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TO ZANCHI! · 신촌을 사랑하고, 추억하고,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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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2020 · 11 · 25

146. 바틸트

Editor 모지

 

마드라스

오랜만에 만난 두 친구는 얼굴에 반가움이 묻어난다. 한 명은 자기가 근사한 곳을 알고 있다며 자연스럽게 친구의 손을 잡고 신촌의 어느 골목으로 들어간다. 밤의 신촌은 파랗고 노랗고 빨간 간판과 화려한 조명으로 뒤덮여 있다. 신촌이 낯선 이는 친구의 손을 꼭 잡고 여기가 거기인 것 같고, 거기가 여긴 것 같은 골목을 구경한다. 친구는 번쩍거리는 골목 한가운데에 위치한 어느 상가 앞에서 멈칫하더니 꼭잡은 손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간다. 복잡한 신촌의 거리와 달리 고요하고 어두컴컴한 2층, 커다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지금까지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그들이 도착한 칵테일 바는 크렌베리 주스, 오렌지 주스와 보드카를 섞은 마드라스와 닮았다. 투명한 술병과 그 안에 담긴 알록달록한 술, 은은한 조명이 어우러진 가게는 다홍빛깔의 술처럼 따뜻하다. 

오랜만에 만난 두 친구는 서로 마주보는 시간이 달콤하다고 생각한다. 과일 주스가 섞인 칵테일의 달콤함 때문인지, 그동안 치여왔던 일상에서 벗어났기 때문인지 평소라면 시시했을지 모르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그들의 대화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김렛

두 친구는 이야기 주머니를 하나 둘 꺼내다가 먼 옛날의 기억과 마주친다. 초등학생 때 싸웠던 기억, 시험을 망친 기억, 첫사랑과 헤어진 기억, 여행갔던 기억들. 생생하게 기억나는 듯 하지만, 정확한 기억을 되살리려고 할수록 기억은 술래잡기라도 하는 듯 과거의 어딘가로 숨어버린다. 

갑자기 한숨이 나온다. 내일의 일상이 기다리고 있는 탓이다. 두 친구가 함께하는 시간도 언젠가 끝이 날 테고, 오늘의 기억은 과거의 어느 자락으로 잊혀진 채, 감흥없는 일상에 젖게 될 것이다. 

김렛을 마신 두 친구는 상큼한 첫맛과 달리 시큼한 라임이 아려오는 뒷맛에 깜짝 놀라 눈쌀이 찌푸려진다. 달콤한 시간 속에서도 불쑥 불쑥 일상의 고민이 스치는 것처럼 도무지 안심할 수 없는 맛이다. 순간의 행복에 안도하지 말라는 듯 갑자기 가게 안에서 핸드폰 알림음이 한꺼번에 울린다. 화들짝 놀란 손님들은 그들의 핸드폰을 확인한다. 

긴급재난문자

[서대문구청] XXX번 확진자 발생. 

 

 

 

올드 패션드

계속해서 바빴던 사장님은 마지막 주문이었던 칵테일을 완성하자 잠시 숨을 돌릴 여유가 생긴다. 군데군데 손님이 찬 가게 안은 여러 대화가 섞여 활기를 띤다. 시간을 확인하니 시계바늘은 여덟 시에 다다르고 있다. 지난 달에 비하면 손님이 많이 늘었지만 작년에 비하면 가게 안은 턱없이 쓸쓸하다. 갑자기 여기저기서 울린 핸드폰 알림음을 듣자마자 그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진다. 그는 말없이 블렌더를 닦는다. 

이 자리를 지킨지가 벌써 십 년인데, 십 년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올해만큼 고달픈 적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위스키를 한 잔 따르려다가 생각을 바꾸고 올드 패션드 한 잔을 만든다. 정교한 잔에 담긴 갈색 빛의 술을 한 모금 삼키자 씁쓸한 위스키의 맛과 향이 입안에 퍼진다.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타는 듯한 감각이 술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다. 

바 테이블에 앉은 손님 한 명이 위스키 추천을 부탁드리자 그는 정성껏 여러 개의 위스키를 꺼낸다. 다섯 병 가량의 위스키의 이름과 맛, 특징을 상세히 설명하는 그의 얼굴엔 즐거움이 가득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선 앞으로에 대한 걱정이 그를 괴롭힌다. 

