껏 개진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정해진 과거의 사실에 머무르는 경향을 좀 느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좀 답답하다는 생각도 들면서, 내 생각이 너무 붕 떠있었나 싶기도 하고. 여러 생각이 듭니다.
온라인 수업의 영향도 있어서 더 그랬을 것 같아요.
바빴던 한 학기가 끝나고, 방학은 여유 있게 보내고 계신가요?
한량처럼 지내고 있습니다(웃음). 정신없는 한 학기가 끝나니 여유롭고 살고 싶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하긴 해야 되니까 계획을 많이 세워 놓긴 했습니다. 옛날에 시작했던 중국어 공부도 다시 하고 있고, 포토샵도 만져보고 있습니다. 블로그도 만들어 글을 꾸준히 써보려 노력 중인데 생각보다 쉽지는 않네요. 그리고 모아 놓은 돈이 다 떨어져서 아르바이트 자리도 찾아보는 중입니다.
참 며칠 전에는 일박 이일동안 경북 여행을 다녀 왔어요. ‘김칠구 사진 공모전*’에도 응모해 볼 겸, 색다른 풍경도 카메라로 담아볼 겸이요. 사진 찍는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 좋아했는데, 작년부터는 할아버지 집에 50년간 묵혀 있던 필름카메라를 다루기 시작하며 필름사진에도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코로나 영향으로 필름 구하기가 어렵기도 하고, 비용도 부담이 돼서 얼마 전에는 DSLR카메라를 새로 장만했어요. 틈틈이 들고 다니며 찍고 있습니다!
*김칠구 사진 공모전 : 김천, 칠곡, 구미 3지역에서 공동개최한 여행사진 공모전.
경북 여행 당시 숙소에서 나와 찍은 구미의 아침풍경.
바녕님이 잔치에 올려주신 글들에서도 사진들 많이 보았어요. 특히 신촌 밤거리 담은 필름 사진들이 제겐 너무 예뻤어요. 주로 어떤 사진을 찍으시나요?
풍경사진을 많이 찍는 것 같아요. 인물사진도 찍어보고 싶긴 한데 다들 반응이 안 좋더라고요…(머쓱) 어떤 각도로 찍었을 때 예쁘게 나오는 지도 전혀 모르고, 인물도 풍경과 비슷하게 찍어버려서요.
이번 여행에서도, 제가 다녀온 곳이 볼 것 많은 여행지는 아니었지만 낙동강만큼은 참 좋았어요. 한강이랑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거든요. 한강은 사람도 많고, 음악소리도 크고, 많이 분주하잖아요. 그런데 낙동강은 인적 드문 시골의 고요한 분위기였어요. 주변에 있는 것이라곤 울창하게 자라난 나무들뿐이고, 서울에선 볼 수 없는 제 몸집보다 큰 철새들이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다니고. 특별한 목적지 없이 오후 내내 강변을 따라 걸었는데, 적막 속에 저만 혼자 있는 기분이 들었어요.
한 가지 고민이 있다면, 제가 평소에도 길바닥에 널려 있는 평범한 것들을 찍기 좋아하는 스타일이라 공모전에 낼 사진은 아직 못 정했습니다. 왠지 그 지역 랜드마크 같은 사진을 제출해야 할 것 같아서…

