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통인동커피공방- 신촌로스팅라이브러리
<마음 휴게소- 신촌 로스팅 라이브러리>
2021년 9월, 가을 초입 어느 날
해가 중천인데도 2호선 열차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덜컹거리는 열차 속 인파 가운데, 북이가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식은땀을 흘리며 서 있다. 한 손은 녹색 손잡이를 움켜쥔 채, 다른 한 손은 손바닥을 뻣뻣하게 펼쳐 얼룩진 바지 주머니에 닦아 내기를 반복했다. 열차가 새로운 역을 지날 때마다 북이는 어김없이 주변을 살피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번 역은 신촌, 신촌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안내방송이 열차 안을 가득 채운 사람들 숨소리를 뚫고 또렷하게 들렸다. 북이는 잡고 있던 손잡이를 놓아버리고, 비틀거리며 발걸음을 지하철 출입구 쪽으로 옮겼다. 출입문 앞은 나가려는 사람들과 자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뒤엉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지만, 최대한 출입문 가까이로 몸을 붙였다. 마스크 위로는 반쯤 풀린 초점 없는 두 눈으로 출입문만을 응시하며 달려나갈 채비를 했다.
열차가 신촌역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마자, 자리다툼에 열중하던 북이는 스프링처럼 튀어나갔다. 두 줄로 대기 중이던 사람들 사이로 달려 나가 순식간에 계단 위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면서도 고개를 돌려 사방을 확인하는 눈빛이 한없이 불안해 보였다. 황급히 개찰구를 나와서 바라본 표지판에도, 마구잡이로 흐트러진 당구공처럼 8개의 출구가 표시되어 있을 뿐이었다.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듯 북이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택시가 아니었기에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라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고개를 뒤로 돌려 주변을 살피고 다시 표지판을 보는 것을 세 번 반복한 후에야, 북이는 다시 냅다 뛰기 시작했다.

쫓기고 있는 급박한 상황.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 출구나 골라 뛰어 올라와 보니 신촌역 투썸플레이스 앞이었다. 곧게 뻗은 연세로를 바라보며 북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예로부터 조상들은 적의 침입이 있을 때 높은 곳으로 올라가 위기를 극복하곤 했지.’ 이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마자, 북이는 신촌에서 가장 높은 곳이 어디인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다음 수를 철저히 계산하는 지략가처럼 잠깐 고민하더니, 다시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유플렉스에 다다랐을 땐 건물 문을 열어젖히고 거침없이 내달렸다. 그렇게 숨을 헐떡거리며 도착한 곳이 바로 유플렉스 12층 꼭대기였다. 북이가 발걸음을 멈췄을 때 그를 뒤쫓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제서야 북이는 고개를 돌려 뒤를 보는 것을 멈췄다.

호흡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어보니, 수많은 책으로 채워진 벽면과 화려한 조명이 눈에 들어왔다.
유플렉스 12층에 도착하면 화려한 조명과 벽면을 가득 채운 책이 두 팔 벌려 맞이한다. 높은 층고와 위에서부터 비추는 조명이 마치 궁전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한편으로는 벽면에 쌓여 있는 책이 주는 위압감 때문인지, 오래된 대학 도서관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기도 하다. 12층 입구에 서서 보면 왼쪽으로는 ‘아크앤북’이라는 큰 서점이 보이고, 오른쪽으론 카페로 추정되는 공간이 시야에 들어온다. 바로 그곳이 ‘통인동 커피공방-신촌 로스팅 라이브러리’다.
북이는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마음이 이끄는 대로 왼쪽 구석 창가 자리에 앉았다. 바로 앞에 위치한 통창으로 햇볕이 내리쬐고, 신촌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라 썩 마음에 든 모양이다. 가장 앞쪽 창가 자리 구간 뒤편으로는 널찍한 계단형 좌석이 배치되어 있다.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서 보던 계단식 논 같은 구조로, 카페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긴 하다. 하지만 이 특이한 구조 덕분에 신로라(신촌로스팅라이브러리의 애칭)에서는 다양한 뷰를 즐길 수 있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높은 자리에서 신촌을 한눈에 조망할 수도 있고, 좀 더 낮은 높이에서 신촌과 눈을 마주칠 수도 있는 것이다. 요즘 같은 취향 존중의 시대에 카페 좌석을 선택할 땐, 위치는 물론이며 좌석의 높낮이도 고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앉은 자리에서 뒤를 돌아보니 계단형 좌석이 보인다. 창가 자리와는 또 다른 뷰를 즐길 수 있겠다.
북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문을 하러 카운터로 향했다. 그러던 중에 눈에 띈 것이 있었으니 바로 이 카페의 독특한 공간 분리다. 카페 내부가 철저히 분리된 느낌은 없었는데, 세부 구역별로 나누어 이름을 붙여 두었다. 커피를 로스팅 하는 곳은 로스팅 랩, 노을을 보기 좋은 자리는 선셋 뷰 라운지, 커피 맛보는 곳은 커핑 랩이다. 또 한 가지 신로라만의 매력은 카페 구석구석 ‘입체음향 구역’이 마련되어 있어서, ASMR 소리와 함께 즐거움을 배가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ASMR 유튜버 SOUPE의 입체음향이 테마별로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 낭만적인 기차 소리, 청량하고 맑은 숲 소리, 겨울과 크리스마스 분위기 등 기분에 따라 골라 듣기만 하면 된다. 새로운 소리를 찾아서 카페 좌석 곳곳을 탐험하는 즐거움은 덤이다.