 

 

 

그래스호퍼

벽 한 면을 빼곡히 채운 술병들, 갈색 빛이 도는 술과 나무 결이 살아있는 테이블은 전체적으로 은은한 분위기를 풍긴다. 바틸트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의 저녁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따금씩 그들의 얼굴에는 마음 속에 품은 걱정으로 그늘이 진다. 모처럼 즐기는 여유인 만큼 잠시라도 모든 짐을 내려놓고 싶은데 불쑥불쑥 떠오르는 일상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힘든 모양이다.

바 테이블에 앉아있던 손님은 주문한 그래스호퍼가 나오자 예쁘다고 감탄한다. 연한 파스텔 민트색의 음료 위에 올려진 민트 잎과 빨간 꽃잎은 크리스마스처럼 따뜻한 인상을 자아내고, 몽글몽글할 것 같은 겉모습은 부드러운 식감을 기대하게 한다. 한 모금 삼키자 기대했던 대로 부드러운 생크림이 입안을 감싸고 민트 초코 맛과 향이 맴돈다. 손님은 술을 반쯤 비우고 사장님이 꺼내준 술병을 하나씩 살펴본다. 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상표가 하나 둘씩 눈에 들어온다. 

문뜩 아까 만났던 친구들 얼굴이 떠오르고 저만 혼자 뒤쳐졌다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벌써 저만치 앞선 친구들을 보니 나도 빨리 뒤따라가야할 것 같은데 어디를 가야하는 건지, 어떻게 해야하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중얼거려 본다. 울적함을 잊기 위해서 눈 앞에 있는 술을 입안에 털어넣는다. 달콤한 맛과 부드러운 거품, 술의 향을 느끼자 손님은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다. 따스한 분위기의 술집과 부드러운 칵테일에게서 위로를 받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하이볼

이런 저런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두 친구는 벌써 열 시가 지난 시각을 보고 깜짝 놀란다. 부쩍 일러진 막차 시간 때문에 슬슬 자리를 뜰 준비를 해야하는 것이다. 아직 한 시간 가량 여유가 있으니까 막잔으로 하나 더 시킬까? 하고 한 명이 묻자, 다른 한 명은 좋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마지막 잔으로 어떤 칵테일을 고를까 고민하는 두 친구를 멀리서 지켜보던 사장님은 언제 자연스럽게 대화에 낄 수 있을까 망설인다. 그는 자신이 추천해준 칵테일을 맛있게  마시는 사람들을 보며 힘을 얻는 까닭이다. 마침내 친구 한 명과 사장님 시선이 부딪힌다. 친구는 수줍어하며 적당히 술 맛이 나면서도, 달거나, 느끼하지 않고, 청량하게 먹을 수 있는 술로 어떤게 좋을까요?,라고 묻는다. 사장님은 한참을 생각에 잠기더니 그럴 때는 역시 하이볼만한 게 없지요, 하고 털털 웃는다. 

그렇게 짙은 냄새와 함께 마지막 하이볼이 도착한다. 

꽤 무거운 향과 함께 올라오는 씁쓸한 위스키의 맛은 한 발짝 뒤에 올라오는 탄산수 덕분에 깔끔해진다. 한 모금, 두 모금 마시면 마실수록 적당히 취기가 올라오고 괜히 눈 앞에 있는 친구가 사랑스러워 보인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 만났던 우리가 언제 이렇게 커버렸나 싶기도 하고, 무거운 일상의 굴레 속에서 힘들게 만나준 친구가 고맙기도 하고. 쓴맛 뒤에도 청량함이 찾아오는 하이볼처럼 왠지 내일도 오늘처럼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에라 모르겠다. 미리 걱정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잖아, 안그래? 오늘 너랑 이야기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 여기 너무 좋다. 따뜻하고 아늑하고. 다음에 또 만나자. 언제? 조만간. 

대화가 이어질수록 술은 줄어들고 줄어들다가 어느새 술잔에는 네모난 얼음만 남아있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두 친구는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채비를 한다. 

안녕히 가십시오.  

사장님의 인사와 다음에 또 오겠다는 그들의 인사를 남기고 두 친구는 커다란 문을 연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에 스친다. 이제는 정말로 일상으로 돌아갈 때이다.

 

[바틸트]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11길 27

매일 19:30~02:00

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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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지

잔치의 시선으로 신촌의 장면과 사람, 장소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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