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공간, 사람
알람이 울린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허겁지겁 밥을 먹고 책상에 앉는다, 쉼 없이 쏟아지는 수업 내용을 빼곡히 받아 적는다, 때때로 빠르게 머리를 굴려 ‘내 생각’(이라고 불리는 것)을 발표한다, 실수는 없었나 마음 졸인다…. 이따금 오는 반가운 연락에 잠시 한 눈을 팔았다가, 이내 13인치 화면 속 캠퍼스에 초점을 맞춘다. 과제 마감 30초 전, 아슬아슬하게 safe. 안도의 한숨 1초. 뜨거워진 머리를 빠르게 식히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간다.
재부팅 준비- 꿈도 안 꾸고 죽은 듯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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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알람이 울린다. 역시 힘겹게 눈을 뜬다. 정신없던 하루가 또 가고, 자리에 눕는다.
그런데 어쩐지, 머리가 좀처럼 가동을 멈추질 않는다.
모른 척 넘겨왔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것들이 일순간 떠올라 머릿속을 헤집는다.
크고 작은 푸념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밤이 있다.

시선은 멈추고 오직 생각만이 분주히 움직이는 시간
부지런한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고, 종국에는 선이 악을 이긴다고 하던가요.
인생의 진리라고 귀 닳도록 들어왔던 것들과, 끝없이 탐구하라고 요구받았던 ‘논리’와 ‘합리’. 이들에 대한 믿음은, 정작 그것과는 무관하게 제멋대로 굴러가는 복잡한 세상 속 나를 더 괴롭게 한다.
좀처럼 납득할 수 없는 세계 속에 섞여 나 역시도 앞뒤 다른 부끄러운 짓만 일삼고 있지는 않나, 생각하다가는
세상은 원래 온통 모순 덩어리야,
다소 무책임한 결론을 내려버린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를 둘러싼, 혹은 우리 그 자체인 ‘모순’은 필연이 아닐까.
# 공간 – 우리 존재성의 토대
3차원 존재인 우리는 어떠한 예외도 없이, 오직 ‘공간’(세 개의 좌표축을 가진)을 통해서만 존재성을 확립하고 인정받는다. 우리 모두는 나면서부터 소멸에 이르기까지 오직 이 공간을 매개로 살다-실재하다-가 간다.
공간5 (空間)
- 아무것도 없는 빈 곳.
-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범위. 어떤 물질이나 물체가 존재할 수 있거나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자리가 된다.
한자를 직역하면 ‘빈 사이’.
아무것도 없기에 오히려 어떤 물질이나 물체, 일 따위가 자리 잡고 존재할 수 있게 되는 영역.

빔(空)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없는 空 그 자체는 좀처럼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래서 ‘공간’을 말할 때 우리는, 으레 ‘빔(空)’은 망각한 채 그곳에 자리한 것들의 총체를 상정하곤 한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비어있음’ 그 자체를 이르던 말이 아니던가.
비움으로써 가능성을 확보하는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세계 모든 존재성의 토대인 그 ‘공간’에 대한 정의마저 꽤 자주 망각한 채 살아간다.
# 도시 – 미숙한 인간 이성의 집약체
우리는 비어있던 이곳을 위로는 빼곡한 빌딩들, 아래로는 지하철, 심지어는 공기를 가득 메우는 인공(人共) 불빛과 소음들로 조금의 빈틈도 없이 야무지게 채웠다. 45억 년에 이르는 길고 긴 지구의 역사 속, 고작 티끌 정도의 시간만큼을 머물며 이토록 많은 것을 세우고 파괴하며 구석구석에 손길을 뻗친 인류는 가히 탐욕스럽다.