입체음향 구역에는 헤드셋도 준비되어 있었다. 차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카페 구경은 충분히 한 것 같으니 이젠 정말 주문을 해볼 차례이다. 북이는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메뉴판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엔 간단해 보였지만, 생각보다 베리에이션 음료도 많고 선택하기 여간 쉽지가 않다. 지하철역을 나와서 단숨에 이곳까지 뜀박질한 북이는 목이 말랐지만, 이럴 때일수록 평정심을 잃지 말아야 하는 법.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 적의 침입에 대응책을 고심하는 장군 못지않았다. 메뉴판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자리 선택과 마찬가지로, 찾아오는 손님들에 대한 배려가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에스프레소 계열의 모든 커피음료는 디카페인으로 주문이 가능하며, 라떼 계열의 음료는 추가 금액 없이 두유로 선택 가능하다. 사소한 부분에서도 최대한으로 고객의 기호에 맞추고자 하는 세심한 배려가 이 카페의 숨은 매력이라 할 수 있겠다.


선택 장애가 아닌 줄 알고 살아왔는데, 신로라에서는 예외였다. 그만큼 취향을 무자비하게 저격하는 메뉴다.
북이가 어렵사리 최종 결정을 하기 전 또 다른 고민을 안겨준 것이 있으니, 바로 계절 메뉴이다. 신로라 메뉴판에서도 벌써 가을이 물씬 느껴졌다. 가을을 맞아 아메리카노 2잔과 케이크를 할인된 가격의 세트로 묶어서 판매하고 있었다. 커피와 케이크라는 환상의 짝꿍과 함께 가을의 달콤함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세트 메뉴라는 유혹은 잘 넘겼으나 북이는 ‘가을 신상’이라는 매혹적인 수식어에 마음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스스로를 가을 신상이라며 손짓하던 버터 스카치 라떼가 결국 북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유리 진열대에서 어여쁜 얼굴을 내밀고 있는 밀크 크레이프 케이크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이 카페의 시그니처 메뉴인 메이플 라떼와 알코올이 함유된 깔루아 라떼도 평소 인기가 많지만, 북이를 사로잡는 데는 역부족이었나 보다. 주문을 마치고 돌아서려던 찰나에 점원이 북이를 멈춰 세웠다.
“잠시만요, 적립 스탬프 찍어드릴게요. 음료 한 잔에 스탬프 하나씩 찍어드리고 있어요.” 북이는 지하철에서의 피로감으로 반쯤 풀려있던 눈에 애써 힘을 주며,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저 궁금해서 그런데요, 혹시 옆에 서점도 같이 운영하시는 건가요?”
“뭐 그렇다고도 볼 수 있죠. 엄밀히 이야기하면 회사는 다른 곳인데, 나란히 붙어 있는 옆집 이웃이니까요. 서점에서 원하시는 책 골라 오셔서 편하게 읽으면서 커피 즐기세요. 도서나 문구류 구매 문의는 서점 직원분에게 해주시고요!”
북이는 그 대답을 듣고 나서야 눈에 들어온 안내사항을 읽어보며, ‘아크앤북’도 신로라와 같은 적립 스탬프 카드를 공유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점원분 말을 듣고서야 발견한 안내문. 신로라와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의욕적으로 스탬프를 모아보고 싶어졌다.
백화점 꼭대기 층에 있다고 보기엔 비교적 넓은 ‘아크앤북’을 자유롭게 구경하고 책을 골라보자. 예로부터 선조들도 가을을 등화가친의 계절이라 하지 않았나. 독서의 계절인 가을 분위기로 내부를 꾸며 두어서인지, 책을 멀리하던 사람도 책을 집어 들게 만든다. 책 읽기와 한평생 거리 두기 중인 분들을 위해서 ‘불멍’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독서에 최적화된 편안한 의자가 준비되어 있으며, 스크린에는 모닥불 영상이 재생 중이다. 책과의 독대가 조금 부담스럽다면, ‘스크린 불멍’을 즐기면서 서서히 한 장씩 넘겨보는 용기를 가져보자.

