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로실링
1.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으리으리한 집이나, 자가용의 운전석일수도 있다. 또한 유년시절 괜히 들어가 나를 발견해주길 바랐던 할머니의 장롱이나, 시험이 끝나고 뻑적지근한 몸을 드디어 눕힐 수 있게 됐을 때의 침실일 수도 있다. 특히 요즘같이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는 시기엔 아늑하고 적당한 공간이 간절하다. 아, 가을아!
2.
필자는 최근 유래없이 바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남들과 비교하면 견딜 만한 일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학업을 마무리하고, 새 출발을 준비해야하는 이 시기에 잔일들을 벌려 놓았다. 그 덕에 먹고대학생(명사. 직업 없이 놀고 있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출처 : 네이버 사전) 으로 보냈던 지난 3년에 비하면 여의도 증권맨과 같은 시간으로 살고 있다. 하루가, 일주일이 이렇게도 빠르게 갈 수도 있다는 걸 새삼 느끼는 날들이다.
그래서인지 우리 집, 나의 방을 느낄만한 여유가 확 줄어버렸다. 그럴 시간이 없는 것과 더불어 공간의 목적 자체가 변했다. 이미 나의 방은 휴식의 공간이 아닌 일의 공간이다. 과제를 하든, 외부 활동 준비를 하든 무언가를 하고 있다. ‘제대로 하고 있나’를 따지기에 앞서 ‘일단 해치우고 보자’는 마음이 앞선다. 그런 나를 닮은 방의 구석구석에는 분주함의 흔적이 묻어있다. 골머리를 썩고 있는 처지에 며칠 째 청소도 못한 어질러진 방을 보면 더욱 심란해진다. ‘아, 방도 치워야 하는데.’ 방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여긴 나몰라라하고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다.
3.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필자는 곧 학교를 떠난다. 원체 잔정이 없는 성격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졸업을 앞둔 심정이 나쁘지만은 않다. 오히려 좋은 쪽에 속한다. 너무 오랫동안 채점받기 위한 삶을 살아서인지도 모른다. 특히 필자같이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대학가는 과분한 곳이었다. 필자가 속한 대학과 신촌 등지는 지나치게 광대한데, 넓은 학교 부지는 이따금 고등학교 친구들이 놀러왔을 때, 내 것도 아닌데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했다. 백양로를 중심으로 탁 트인 경치가 좋다는 말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이 넓은 곳에서 내 자리는 어딜까
출처 : TFurban(Flickr)
다 맞는 말이겠지. 하지만 그렇게 커다란 만큼 내가 이 곳에 속한다는 감상을 받기는 쉽지 않았다. 흔히 아지트로 삼게되는 과방이나 동아리방도 없었다. 아니, 동아리방이 딸린 동아리에서 활동을 한 적은 있다. 다만 당시 필자의 감정이 어수선하고 괜스레 동아리원들과의 거리감을 느껴 그것을 누리지 못하였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중앙도서관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아지트로서 부적합하다. 큰 거는 둘째치고, 생면부지의 남들과 공유해야한다는 것은 아주 큰 결격사유 아니겠는가.
개인의 정서, 공간의 구조적 측면 모두에서 학교와의 궁합은 그리 좋지 못하였다. 허한 마음에 학교 밖, 신촌으로 눈길을 돌렸던 적도 있다. 그러나 후보군이 너무 많은 탓에 항상 어디를 가야할 지 고민에 빠졌었다. 게다가 그 젊음의 화려함이란. ‘내 눈의 밝기 조절이 가능했다면’이란 상상을 하게 만든 신촌 거리의 번쩍거림은 마치 필자가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뿜어냈다. 그러다 재작년 중순 쯤에 친구의 인도로 알게 된 곳이 떠올랐다.
제대 후, 동기들을 오랜만에 만났던 곳이며 ‘신촌에도 이런 곳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로실링이 그곳이다. 지하에 4개 정도 되는 테이블, 노출콘크리트의 내부 구조 그리고 살짝 어두운 조명은 남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이지만 순식간에 ‘내 거’라고 말하고 싶은 곳이었다. 거기다 적잖이 달달한 칵테일과 스낵 위주의 메뉴는 한층 호감지수를 상승시켰다. 로실링은 화려한 신촌과 살기 바쁜 청춘들로부터의 피신처로 적격이었다.
바빴던 그리고 게을렀던 탓에 긴 시간 잊고 살았으나 집까지 은신처로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 불현듯 로실링이 떠올랐고, 오랜만에 가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4.
꽤 오랜만의 방문이라 그동안 뭐가 변했을지 궁금하여 이것저것 검색을 해볼까 하다가 관두기로 하였다. 이것조차 ‘하나의 일’로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보다는 재밌게 풀어나가보고 싶어 그 동안의 취재방식에서 조금 궤를 달리하여 인터뷰를 시도하기로 마음 먹었다. 인터뷰 과정 자체도 기대가 되었지만, 아지트를 운영해 나가는 사람은 어떤 마음일지 궁금한 것도 꽤 컸다.