땅속까지 빽빽하다
하지만 다른 생물종 역시 이기적인 욕심을 좇는다. 다시 말해 그들이 적정선만큼만을 소비하고 파괴하는 것은 그들이 무욕하기 때문은 아니다. 다만 인간이 그들과 다른 것은 잘난 ‘이성’에 기대어 그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더 넓은 세계를 향해 고개를 쳐들어 버렸다는 것. 인식하는 만큼을 욕심내고, 결국 손에 넣고, 꽤 자주 파괴해버리고 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수순 아니던가.
비록 나약한 육체를 가졌지만, 그들만이 가진 ‘이성’은 제법 합리적인 동시에 강한 것이라며 뻐기던 인간들은 결국 그것 때문에 가장 합리적이지 못한 짓들을 일삼는다. 어디까지나 유한한 존재들의 미숙한 이성(reason)이었기에.
과거에 의기양양하게 벌려 놓았던 짓 때문에 이제는 온통 울상이 되어버린 존재라니. 지구상 유일하게 ‘탐욕’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존재였던 인간은, 동시에 성찰을 해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다.
# 나는,
그저 태어난 김에 산다고는 하지만 이왕 사는 거 기분 좋게 살아보자 생각했던 나는,
세계의 미숙함과 논리 없음, 사람들의 뻔뻔함과 앞뒤 다름에 종종 상처를 입다가도, 그리고 무엇보다 그 엉터리 세상과 별 다름없이 살고 있는 나 자신에게 진절머리를 느끼다가도,
내가 살아가는 세상과 나 자신을 그만 미워해 보자, 결심했다.
그러나 이내, 내가 그저 결심만으로 ‘이 이해되지 않는 멍청한 것’들에 대한 짜증을 누그러뜨리고 그것을 사랑할 수 있는 만큼 따뜻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나서는…!
그렇다면 이 이상한 세상에 대해 더 공부하고 이해해 보자, 새로운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나는 기꺼이 인문학도(인문학: 인간과 관련된 근원적인 문제나 사상, 문화 등을 중심적으로 연구하는 학문), 그중에서도 내 나름의 논리 세계의 중심이 되는 ‘언어’를 배우는 국어국문학 전공생이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내가 애증하는 인간들로 가득찬 이 도시, 신촌에서 …!
그러나 인간 이성의 정수로 칭송받곤 하는 ‘언어’, 그리고 이 ‘언어’로 이루어진 내 머릿속 세상 역시 지극히 제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걸 꽤 자주, 뼈저리게 느낄 뿐이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세상 것들의 이름을 새로이 아는 것은 분명 큰 배움이었지만, 동시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가려지는 수많은 ‘배경’들이 생겨났다. 하나가 명확해 질수록 희미해져버려 결국 놓치고 마는 것들이 있었고, 더 잘 이해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배제를 부추기고 있지 않은가 회의(懷疑)했다.
부족한 어휘력과 뇌용량을 가지고 꾸역꾸역 생각을 계속하려는 시도가 부끄러운 동시에 질려버렸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잠시도 쉬지 않고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상호작용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이 세상 그 나름의 이치를 이 좁은 머릿속에 욱여넣으려고 했던 게 오만한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친 하루 끝
빽빽한 일정을 뒤로하고 하루를 마무리할 때면, 스스로가 ‘성능이 좋지 못한 기계’처럼 느껴지곤 한다. 쉽게 방전되고 금방 과부하가 오는, 밤마다 재부팅이 필요한 사람의 몸. 심지어 그 약한 몸 대신 내세우던 이성과 논리조차 (기계에 비해) 그리 대단하지 못함을 느끼며 무력해진다. 그래서일까, 뛰어난 AI가 인류를 대체해 결국 사람은 설 곳을 잃는다는 디스토피아에 대해 들을 때면 사뭇 두렵다. 철저히 합리와 논리로만 가득한 세상이라면 나처럼 성능 나쁜 기계는 금방 대체되고 말아버리려나…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세계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계는 결코 인식하지 못하는 空, 어쩌면 사람들도 꽤나 자주 망각하고 있는 그 ‘빔’으로 가득한, 그 자체로 모순인 세상.
‘빔’을 몰아내는 ‘채움’ -실재와 실체, 실증과 과학-에 대한 완벽한 앎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채움’에 앞서 존재하는 ‘빔’ – 감정과 예술과 철학, 혹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진리- 에 대한 탐구는 오직 사람이기에 계속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기계는 결코 품지 못할 그 모순을 직시하는, 또 그것을 품음으로써 성숙하는 사람의 존재를 비로소 긍정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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