도심 한복판에서의 불멍과 독서라니… 생각만으로도 낭만적이었다.
‘원하는 책을 가져와서 커피와 함께 신촌 뷰를 즐길 수 있다니, 이곳이 곧 무릉도원인걸.’ 북이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책 한 권을 골라 자리로 돌아왔다. 하얗다 못해 투명한 햇살이 따스하게 테이블 위 버터 스카치 라떼를 비추고 있었다. 북이가 앉으면서 테이블을 건드리자 라떼 표면이 넘실넘실 파도쳤고, 밀크 크레이프 케이크는 햇빛을 받은 백사장의 고운 모래알 마냥 반짝거렸다.

자리에 돌아와보니 버터 스카치 라떼와 밀크 크레이프 케이크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창밖에서 노크하는 햇살과 함께 말이다.
그제서야 햇살이 데워 놓은 통창으로 신촌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곧게 뻗은 연세로와 연세대학교 전경이 펼쳐졌고, 교정을 감싸는 안산 자락까지 탁 트인 뷰가 감탄을 자아냈다. 그러나 북이 눈에 가장 아름답게 보인 것은 다름 아닌 신촌 골목골목의 모습이었다. 신촌에 전망 좋은 카페가 여럿 있지만 어쩌면 신촌 골목 풍경이야말로 이 카페에서 맛볼 수 있는 ‘시그니처 뷰’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하나의 작품 같은 모습이다. 흔히 사람들이 신촌을 떠올릴 때 보이는 번화가의 모습도 물론 유리창 너머 비치기도 한다. 틈 없이 빼곡한 상점들이나 삼삼오오 모인 젊은이들로 가득한 풍경 말이다. 다만, 이곳의 창을 통해 전시된 작품은 사람들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골목에 더 많은 비중을 할애한 게 확연히 느껴졌다. 골목 곳곳에 자리한 식당과 술집 사이로, 수많은 가정집과 원룸텔, 리빙텔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을 빗자루로 쓸며 지나가는 환경미화원과 옥상에서 빨랫감을 정리하는 아주머니, 책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어디론가 급히 달려가는 학생도 보였다.
“완성된 그림 같죠?”
풍경 감상에 푹 빠져있던 북이를 향해 점원이 말을 걸었다.
“네에… 각자가 역할을 다하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멀리서 바라보니 완전한 걸작 같네요.”
“근데 사실 아직 완성 아니에요. 다음에 와서 보면 또 다른 그림일걸요? 제가 이건 장담해요!”
점원의 확신에 찬 말을 듣고 아리송했던 북이는, 개운치 못한 표정으로 점원에게 되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아직 완성이 아니.. 라니요… ?”

꾸밈없이 자연스러운 민낯을 보는 것 같아,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신로라의 신촌 풍경이다.
“오늘 다르고 내일 또 달라요. 그림의 구도나 전체적인 풍경이 크게 변하진 않겠지요. 근데 하루하루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매일 새롭게 느껴지는걸요. 작가가 누구인지 모를 이 거대한 그림은 결국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숨 쉬고, 조금씩 수정되는 셈이죠.” 점원의 다소 철학적인 작품 해석을 들은 북이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북이는 두 발아래 양쪽으로 펼쳐진 일방통행 골목길에 시선을 멈추었다. 좁지만 길게 뻗은 일방통행 도로 초입에는, 빨간색 원으로 둘러싸인 ‘30’이라는 숫자와 어린이 보호구역이라는 글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일방통행이라는 네 글자 위로는 흰색 화살표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주행 방향을 나타내기 위해서 말이다.

