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알코올맨
크리스마스 파티, 연말 송년회, 종강파티… 놀기 좋아하는 잔치꾼답게, 에디터에게 12월은 상상만해도 술 냄새가 날듯한 모임의 연속이었다. 매해 이 마지막 한 달 동안은 신촌의 알코올맨이 되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간을 망치러 다녔다. 몸이 먼저 박살 날까 통장이 먼저 박살 날까 내기라도 하듯 술병은 늘어나고 기억은 줄어들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꼭 ‘내년부터 진짜 술 끊을 거야’라는 말도 안 되는 다짐을 몇 년째 외치며 새해를 맞이했다.
하지만 올해에는 누구와 함께 개망나니가 되어볼까 즐거운 연말모임을 가져볼까 하는 고민은 필요가 없어졌다. 술집은커녕 영화 한편 보러 나가기도 겁나는 “코시국”에 파티가 웬 말이겠는가. 이 참에 집에서 미뤄왔던 책도 읽고 취미생활 하면서 조용히 연말을 보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12월이 코앞으로 다가와 크리스마스 캐롤들이 서서히 들리기 시작하자, 종소리를 들은 파블로프의 개처럼 술이 조건반응으로 떠오른다 역시 개망나ㄴ…
평소처럼 눈 덮인 신촌의 거리를 겁 없이 누비고 다니는 알코올맨이 될 수는 없으니, 추억에라도 취해야지 싶어 핸드폰의 갤러리 속 사진들을 쭉 넘겨봤다. 그러다 보니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알코올맨의 여러 가지 모습이랄까, 지난 몇 년간 술을 참 다채롭게도 드셨더란다. 그래서 오늘 에디터는 이 알코올맨의 여러 유형을 파헤쳐보고자 한다. 그리고 언젠가 코로나가 종식되는 가까운 미래에 후배 알코올맨들이 유형별로 가 볼만한 신촌기지를 소개하겠다.
입 벌려, 알코올 (꿀팁) 들어간다.
※참고로 에디터는 술 중독이 아닙니다. 아무튼 아니라고요.
1) 너죽고나죽자 유형 (You Die I Die)

삼칠포차 _서울 서대문구 연세로7안길 10
어깨를 자유자재로 탈골 시킬 수 있을 것만 같은 이 유형은 이름만큼이나 패기가 넘친다. 특히 막 성인이 되어서 드디어 눈치보지 않고 합법적인 음주가무가 가능해진 새내기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 ‘사랑하는 만큼’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핑계로 술잔을 끝까지 채워주는 이 무서운 사람들에게 술은 오직 취하기 위해 먹는 것이다. 내일 내가 좀비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살아서 나가는 사람 없이 모두를 지옥으로 같이 끌고 가야 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안주는 사치다. 안주 먹을 시간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너죽고나죽자’ 유형에게는 안주에 크게 고민하지 않고 술에만 집중할 수 있는 가성비 좋은 집을 추천한다. 신촌은 학생이 많은 대학가답게 그런 곳이 아주 많다. “삼칠포차”는 모든 안주 3700원, “삼삼포차”는 모든 안주 3300원, “삼구포차”는 모든 안주 3900원… 직관적인 이름 그대로, 가격은 매우 저렴하고 맛은 생각보다 먹을만하다. 단, ‘먹을만하다’는 기준은 어차피 곧 의식을 잃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성립하는 것이다. 다음날 정신차리고 통장 잔액을 확인했을 때, 그렇지 않아도 토할 것 같은 속이 또 한번 놀라지는 않게 해주는 곳이라 생각하자.
2) 환상의짝궁 유형 (Hwansang’s Partner)

