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의 기록
이른 새벽의 기록 (03.30.21)

새벽은 잠들지 못하는 이들에게만 목격되는 것이다.
이른 새벽,
다시 신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열흘 정도를 대구에서 보내고 돌아왔다. 여전히 신촌은 신촌이고 나는 나인데, 시간이 흘렀다. 한 달도 안되는 짧은 부재였는데, 동네 곳곳에 새로운 가게가 들어선 신촌은 내게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는 대구의 변두리에서 자랐다. 거리든 사람이든 변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그곳에서 온 내게, 신촌이 보여주는 일종의 유동성은 아직 좀 낯설다.
신촌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가게가 몇 개 바뀐 거지만, 열흘 전이 아닌 10년 전과 비교한다면 지금과는 완전 딴판일테다. 그럼에도 여긴 같은 도시다. 아무리 그 모양이 변해서 이전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지라도 신촌은 신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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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속에 있는 나도 그렇고.
거울 속에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만, 문득 이 사람이 낯설 때가 있다. 누나가 가끔 보내주는 내 아기 때 사진을 보면,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게 새삼 놀랍다. 그 아이도 나고, 청소년때의 나도 나고, 대학생인 지금의 나도 나인데 무엇이 그대로이고 또 무엇이 바뀌고 있는 것일까.
“신촌을 그대로 신촌이게 하는 것과 나를 나이게 하는 것”.
그것이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여전히 그대로 있는 것이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대구에서 어린시절 내 안의 꿈들에 대해 생각했다. 10대 때는 꿈이 컸다. 그래서 이정도 나이엔 내가 무언가를 이뤄냈을 줄 알았다. 야심 혹은 열정은 여전히 내 안에 꿈틀대지만 이젠 그것이 문득 신기루 같은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가진 지금 이정도의 능력으로 평생을 산다고 생각하면 두려움이 올라온다.
‘꿈은 진정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었을까’
수많은 답변들이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열정을 포기하지 말라는 말, 어른이 되지 말고 계속 꿈을 꾸라는 말들. 또 한편으로는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자신을 더 사랑하라는 말, 쥐고 있는 주먹을 풀어버리라는 말들도 들려온다. 나는 꿈을 꾸어도 될까, 내 희망의 내용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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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때로는 전혀 실감하지 못한다. 10년 전에도 지금도 변함없는 걸음걸이로 걷고, 똑같은 이유로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우리의 몸이 시간 속을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도 그렇다. 시간은 마음 역시 관통하여 흘러간다. 마음의 가장자리에는 모래알이나 자갈처럼 혹은 고운 흙처럼, 기억이 쌓인다. 시간이 멈추지 않고 흐르고, 기억은 조금씩 두꺼워진다.
문득, 화려하게 꾸몄던 계획들이 떠오른다. 전쟁터의 사진기자가 되고, 집도 없는 여행자나 흥행에 가망 없는 영화감독이 되어 삶을 탕진하려고 했던 계획들이 있었다. 하지만 저 앞날을 향해 있던 비전들은, 이제 모두 과거의 추억이다. 그런 미래를 꿈꾸었던 것이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라니, 신기하다. (이런 현실에 타협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믿는다)
애초에는 텅 빈 마음으로 태어났겠지. 걸음마를 배울 때는 더 멀리 나아가는 꿈을 꾸고, 걷기 시작했을 때에는 보이지 않는 다른 곳을 꿈꾸었을 것이고. 모르는 곳과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로 마음속은 조금씩 채워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각자의 마음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일정한 용량이 있는 것 같다. 미래로 ‘향하는 기대와 과거에 머문 기억이 여기에 함께 담기는데, 기억이 쌓여 사용 가능한 용량이 줄어들면, 그만큼 미래에 대한 기대는 줄어드는 것이겠지.
미래를 향해 화려한 비전을 꾸미는 사람이 우월하다거나, 과거를 관조하는 인간에 대해 열등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게다가 누군가를 늙은 사람이다, 젊은 사람이다 라고 구분할 수도 없다. 우리의 마음은 미래에 대한 비전과 과거의 기억을 쉴 새 없이 오가기 때문에, 늙은 젊은이거나 젊은 늙은이로 살아간다.
반짝이는 미래를 무분별하게 꿈꾸는 것은 절제 없이 술을 마시다가 취하는 것과 같고, 과거에 대한 생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도 뒷걸음질로 산책하는 것처럼 위험하다. 그 두 가지가 마음의 토대이자 자양분인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적절하게 다루어야 한다.
과거나 미래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는 어느 곳에도 자유가 없는 사람이, 그 중 어느 한 곳에 억지로 정착한다는 것은 어차피 기계적이고 피상적인 평화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마음의 양극단을 통합하는 것이 핵심 과업이다. 하지만 이 통합은 단순히 과거와 미래의 중간값 혹은 회색지대에 안주하는 것과는 다르다.
신촌을 그대로 신촌이게 하는 것과 나를 나이게 하는 것, 과거와 미래 어느 한 곳에 머무르기 위한 자기합리화를 하는 대신
현재에 치열하게 진동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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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모호하게 이어지는 의식의 세계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오후 5시. 아직 이른 시간이라 잘 수도 없고, 책상에서 허공만 관찰하다 지하철을 타고 신촌에 있는 와인 바로 향했다.
신촌역에 들어서고,
눈에 띄게 서늘한 날씨와 맑은 하늘. 경계 없이 오로지 바람에 기대어
자유롭게 날개를 펼친 검은 물체.

신촌역 n번출구 앞 (몇번인지 기억 안남)

신촌의 비닐봉투는 하늘을 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물건을 담는 용도는 강요된 것인가.
와인 바를 찾는데 시간이 꽤 오래 소요됐다. 걷는 행위를 워낙 좋아하는 편이라,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가까스로 도착한 바에는 와인은 물론이며 시집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하나같이 누군가 깨워주기를 기다리며 지하철에서 단잠을 자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한 녀석을 강제로 깨워 동적인 침묵을 강요해본다.

오른발 왼발 번갈아 나아가는 것처럼,
한 잔에 한 장씩
느긋하게 앉아서 하는 산책
_하루의 마무리



[…] 에디터 메르헨, “이른 새벽의 기록 (잔치 아트팀, 2021.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