발밑에 보인 일방통행 골목길. 시속 30km 제한인 어린이 보호구역이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쳐 버렸을 풍경이었겠지만, 점원과의 대화 이후 사색에 잠겨 있던 북이는 점점 더 깊은 생각의 심해로 빠져들어갔다. 좁고 긴 골목길을 멍하니 바라보며, 북이는 자신의 인생을 떠올렸다. 사람의 일생은 누구나 일방통행이다. 주행 방향이 정해져 있고, 한번 지나가면 결코 정해진 방향을 거슬러서 역행할 수 없는 법이다. 도로에 진입하면서 이 긴 도로의 끝을 알 수 없는 것도 닮았다. 혹자는 이런 일방통행의 속성이 한 번 사는 인생이 즐거운 이유라고들 한다. 뭐 틀린 말도 아니고, 반박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북이는 요즘 들어서 부쩍, 일방통행일 수밖에 없는 인생이 자신을 한없이 불안하게 만든다고 느끼는 중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고, 지나쳐 버리면 돌아갈 수 없는 편도 1차선 도로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중에 ‘어린이 보호구역’의 존재도 흥미롭게 느껴졌다. 이 일방통행 도로가 어린이 보호구역인 이유는 인근에 창서초등학교가 위치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심성이 부족하고 체구가 작아 눈에 띄기 어려운 어린이들을, 자동차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어린이 보호구역의 존재 이유인 것이다. 문득 북이는 어른은 별도의 보호구역이 없다는 것과 이것이 당연시되는 현실이 슬프게만 느껴졌다. ‘성인은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이 있는 존재라는 것일까… ?’
북이는 사색의 심해를 아쿠아맨이라도 된 것처럼 헤–엄 헤–엄 헤–엄쳤다. 깊은 바닷속에서 지난 인생 23년하고도 9개월여의 시간을 돌아봤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의 인생 가운데 북이는 브레이크를 잡고 속도를 줄였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바쁘게 달려온 이 도로 위에는 과속방지턱도, 속도제한이 있는 보호구역도 존재하지 않았다. 고속도로였던 인생길에서 북이는 그저 열심히 악셀을 밟으며 달려왔던 기억뿐이었다. 갑자기 속이 답답했는지, 시원한 버터 스카치 라떼 한 모금을 들이켰다.
달달한 라떼로 목을 축인 북이는 순간적으로 마음이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달려가는 도로 위에 정해진 속도제한이 없다면, 내가 보호구역을 지정하면 되지 않을까?’ 속도제한을 강제로 설정해두고 서서히 브레이크를 밟아 보고 싶어졌다. 왜 지금껏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 하는 마음마저 들면서, 북이는 오늘 지하철에서 한없이 쫓기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서야 자신을 뒤쫓고 있던 것이 일방통행 도로 위에서, 속도제한 없이 맞닥뜨린 불안이었음을 깨달았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북이는 밀크 크레이프 케이크로 포크를 가져갔다. 달콤하고도 부드러운 케이크 한 입을 하고는 ‘아크앤북’에서 골라온 책을 펼쳤다. 평소 좋아하는 이병률 작가의 <끌림>이라는 산문집이었다. 몇 페이지를 넘기고 나서야, 직접 찍은 사진과 짧은 글을 모아둔 작가의 여행 기록임을 알았다. 편안한 마음으로 쉽게 책장을 넘기던 북이는 “당신에게”라는 제목의 일곱 번째 이야기에서 멈춰 섰다. 쪽수도 표기되어 있지 않은 이 트래블 노트 초반부, 일곱 번째 이야기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어쩌면 넘어지는 일도, 억울한 일도 많을 것이다. 청춘이라는 이유로 금세 딛고 일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것이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문 앞에 서서 이 문 안에 무엇이 있을지, 무슨 일이 생길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시간을 써버리면 안 된다. 그냥 설렘의 기운으로 힘껏 문을 열면 된다. 그때 쏟아지는 봄빛과 봄기운과 봄 햇살을 양팔 벌려 힘껏 껴안을 수 있다면 그것이 청춘이다. 그래서 청춘을 봄이라 한다.