새로 산 DSLR로 찍은 사진. 주로 풍경을 많이 찍는다.
바녕님이 보여주신 사진들도 충분히 좋은 걸요 :) 사진 속에서도 시골 특유의 평화로움이 느껴져요.
이제 잔치에 대한 얘기를 해보려는데, 혹시 어떤 계기로 잔치에 지원하게 됐나요?
예전부터 ‘잔치’라는 웹진에 대해 많이 들었어요. 주변 지인들도 많이 참여했던 웹진이고요. 평소에 글 쓰는 것과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전부터 해야지, 해야지 생각만 하다가 이번에 전역하고서 드디어 지원했습니다! 원래는 플레이스팀을 지원했지만 아트팀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처음 지원서에 썼던 글도 엄청 아트스러운 글이었던 것 같아요…(수줍)
신촌에 대한 애정도 한몫했고요. 사실 저는 완전 신촌 토박이였거든요. 태어난 곳도 세브란스 병원이고, 서대문우체국 근처, 북아현동, 연희동 등 항상 신촌 부근에서 살다가 지난 겨울에 처음으로 일산으로 이사 가며 신촌을 벗어났어요. 저한테 신촌은 너무도 당연한 공간이었던 것 같아요, 워낙 오래 살았으니. 동기들이 신촌에 맛집 알려달라 해도 저는 막상 잘 몰라서 핀잔도 여러 번 듣고. 예전엔 솔직히 좀 지긋지긋하기도 해서, 약속장소를 정할 때 일부러 신촌 말고 연남동에서 만나자고 할 때도 있었어 요. 그러다 이번에 일산으로 이사 가면서 신촌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느꼈습니다. 우연한 일치인지, 신촌에게 고향을 향한 그리움 같은 애정을 딱 느끼던 찰나에 잔치에 지원한 것 같아요.
잔치활동을 하면서 즐거웠던 점은 어떤 것들인가요?
저는 일단 제가 쓰고 싶은 글을 쓴다는 것이 가장 좋았어요. 학기 중에는 딱딱한 보고서들만 제출하다가 잔치에서는 제가 하고 싶은 말들을 글로 풀어내니까 좀 홀가분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제가 군생활 시절부터 이런저런 생각들을 기록해 온 수첩이 있는데, 혼자서 자유롭게 쓸 때는 진도가 잘 안 나갔어요. 그런데 ‘잔치’라는 플랫폼에는 틀이 정해져 있고 데드라인도 있다 보니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술술 나오는 느낌을 받았어요. 사실 두 번째 글 ‘수조’를 쓸 시점에는 보고서 네다섯 개가 밀렸던지라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막상 쓰기 시작하니까 금방 풀어낼 수 있더라고요.
사진에도 주제의식이 좀 생긴 것 같아요. 평소에는 사진을 다소 막연하게 찍었다면, 글을 생각하고 찍다 보니 어떤 방향성이 잡히고, 사진 한 장 한 장 속에 이야기가 담기면서 보다 풍성해졌다고 느껴집니다. 그만큼 애정도 생겼고요. 사실 평소에는 사진 인화를 잘 하지 않는데 ‘수조’에 사용한 흑백사진들은 인화해서 제 방 벽에 붙여두기까지 했습니다.
내가 쓴 글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는 것도 감사한 일 같아요. 제 글이나 사진들을 SNS에 올려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기 어렵잖아요. 내 만족에만 기대어 쓰는 것 같고. 그런데 잔치에서 쓴 글은 팀원 분들의 실질적인 피드백이나 공감을 받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앞으로 글을 쓰게 될 때도 미래를 위한 소중한 발판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만 뭐니뭐니 해도 가장 재미있던 것은 뒤풀이입니다. 이번 학기에 한 대여섯 번은 한 것 같은데,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다 보니 술도 한 잔씩 하면서 얘기를 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신촌 술집 ‘피망과 토마토’에서 고양이를 관찰하는 하민.
항상 좋아하는 것들 앞에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보고만 있는다고 한다. 동물이든 사람이든.
여담이지만, 술은 누가 제일 잘 드시나요?
전체적으로 다들 잘 드시던데요?(웃음)
뒤풀이 분위기가 어땠을지 너무 궁금해요…(쥬륵)
바녕님은 요즘 주로 어떤 생각이나 고민들을 안고 있나요?
저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앞만 보고 가지 않고 중간중간 멈춰 설 여유를 갖고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런 여유를 갖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게 요즘 자꾸 실감 나서 슬픕니다. 다들 제 살 길 찾아서 뭔가를 하는 것 같고, 뉴스를 봐도 세상은 나와 무관하게라도 정신없이 돌아가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내가 이 사회에 나가 홀로 서는 순간 나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고민이 앞서기도 합니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컨텐츠를 만들고는 있지만 내가 만족한다 해도 사람들이 이걸 보고 좋아하지 않으면 결국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현실적인 회의감도 들고요.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싶진 않은데 우물 밖으로 나가려면 돈이 있어야 되고(웃음).

당일치기 태안 여행. 바다를 배경으로 신발(?)을 찍는 중이다.
우물 밖은 어떤 세계인가요?
우리나라를 벗어나 더 넓은 세계요. 사실은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스무 살 이후 일본과 홍콩을 혼자 여행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 때 스스로 느꼈어요. 나는 진짜 여행할 팔자구나.
먼 곳으로 떠나 한국에선 접할 수 없는 웅장한 자연풍경을 보고 싶어요. 북유럽, 특히 오로라가 아름다운 아이슬란드나 눈 내리는 침엽수원이 끝도 없이 펼쳐진 노르웨이에 가보고 싶습니다. 지평선이 보이는 사하라 사막이라든지, 존재를 압도하는 대륙빙하같은 오지도 궁급합니다. 그러려면 미리 여행경비를 쌓아야 할 것 같은데, 그러기 위해선 괜찮은 직장을 가져야 하고, 막상 그렇게 고정수입이 생긴다면 내가 그 안정적인 삶을 두고 세계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의뭉스럽기도 합니다.
이번 잔치활동을 포함해서 앞으로 목표 같은 것이 있나요? 막연한 것이라도 좋아요 :)
음 일단 글 깔끔하게 쓰는 것이요(웃음). 제가 제일 하고 싶으면서도 어려워하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어떤 직업을 갖든 여유를 놓치지 않으며 살고 싶습니다. 가끔은 길을 걷다 바닥에 있는 풀도 들여다보고, 고개 들어 하늘도 바라보고요. 블로그 글도 꾸준히 써서 올해 안에 50개를 업로드…너무 적나요? (다혜 : 그것도 엄청 많지 않나요?) 아무튼 꾸준히 기록을 남기고 싶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다른 온갖 것들이 있긴 한데 그게 뭔지 막상 말로 설명하려니 어려워요. 사실 목표를 잡는 순간 저는 이미 무언가를 놓쳐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살아가는 대로 살고 싶은데, 목표를 정하면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내 삶에 틀이 생길까봐서요.
*
추신 : 올해가 가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 그런 것들을 생각해본 적이 많지 않은데 말씀해주신 대로 고민해봐야겠어요. 오늘 집 가는 버스 안에서요. 빠르게 멀어지는 바깥 풍경 보면서 음악도 듣고, 생각도 정리하고요. 집이 멀어도 신촌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좋은 이유가 그 때문인가봐요.

사진 찍히는 것이 어색하다는 하민의 몇 없는 정면사진. 한강둔치에 앉아 활짝 웃고 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이야기를 남겨주세요.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