착한 곱창 _서울 서대문구 연세로9길 19
‘환상의짝궁’ 유형은 에디터가 주로 추구하는 모습이다. 술 맛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곧 함께 먹는 음식이라는 신념을 가지기 때문에 안주를 대충 고르지 않는다. 어떤 술을 마실 것인지에 따라 어울리는 요리를 신중히 선택하여 환상의 조합을 만들어낸다.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법한 유명한 조합이 꽤나 있다. 걸쭉하면서 탄산이 살살 튀는 막걸리는 해물 가득한 해물파전과 같이, 청량하고 시원한 맥주는 바삭바삭한 치킨과 같이, 부드럽게 넘어가는 소주는 진하고 얼큰한 국밥과 같이! 술과 안주의 아름다운 조화는 ‘환상의짝궁’ 형 알코올맨들에게 천국이 따로 없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조합이 바로 곱창과 소맥이다. 소주와 맥주를 황금비율로 말아 부드러움과 청량함을 고루 갖춘 소맥은 기름진 곱창과 함께 마실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신촌에 인기가 많은 곱창집이 여럿 있지만, 2년 전부터 에디터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곳은 딱 한 군데이다. 내부가 넓고 깨끗해서 쾌적하고 정말 맛있기까지 한 천사 같은 집, “착한곱창”이다. 가격마저 너무 착해서 대부분의 메뉴가 9900원인 이곳에서는 무조건 모듬구이를 시켜야 한다. 추가로 조금 더 맛있게 먹는 법을 알려주자면, 불판에 조금씩 기름이 차갈 때 먼저 빨리 익는 염통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소맥을 마신다.) 부드럽게 씹히는 염통 후에는 앙 깨물 때 속에서 뜨거운 곱이 촥 터져 나오는 곱창이랑 겉은 살짝 그을려서 바삭하고 윤기가 좔좔 흐르는 대창을 먹을 차례다. (그리고 소맥.) 그 다음에는 가장 오래 구워서 노릇노릇 쫄깃한 막창을 먹고(그소맥), 마지막으로 매콤 짭조름한 볶음밥으로 완벽하게 마무리한다. 끄-읏
3) 고진감래플렉스 유형 (Go Pain Come Sugar Flex)

파가니니 _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63 6층
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있다. 아르바이트나 직장에서 뼈 빠지게 일하고선 자그마한 월급을 받아, ‘내가 이걸 위해서 그 쌩고생을 했다고?’ 하는 허무함이 드는 날. 아니면 이런 날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시험이나 프로젝트 때문에 밤새워 준비하고, ‘드디어 다 끝났다!’하고 후련하게 외치는 날. 너무나 힘들었던 일이 지나고, 수고한 자신에게 토닥토닥 따뜻한 위로가 필요할 때가 있다. 나를 위한 선물이 필요할 때, ‘고진감래플렉스’의 날이 온 것이다. 지갑 꺼내라 친구!
이왕 큰 맘 먹고 값비싼 곳으로 갔으면 술 자체보다는 그 분위기에 취하는 것이 제대로 즐기는 자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에디터는 망설임 없이 “파가니니” 칵테일 바를 추천한다. 첫 번째 이유는 바로 6층의 아주 높은 위치에서 신촌을 내려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생해온 지난날을 회상하며 해가 지는 모습 또는 조명이 가득한 야경을 바라보며 감성에 젖어 드는 밤이 될 것이다. 두 번째 추천 이유는 당연 술이 맛있기 때문이다. 칵테일은 종류가 워낙 많아서 고르는데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어차피 오늘 만수르라도 된 듯 여유를 즐기려는 ‘고진감래플렉스’ 유형에게 그건 문제가 아니다. 상큼달달한 과일 칵테일, 달콤쌉싸름한 위스키 칵테일, 그리고 깊고 달짝지근한 와인까지 취향껏 골라보자.
4) 가볍게한잔 유형 (One Light Drink)

세렌디피티 _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67 3층
(사진 출처: @serendipity_f3 세렌디피티 인스타 계정)
술은 자고로 취하기만을 위해 마시는 것은 아니다. 알코올맨에게 술은 일상이다. 밤에 신나게 놀고 마시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아직 해가 떠 있을 때 편하게 한 잔 정도 마시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편의점에서 맥주 캔을 사오자니 멋도 없고 맛도 없고, 또 친구를 불러 마시자니 겉잡을 수 없이 판이 커져 어느새 너죽고나죽고 형이 되어 있을까봐 겁이 난다.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맛있는 맥주를 가볍게 즐기고 싶은 이 유형을 위해 딱 좋은 곳이 있다.
세렌디피티는 이화여자대학교 부근에 위치한 카페다. 들어가는 순간 아주 사랑스러운 푸들 한 마리가 달려와 반겨주기 때문에 놀라지 말고 침착하게 귀여워해주면 된다. 이 곳의 인테리어는 은은한 조명과 필름사진, 그리고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갈색 톤으로 빈티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장 특이한 점은 카페이면서도 밤 11시까지 영업하며 오후부터 레드락, 바이젠, 코젤다크 생맥주를 판매한다는 것이다. 카페에서 맥주를 파는 경우가 간혹 있지만, 대부분 편의점에서도 충분히 구할 수 있는 병 맥주뿐이다. 하지만 세렌디피티에서는 맥주기계에서 바로 따라 신선하고 맛있는 생맥주를 마실 수 있다니, ‘가볍게한잔’ 형 알코올맨에게는 과제하기 딱 좋은 카페였다. 솔직히 말해서, 요즘 세상에 누가 제정신으로 과제를 할 수 있단 말인가.
5) 술은둘째치고 유형 (Drink Out of Anjoong)

