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TO ZANCHI! · 신촌을 사랑하고, 추억하고,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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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2020 · 11 · 02

반짝이는 마음

Editor 조각

 

 

모바일 서재 서비스 콘텐츠를 발행하는 직장인 은희는 업무에서나 대인관계에서나 자신의 최대한을 발휘하지 못해 괴로움을 마주할 때면 늘 아무 서점에 들어가 젊은 여성 작가들이 펴낸 이 달의 공상과학소설을 사 모으는 버릇이 있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전자책을 읽어줬으면 하는 직업병을 가지게 된 반면, 정작 본인은 전자 단말기로는 느낄 수 없는 종이자락의 감촉과 삽사름한 냄새, 그리고 종이가 주는 용기를 사랑해서 종이책만을 집어 들었다. 그가 생각하는 용기란 지하철에서 스마트폰 대신 책을 꺼내 그 페이지를 사락- 하고 넘기는 것, 감탄할 만한 풍경 앞에서 스마트폰 대신 필름카메라를 꺼내 셔터 단추를 찰칵-하고 누르는 것 등을 의미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은희는 퇴근길에 급하게 두르고 나온 벽돌색 머플러의 맵시를 다시 한 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얕은 숨을 고르고는,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소설책 한 권을 마저 읽기 위해 펼쳐 들었다. 그가 젊은 여성 작가들의 책을 주로 읽은 것은, 그와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들이 꾸고 있는 꿈에 잠시나마 동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세상에선 현실과는 조금 다른 모양의 저울질이 이뤄졌는데, 생명이 돈보다 무거웠고, 나무가 종이보다 무거웠다. 반짝이는 활자로 가득 찬 종이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매만지고 있자면 은희는 왠지 그의 몸에 활자의 반짝가루가 옮겨붙은 듯한 기분에, 자신이 아주 어릴 적에 만들어낸 특별한 고래 한 마리를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었다. 노을을 가르며 유영하는 고래였다.

 

 

 

 

고래란 원래 한 세기가 넘는 시간을 살아내며 오대양을 거느리는 고고한 생물이지만, 은희는 자신의 고래만큼은 고고해지지 않았으면 했다. 지금의 바다는 공상과학소설 속 가치의 저울질이 통용되지 않는 세계니까, 돈이 생명보다 무겁게 쳐지니까, 죽은 것들의 부유가 살아있는 것들을 고통에 시달리게 하기 때문에 그랬다. 당장 그 고고한 생물을 덮칠지도 모를, 어쩌면 지금 덮치고 있을 그물이, 페트병이, 각종 스티로폼과 유출된 기름이 생각날 때면 은희는 평생 고래를 바다로 보낼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에 불안해했다. 이게 고래를 향한 안쓰러움인지, 지금 일이 안 풀리는 스스로를 향한 답답함인지 구별을 못 하겠어 은희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 다시 활자한테로 초점을 맞췄다.

 

 

‘나는 고래의 기분을 알아. 자기 몸 안에 쓰레기가 그득 들어찼을 때의 아픈 느낌을 안다고 나는.’

 

 

고래를 핑계로 이 세계의 돌아가는 꼴을 걱정하고 있던 은희는 그 작은 체구에서 생겨난다고는 상상도 못 할 정도의 거대한 고민들을 품고 있었다. 물론 그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고민들이 대다수였으며 그 상념들은 안 그래도 낡고 지친 은희의 속을 조금씩 약올리듯 갉아먹었다. 은희는 종종 산다는 것은 지겹고 미안한 일이구나 싶었다. 은희도 얼른 저 작가들처럼 몸 곳곳에 이상과 꿈을 처발라 반짝이고 싶었으나, 매순간 그의 바짓단을 붙잡고 늘어지는 고민들을 외면할 수 없어 피곤했다.

 

내가 다녔던 학교에도 고래가 떠다니면 참 예쁘겠다, 하고 생각했던 은희는 그 길로 무작정 지하철을 내렸다. 퇴근 시간 지하철의 인산인해는 늘 부담스럽고, 때마침 그가 탄 외선순환열차가 신촌에 정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적당히 산뜻한 온기로 일렁이는 이 곳은 은희가 당장 내일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얻어가기에 참 적당한 곳이었다. 신촌에 있던 은희의 캠퍼스는 공동체가 주는 집단의식과 소속감을 좋아하지 않는 은희가 소속됨에 안정을 느꼈던 유일한 집단이었고, 1 더하기 1이 4가 되고, 5가 되는 소중한 순간의 기쁨을 알려주던 곳이었다. 산술 공식 따위는 가볍게 넘겨버리는 사람들 사이의 교류가 그리웠다. 정확히는 그 과정 속에서 새로 생겨나는 +2, 3만큼의 가능성들이 눈물나게 그리웠다.

