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K
Special K
플라시보의 2000년 정규 앨범 Black Market Music의 수록곡.
지난 달 언제쯤 나는 B가 줄줄이 열거해 준 플라시보의 추천곡 리스트를 돌리고 있었는데, Special K 도 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해 있었다. 추천곡 리스트 속 노래 제목들은 스무 가지가 넘었고 그 중 1/3을 이미 지나온 상태였는데도, 기억에 남을만큼 끌리는 곡은 놀랍게도, 단 한 곡도 없었다. 플라시보의 Protège Moi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자신있게 추천받은 해당 밴드의 곡을 플레이 리스트에서 하나둘씩 지워나가며 나는 이 프랑스인지 영국인지 모를 얼터너티브 록 밴드에 적잖은 실망을 했던 참이였다. 그러던 도중 불쑥 Special K가 끼어든 것이다. 나는 모 식품 브랜드의 다이어트 용 저칼로리 시리얼 네임을 떠올리고 잠깐 웃었지만, 흥미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곧 Special K의 웅웅거리는 리듬은 나에게 다이어트 용 시리얼의 밍숭맹숭한 톱밥 맛처럼 아주 흐물흐물 해졌으므로, 나는 그것을 우물거리다가 도로 뱉은 시리얼과 같이 자연스럽고, 빠르게 다음 트랙으로 넘겨버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쯤 와서는 새되고 중성적인 보컬의 목소리조차 지겨울 정도였으므로.
충격의 연속이었던 록키 호러 픽쳐 쇼 | 다음영화 (daum.net)
플레이 리스트에서 Special K를 지워야 했던 것처럼 살다보면 전혀 내 취향은 아닌 작품들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일이 심심찮게 있는 듯 하다. 영화의 경우에는 음악보다 몇 배는 곤란하다. 작년 말 추천 받았던 짐 셔먼 감독의 ROCKY HORROR PICTURE SHOW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 이 영화는 한마디로 끔찍했다. 스토리를 설명하는 게 전혀 의미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지만, ROCKY HORROR PICTURE SHOW는 신혼부부인 ‘브래드’와 ‘재닛’이 은사를 찾아가던 길에 폭풍우를 만나고 타이어에 펑크가 나면서 시작된다. 어쩔 수 없이 신세를 지게 된 대저택에서 괴짜 백작 ‘프랭키’ 를 만난 커플의 눈 앞에서 기이하고 선정적인 일들이 어떤 개연성도 없이 펼쳐진다. 이 가엾은 신혼 부부와 시선을 공유하며 나는 불륜과 도착증적 행위 및 의상과 살인과 식인의 향연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시종일관 도착의 형태로 진행되는 전복은 낯설었고, 극단적인 쇼는 되려 지루할 지경이였다. 약 1시간 40분 동안 화려하게 피로를 느끼다가 결국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보며 뭐 이딴 영화가 다 있느냐고 입 밖으로 내게 것은 불가피한 수순이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하게 변덕스러운 데가 있는 법이다. 어디서부터 나의 마음이 천천히 움직였는지, 아니면 아주 갑작스럽게 움직였던 것인지, 혹은 처음부터 그것은 내 마음에 들었는데도 알지 못하거나 어쩌면 인정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최악인 줄 알았던 것에 나도 모르게 매달리게 되는 순간은 이렇게 당황스럽지만 분명 몇번이고 일어나는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가던 중 문득 플라시보의 Special K를 다시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처럼. ROCKY HORROR PICTURE SHOW의 테마곡인 Time Warp를 흥얼거리다가 당시엔 지루하기 짝이 없다고 느꼈던 해당 영화의 클립 영상 뮤지컬까지 모조리 돌려보고 급기야 영화를 다시 봤을 때처럼. 나는 플라시보의 보컬이 새된 목소리를 가늘게 떨며 희망인지 절망인지 모를 불안정한 리듬을 전달하는 3분 50초를 사랑하게 되었고, 지극히 청교도적인 어느 커플의 괴랄한 일탈 체험을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내게 하는 인사가 아닌 것 같았던
나름대로 뚝심 있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만큼 글을 쓰다 보니 영 아니었던 모양이다. 처음 들었던 Special K는 싱거웠고 처음 봤던 ROCKY HORROR PICTURE SHOW는 끔찍했고 처음 도착한 신촌은 우울했다. 시끄럽고 번잡한 공간에서 나는 곧잘 그런 감상에 빠진다. 드문드문 눈이 얼어 있어 미끄러운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생전 처음 오는 지역의 지하철 역을 찾아 조심스럽게 걸었던 것이 내가 신촌에서 했던 일의 전부였다. 고의는 아니었으나 하필 가족 행사가 겹친 날이었으므로, 부모님은 논술 시험을 망친 수험생의 전화를 제때 받을 여유는 없으셨다. 학교의 후문부터 신촌역까지 각국의 언어로 새겨진 인사말을 밟아 누르면서 나는 길가를 최대한 빠르게 벗어났다. 짧은 시간동안 몇 번이나 모르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힐 때마다 여기에 두 번 다시는 올 수 없겠거니 하는 다소 서글픈 짐작은 확신을 더해갔다. 저마다 바쁘게 갈 길을 가는 행인들은 모두 내가 망친 시험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존재들처럼 보였다. 어쩐지 들뜬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는 구름같은 사람들. 흩어졌다 모이는 그들 속에서 나는 완벽하게 혼자였다.