피망과 토마토 _서울 서대문구 명물길 27-21 2층
참 골 때리지만 실제로 나타나는 ‘술은둘째치고’ 유형은 술을 크게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 일단 명분은 ‘술을 마시기 위해’ 모인 것인데, 막상 술잔은 자주 건들지도 않고 다른 걸 계속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개 무언가 액티비티가 준비되어 있는 가게에서 이러한 유형이 자주 나타난다. ‘알코올맨의 한 부류라고 할 수는 있나?’라는 고민을 길게 했지만, 일단 주류 판매가 되는 가게라는 점을 감안해서 인정하기로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유형은 술을 둘째친다고 말은 하지만, 결국 전혀 안 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술은둘째치고’ 유형을 위한 가게는 대표적으로 “피망과 토마토”라는 만화방이 있다. 이 곳은 엄밀히 말하자면 술은 셋째 친다. 둘째는 만화방답게 한 벽면 전체를 빈틈없이 가득 채운 만화책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첫째는? 야옹이. 피망과 토마토에서는 수백 권의 만화책이 있고, 수십 종류의 병 맥주가 있고, 네다섯 마리의 고양이가 있다. 주인공은 고양이들이다. 그 중에서 뭉치는 우아한 덩치와 폭신폭신한 털을 자랑하는 이 곳의 대장이다. 대장답게 성깔도 있다. 가끔 쓰다듬을 수 있게 허락해주다가도 무언가 맘에 들지 않으면 바로 발길질을 시작하니 눈치를 봐야 한다. 고양이들로부터 인기쟁이가 되기 위한 팁을 주자면, 갖고 있는 영수증 하나 공으로 구겨서 던져봐라. 그럼 한 5분 정도는 놀아줄 것이다. 그때를 누려라. 5분이 끝나고 고양이들이 이내 시시해진 듯 떠나면, 이제 맥주를 마실 때가 된 것이다.
마지막) 나홀로집에 유형 (Home Alone)

우리 집 _주소 안알랴줌
다사다난했던 2020년도 이제 한 달만 지나면 끝이다. 이번 해에는 시국이 시국이었던 만큼 전국의 알코올맨들이 몸을 사리느라 지칠대로 지쳤으리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잘 참아왔으니, 조금만 더 힘을 내어보길 바랄 뿐이다. 올해는 술 마시러 나돌아다녔다가 취해서 집에 돌아오기 힘들 걸 걱정하는게 아니라, 괜히 역병이나 걸려서 돌아오기 힘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더 이상 못 버티겠다고 한다면, 적어도 연말의 음주가무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다. 우리 모두 이 마지막 유형의 알코올맨이 되도록 하자. 케빈아 기다려라!
따스한 집에서 소중한 나 자신, 또는 사랑하는 가족, 연인, 반려동물, 소수의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소박한 연말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소확행”이라고 하지 않는가, 소소한 것이 확실한 행복이 되어 모두의 안전과 알코올을 지켜준다. 안주는 무엇이든 가능하니 먹고 싶은대로 직접 만들어도 좋고 배달을 시켜도 좋다. 술은 종류 상관없이 취향대로 소주, 맥주, 막걸리, 동동주, 와인, 칵테일, 전통주, 대통주, 위스키, 럼주, 보드카 기타 등등 마음이 원하는대로 준비해두자. 심심하면 영화도 한편 틀고, 분위기 있는 음악도 좀 깔아주고, 술 한잔 더 따라보자. 생각보다 꽤나 재미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가오는 2021년 새해를 맞이하여 이렇게 다짐을 해보자.

1) 삼칠포차
2) 착한곱창
3) 파가니니
4) 세렌디피티
5) 피망과 토마토
마지막)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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