 

 

 

 

추억은 늘 작은 것에 묻어 있지, 그래서 추억은 소중한 것이라고 중얼거리던 은희의 발걸음은 본 적 없던 새로운 건물을 맞닥뜨림과 동시에 멈추었다. 이 낯선 건물은 꽤 높고 그 너비가 넓었으며 고래의 입을 닮은 듯한 깊고 둥그런 입구는 사실 고래의 입을 직접 본 적 없는 은희에게 다소 압도적인 기운을 풍겼다. 몇 해 전 은희가 학부생이었을 때, 서대문구가 도시재생활성화사업의 대상 지역으로 선정되었다는 인터넷 기사를 본 적이 있었는데 이 고래를 닮은 건물이 그 사업의 일환으로 축조되었으며 이름까지 ‘파랑고래’라는 사실이 조금 놀라웠다. 지금보다 조금 덜 지치고 더 용감했던 학부생 은희는 서대문구가 저물고 있던 도시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서울에서 가장 짙은 젊음과 학구열로 붐비는 이 도시의 이면에는 동네 주민들과 상인들의 외침이 존재했다는 점은, 은희로 하여금 등불 주변에 깔린 어두움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이럴 때일수록 빛에 기름을 붓기보단 어두움에 먼저 집중하는 사회가 멋진 사회 아니겠냐고 동기들에게 실없는 소리도 해댔었다.

 

비록 ‘주장’보단 ‘내뱉음’에 지나지 않는 문장이었지만 은희는 지금까지 그 어두움에 귀 기울이려 나름의 노력을 기하고 살아왔다. 팀원들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일 것을 예상했음에도 끝까지 이 사회의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콘텐츠가 나와야 하는 이유를 피피티 자료로 제작해 발표했고, 중장년 세대의 디지털 소외감을 그가 해결해야 하는 1순위의 문제로 삼아온지 오래되었다. 아직까지 답은 못 찾았지만. 그래서 신촌도 조금은 헤매더라도 현명한 답을 찾아 움직였으면, 하고 내심 바랐던 은희는 이 건물 앞에서 허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등불에 부은 기름 같았기 때문이다. 환한 빛이었다, 너무도 환한 빛이었다.

 

그래, 반짝거리니까 멋지긴 하네, 하고 돌아가려던 은희에게 어떤 여자가 말을 걸었다.

 

“그림 그려주고 가세요.”, 그 사람은 이렇게 얘기했다.

 

“네?”

 

“그림 그려주고 가세요. 지금 전시 중이에요. 여기 파랑고래 입구 계단에 놓인 물건들은 모두 사람들이 사용하다 내놓은 물건들인데요. 작은 그림을 한 장 그려서 주시면 그 그림과 원하시는 물건 하나를 바꿔드려요.”

 

“그렇군요.”,

 

그림 한 장 그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 추억이 담긴 물건을 가져오기 위해선 자신의 추억 한 조각도 건네야 한다고 생각한 은희는 자신의 친구를 그린 종이를 그 여자에게 다시 건넸다. 멋진 친구네요, 여성은 옅지만 진심이 담긴 감탄으로 대답했다.

 

“그리신 그림 잘 받겠습니다. 가져가고 싶으신 물건의 자리에 그 그림을 올려두시면 돼요. 즐거웠습니다.”

 

 

 

 

은희는 몇 층의 계단 위로 가지런히 나열된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에코백, 텀블러, 책, 음반CD, 반려동물케이지, 다분히 개인적인 물건들의 정렬이었다. 개중엔 금전적 값어치가 충분해 보이는 물건들도 몇몇 있었는데 그것들을 돈이 아닌 누군가의 추억과 바꾸고 싶었던 사람들의 마음은 너무 넓어서 다 헤아리지 못할 듯했다. 이런 얘기는 은희가 지하철에서 즐겨 읽던 공상과학소설에서나 봤던 이야긴데, 돈보다 추억이, 시간이, 삶이 무겁게 쳐지는 저울질은 공상세계에서 일어나는 것보다 현실에서 일어날 때 훨씬 아름다워지는 일이라고 은희는 생각했다.

 

이 고래가 누군가의 어둠을 치워줄 수도 있겠다, 하며 살짝 안도한 그는 자신의 책이 충분히 들어갈 만한 크기의 무지 에코백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마침 필요했지만 사길 망설였는데 잘 되었다고, 에코백을 내놓고, 가져가는 사람들은 서로의 이름을 몰라도 나 아닌 다른 생명을 생각하는 마음 하나로 끈끈히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큰 고래에게서 작은 추억 하나를 챙긴 은희는 어제보다 더 차가워진 밤공기를 맡으며 역시 추억은 작은 것에서 오지, 속으로 되뇌였다. 몸에 반짝가루를 가득 묻힌 은희는 조금은 더 가벼워진 걸음으로 다시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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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잔치의 시선으로 신촌의 장면과 사람, 장소를 기록합니다.

COMMENTS

댓글 2

  1. 블라디보스톡
    블라디보스톡 2020.11.03 16:13

    조각님의 글은 정말.. 한 줄 한 줄에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계속 다시 읽으면서 그 의미를 곱씹어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당. 마지막에 그림과 물건을 바꾸는 그 상황은 진짜인건가요? 아니면 조각님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 인가요? 정말 파랑고래 앞에서 저런 행사가 있었다면 꽤나 흥미로울것 같아요. 잘 읽었습니다!

  2. 반짝이는 나날들
    반짝이는 나날들 2020.11.20 10:33

    반짝이는 글 잘 읽었습니다. 참 좋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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