당시의 나는 신촌의 모든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다소 촌스러울 정도로 유플렉스 근방을 두리번거렸던 이유는, 신촌과의 만남은 결국 일회적인 경험에 불과하리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이 공간 안에 내 자리가 있을까? 내가 언젠가-나중에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라도-여기에 다시 오게 될 일이 있을까? 그 날 인파 속에 파묻혀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면서도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잔잔히 남아있는 아쉬움과 뜻 모를 짜증, 채 사라지지 않은 시험의 여운으로 여전히 심장은 쿵쿵거렸다.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일종의 설렘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금세 그날의 숱한 인파와 높은 프렌차이저 건물들, 얼룩덜룩한 눈뭉치와 겨울 공기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높은 나무 위의 신 포도를 올려다보는 여우처럼 결코 가질 수 없는 어떤 공간에 오래 집착하는 일은 피곤했다. 미련만큼 소모적인 감정도 없는 법이므로, 당시의 나는 아직 코끝에 남아 있는 찬바람이 시큰해서 지하철을 타고 나서도 거칠게 몇 번이나 문질렀을 뿐이다.
밤, 신촌
아무튼 신촌이란 거대한 포도나무 농장에서 도망쳤던 일이 무색하게도 나는 4년째 학교를 잘만 다니고 있다. 밤새 술을 마시고 놀기도 하고, 각종 약속을 뭉텅이로 잡기도 하고, 노래방이나 보드게임 카페를 전전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양가감정을 엉성하게나마 풀어내며 글까지 몇 편 썼으니 이만하면 어색했던 첫만남과 비교했을 때 신촌과 제법 친해진 게 아닐까 싶다. 이제와서 내가 현실에 안주하는 성격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겠다. 나는 새로운 것이 부담스럽고, 변화하는 것에 일일이 적응하는 것이 귀찮고, 다소 좀스럽게도 불편한 첫인상은 혼자 오래 가지고 낯을 가리는 편이다. 하지만 Special K나 ROCKY HORROR PICTURE SHOW나 신촌의 처음이 그랬듯이, 대상에 대한 내면의 반발이 격렬할수록 후에 가지게 되는 애착이 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오직 나만의 변덕스러운 특징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급강하는 롤러코스터처럼 변화하는 애착의 순간을 일일이 기억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까? 같은 것을 보는 나의 시선이 지금 와서 이전과 다름을 느낄 때 나는 조금씩 놀란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귓가를 울리는 No hesitation, no delay. You come on just like ‘Special K’, 천지창조가 그려진 수영장을 헤엄치며 “Don’t dream it, be it.” 하고 유혹하는 프랭키, 신촌의 몰려다니는 인파와 24시 불빛이 들어오는 간판은 이전과 같지만 또 완전히 다르다. 내가 변한 것인지, 변했다면 얼마나 변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첫글 쓰기 직전에 찍었던 벚꽃 사진. 결국 마땅한 글을 찾지 못해서 갤러리에 어쩡쩡하게 들어 있었다.
처음이란 으레 마지막과 통하는 법이므로 신촌과의 첫만남을 마지막 글에서 언급하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여전히 신촌은 시끄럽고, 그 안에서 나는 유령처럼 부유한다. 첫 글을 쓴 이후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도 이 감상은 크게 변하지 않은 듯 하다. 나는 신촌의 인파를 폴터가이스트 현상의 일종에 비유했었지만, 실은 그들 사이를 떠다니는 내가 폴터가이스트가 아니었을까 하는? 아주 약간의 사고의 전환을 제외하면 그렇다. 신촌은 신촌대로, 나는 나대로, 우리는 아직까지도 나름 잘 지내고 있는 중이다. 문득 떠오르면 나를 반갑게 만드는 Special K의 기타 전주나 ROCKY HORROR PICTURE SHOW의 오프닝 이미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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