술을 마시기에는 조금은 이른 오후 9시 즈음에 사장님을 찾아뵈었다. 큰 키에 차분하신 톤으로 필자를 반겨주신 사장님을 뵈니 생전 처음해보는 인터뷰에 앞서 먹었던 겁이 조금은 누그러지며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본디 여러 질문들을 준비해가고, 질문지도 출력해 가져갈 예정이었으나 허락을 구하러 간 차에 바로 실행에 옮기게 되어 조금은 당황하였다. 사장님의 흔쾌한 허락에 ‘오늘 바로 할 것은 아니고, 다음에 다시 오려구요’라는 말보다는 ‘감사합니다’를 내뱉게 되었다. 수줍은 감사 인사를 시작으로 가안으로만 준비했던 질문들을 그 자리에서 손질해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픽사의 로고가 떠오르는 스탠드
세련된 검은색이 눈에 띈다.
머릿 속에 그린 것은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격식있고 유익한 인터뷰였으나, 실제로 필자가 하고 온 것은 상담에 가깝다. 대화는 ‘이러한 아지트를 꾸려나가는 것은 어떠신가요?’, ‘이런 공간을 갖는 것을 꿈꾸는 친구들이 꽤 있는데, 실제로 운영하시면서 느끼시는 것과 이전에 기대하셨던 것의 차이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등의 기본적인 질문에서 시작하였다. 으레 나올 법한 말과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번갈아가며 오가던 중, 앞으로 꽤나 가슴에 새겨둘 것 같은 사장님의 말씀이 나왔다.
“이 곳이 엄청 유명해지기 보다는 소소하게 사람들이 머물다 갈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큰 광고, 홍보도 하지 않는 것이구요.”
주로 어두운 분위기의 로실링에
달린 비행선 모양의 귀여운 등
5.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로 시작됐던 대화는 끝내 한 시간을 채웠다. 필자는 앞선 소소한 공간에 대한 발언에 왠지 감화되어 로실링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하되,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이나 생각들을 대화에 가미했다. 목적을 잃은 채 열심히 사는 것의 허탈함, 숨막히는 일상에서 벗어나 이런 공간을 갖고싶은 열망 등 긴장이 풀린 탓에 그동안 쌓였던 것을 엉겁결에 풀어놓았다. 사장님은 처음 보는 학생이 불쑥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한다면서 은근슬쩍 인생상담으로 선회하는 것에 그리 놀라지 않으셨다. 맥락에 어긋난 질문을 하는 것이 염려스러워 괜찮으신지를 여쭈니 벌써 몇 명의 단골 학생들이 벌써 사장님과 상담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선례가 있어준 덕에 자연스레 넋두리를 늘어놓을 수 있었다. 핏대를 세우지 않고, 뒷목이 빳빳하지 않은 소소한 삶이 그 주제였다. 특히 일상에 권태를 느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기도 하였다. 또한 그러한 마음에 로실링을 재방문하였다며 사장님께 감사함을 표하였다. 사장님은 그런 찬사를 고마워하시면서도 ‘일상으로부터의 도피가 항상 답은 아닐 수 있음’을 넌지시 말씀하셨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해야할 일이 있고, 가끔 그것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크게 돌아와 도망을 치고 싶게 만든다. 하지만 “도피의 끝에 새 땅은 없지. 늪이야”라는 노랫말처럼 완벽한 탈출구는 없다.
만일 괴롭히는 현실에서 도망쳐 아지트에 영원히 숨을 수 있게 된다면 그걸로 해결된 것일까. 아지트가 제 2의 일상의 장소가 된다면 그 때는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또 다시 도피해야할까. 하지만 이번엔 선뜻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떠나버림의 끝에는 지겨운 권태가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진부한 말이지만 균형을 잡으면서 살아야할 것이다. 필자가 아주 강력하게 도피의 욕구를 느꼈던 것처럼 삶에 충성할 것도, 매번 아지트를 바꿔가며 도망자 신세로 살 것도 없지 않을까.
콘센트를 숨긴 디테일이 인상적이다.
공간을 꾸미는 센스와 섬세함이 느껴진다.
6.
상업영화의 통쾌한 결말은 아니었지만 어질러진 마음을 정리하기엔 충분하였다. 긴 대화 끝에 사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로실링을 나왔다. 참고로 로실링은 일회용 컵을 제공한다. 이는 꽤나 신선하고 유용한 서비스이다. 가끔 우리는 술자리에서 술을 버리는게 아까워 꾸역꾸역 남은 술을 털어 넣지 않는가. 그러나 여기선 그런 용감한 일을 할 필요가 없다. 원하면 가지고 가면 된다. 이것은 아마 바(Bar)를 이용하는 손님이 떠나고 싶어진다면 언제든 자리를 떠도 괜찮다는 사장님의 배려는 아닐까. 간판이 없는 문을 나와 일상으로 돌아가며 든 생각이다.
P.S. 필자의 아지트에서 틀고 싶은 노래 한 곡을 추천한다.
로실링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4길 26
수 ~ 일 18:00 – 24:00
(당분간 월, 화 휴무)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이야기를 남겨주세요.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