케이크 한 조각을 먹으며 읽던 이병률의 <끌림>. 술술 읽히다가 이 페이지에서 멈췄다.
북이는 읽고 있던 페이지가 펼쳐진 채로, 책을 그대로 뒤집었다. 그리고 바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북이는 본능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스스로를 위한 속도제한을 설정하고 보호구역으로 진입하는 일. 주도권을 잃고 계속 끌려가던 게임을 멈추는 일이다.
휴대폰을 들고는 너무나 익숙한 학교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다음 명령어를 입력하지 않아도 판단하고 움직이는 인공지능을 탑재한 것만 같았다. 평소엔 찾아볼 수 없었던 과감하고 막힘없는 모습으로 일반 휴학 신청 메뉴로 이동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었다. 북이의 손가락은 이미 휴학 신청 버튼을 향해 있었다.
신청 시 취소가 불가함을 알리는 경고 멘트에도 흔들림 없이 결연했다. 기어코 북이는 휴학 신청을 눌렀다. 단 2초도 채 걸리지 않는 클릭이었지만, 북이는 마음 껍데기 한 꺼풀이 벗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급브레이크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북이는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브레이크에 발을 댄 거니까. 그걸로 충분했다.
2053년 3월, 꽃 피기 전 어느 봄날
“여기까지가 아빠가 이 카페와 가지고 있는 소중한 첫 만남의 추억이란다.” 북이가 아들에게 말했다. 33년째 이곳의 시그니처 커피인 메이플 라떼를 한 모금 마시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근데 말이지… 인생이 참 묘한 게, 가끔은 그때가 그리워. 그때는 쫓아오는 미래가 무서워서 도망치려 했는데, 그 미래를 마주하고 보니 과거가 그립다니… 참 아이러니하지 않아?” 옆에서 듣고 있던 북이 아들 북선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버지는 안정된 직장도 있고, 행복한 가정도 있고, 더 이상 걱정할 게 없을 것 같은데… 왜 불안했던 그때가 그립다는 말씀이세요?”
“바로 그게 문제야, 모든 게 정해졌거든. 물론 배가 부른 소리일 수도 있지. 요즘도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지. 근데 말이야, 이제는 매일 반복되는 직장 생활과 일상이니까…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더라고. 가끔은 예측 가능해져 버린 삶이 따분하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그럴 때면 방금 너한테 들려준, 이 카페에 처음 온 날이 종종 떠오르지.”
북선은 아련한 향수를 느끼는 듯한 아버지의 표정을 보며 무언가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아버지에게서 처음 보는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말을 이어가던 북이 눈가도 촉촉해지고 있었다. 북선은 아버지 이야기에 더욱 집중해서 귀를 기울였다.
“어쩌면 내 이름대로 산 것도 그날부터였던 것 같구나. 내 이름 석 자 ‘거북이’라는 의미대로 나를 돌아보고,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갖고 산 것도 여기 신로라에 온 날부터인 것 같네. 그러니까 아들아… 너도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쫓길 필요 없어. 속도는 네가 결정하면 되는 거야. 가끔은 급정거해도 괜찮다.”
“네… 에? 급정거요?” 북선이 되물었다.
“그래 멈춰도 된다고. 달리다가 무서우면 용기 내서 브레이크를 밟아! 갑자기 멈추면 놀랄 수는 있어도, 사고는 피하잖아. 그러면 된 거지 뭐. 아들아, 아빠 베스트 드라이버인 거 알지? 무사고라고!”

아들에게 멈추는 용기를 꼭 가르쳐주고 싶었다.
북이가 호탕하게 웃으며 아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눈물 흘리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아버지 모습에 당황하긴 했지만, 북선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북선은 아버지가 왜 자신의 대학 입학식 날 이곳으로 데려왔는지 알 것만 같았다. 봄기운을 머금은 투명한 햇살이 테이블 위 밀크 크레이프 케이크를 비추고 있었고, 유리창에 반사된 빛이 북선의 눈동자를 반짝였다.
어쩌면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멈추는 법을 서서히 잊어가는지도 모르겠다. “빨리빨리”를 외치는 무한 경쟁 코리아에서 살아간다면 더더욱 그렇다. 속도를 늦추고 멈추는 능력은 퇴화해버린 동물처럼 아등바등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인간은 기계가 아니며, 휴식이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다. 하물며 기계도 오래 사용하다 보면 건전지가 닳거나 고장이 나기 마련이다. 사람은 누구나 매일 일정 시간의 수면이 필요하고, 장기적인 삶을 놓고 봐도 육체와 정신 모두 쉼이 필수적인 것이다.
각자의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쉼이 필요할 때면, 신촌 IC로 나와 신로라를 찾기 바란다. 차가 막히고 급할 때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언제든 찾아와서 먹거리와 마실 거리를 즐기고, 아름다운 신촌 뷰를 보고 책도 읽으며 쉬어 가보자. 신촌 로스팅 라이브러리는 모두의 마음이 쉬어 갈 수 있는 휴게소가 기꺼이 되어줄 테니까.

통인동커피공방-신촌로스팅라이브러리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 13 유플렉스 12층
매일 10:30 – 22:00
02-3145-1709/ @roastinglibrary_sinchon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이야기를 남겨주세요.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