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 임시저장(3)
이 아이는 커서.. – 임시저장 (1)
<금쪽같은 내 새끼> 애청자로서 꼬맹이 시절을 진단해보면, 나는 태어나길 ‘기질이 예민한 아이’였던 것 같다. 순하디 순했던 오빠 다음으로 태어난 나는 감당 못할 정도로 울었다고 한다. 단어 하나에 혼자 마음 상하기도, 수학 단원평가 같은 작은 시험에 긴장해서 배앓이를 하기도 했다. 주변을 얼마나 의식하고 눈치 보는지 체육대회에서는 전교생 모두가 한 번씩은 하는 달리기에도 긴장해 아침부터 토하고 양호실에만 있는 날도 있었다. 또 시끄러운 소리를 싫어하고, 노랫소리가 뚝 끊기는 게 싫어 볼륨을 줄여서 노래를 끄는 습관까지도.
이 아이는 커서.. 락을 즐겨듣는 어른이 됩니다.. 그리고 좀 더 대범해져서 하루 정도는 쿨하게 자체 휴강하고, 거짓말에도 아주 조금 능숙한 어른이 되었다. 예전 같으면 글을 써서 올리는 일은 상상도 못 했겠지만 이렇게 에디터로 활동하기도 하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글이 올라가는 날이면 일주일 전부터 잠을 설치고, 사람을 만나기 전엔 할 수 있다! 최면(Hello, Hi.. My name is.. Um)을 걸어야 하지만 말이다.

Deaton’s Meditation: 명상으로 최면 거는 중. 할 수 있다!
고양이 – 임시저장 (2)
제주도 본가에는 애꾸눈 고양이가 산다. 이름은 여름이, 애칭은 윙크 내지 애꾸. 주먹만치도 안되는 밤송이를 데려다가 한 달을 밤낮없이 분유 먹여가며 예쁘게 키워놨더니, 서울에 올라가버린 언니를 한달만에 보는 눈빛이 버르장머리가 없다. 너 배신이야. 먼 발치에서 나에게 등지고 식빵굽는 녀석에 허공에서 꿀밤 한 대를 때리며 일격을 날렸다. 그래도 일주일 내내 꼭 붙어 놀아줬더니 그새 다락방에 올라와서 같이 자는 모습이 흐뭇했다. 그렇게 휴가를 잘 보내고 서울에 올라왔는데 걸려온 전화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여름아, 여름아, 골아도 안보영게 혼자 다락방에 가 있는 거 아니?’* 아차. 사랑하는 것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내가 없어도 나의 빈자리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게 아닐까. 그 조그만한 마음 한 구석 차지하겠다고 애정 공세 펼쳤던 내가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1순위가 아닌 게 섭섭할 일만은 아니구나.
* 여름아, 여름아 불러도 안보이더니 혼자 다락방에 있더라?

올 때부터 하얗게 변해버린 오른쪽 눈이 있다. 살아난 게 기적이라는 이유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느 날, TNR*을 위해 우리가 잡아 놓은 길고양이를 데리러 온 고양이 단체 팀장님이 집에 들렸다. 팀장님은 여름이의 눈을 보자 염증이 차서 계속 아팠을텐데 지금은 익숙해져서 아픈지도 모르는 거라고 했다. 전화로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눈물이 팡 터져 나왔다. 계속 두면 뇌에 영향이 갈 수도 있다는 말에 급하게 안구 적출 수술 날짜를 잡고 제주도에 내려갔다. 수술이 끝나고 돌아온 여름이는 그렇게 애꾸가 되었다. 생전 하지도 않던 하악질을 하는 애를 두고 다시 서울에 올라오려니 자꾸만 눈물이 나고 마음은 얼마나 불편한지. 집에서 보내준 사진을 보면 금방 또 날아다니는 모습에 웃다가, 또 눈을 보면 안쓰럽다. 그러다가도 ‘야인 무산지 나만 보면 물엉 가버렴쪄.’** 다시 앙앙 발을 물기 시작했다는 제보에 으이그.
* TNR: 길고양이 중성화를 위해 포획하고 풀어주는 활동
** 얘는 왜인지 나만 보면 물고 가


빨간 잠망경 앞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은근히 쌀쌀한 날씨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친구를 기다리는데, 시선이 느껴진다. 고개를 올려 눈을 맞췄다. 너도 외눈이구나. 벨롱하고* 투명해서 거울처럼 내가 다 비치는게 참 닮았네. 등을 한껏 구부린 것도 닮았고. 페인트가 얼룩덜룩하네. 우리집 꼬맹이도 털이 듬성듬성해. 그렇구나. 그렇게 너를 찾던 사람들이 집으로 다 가버리면 너도 섭섭하구나 응..응..
* 반짝거리고
섬 – 임시저장 (3)
서울 자취방에는 섬이 있다.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나는 섬. 썰물이 지나가면 물 아래 잠겨 있던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섬. 나는 이미 몇번 겪어본 꿀렁꿀렁한 썰물의 전조증상을 부지런함으로 이겨보겠다 했다. 산책도 하고 이불 빨래도 해보고 부지런히 책도 읽으며 자기 전엔 좋아하는 작가의 루틴을 따라 베갯잇에 향수도 뿌렸다. 좀 더 에너지를 쏟아보자. 옷장에 있는 옷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 정리한 옷장은 건들 게 없었지만 전부 끄집어냈다. 반팔은 개어두고, 니트는 엄마에게 배운 방법으로 예쁘게도 접어봤다. 절기별로, 또 자주 입는 순서대로 정리해 한 곳에 모아두고는, 이제 넣기만 하면 되는데, 넣기만.. ‘넣기만’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되었다.
초라한 감정들과 함께 뭉쳐진 옷 뭉텅이는 그렇게 섬이 되었다. 열심히 가꾼 황금빛 모래사장과 예쁜 조개 껍데기들이 썰물에 다 휩쓸려나가고 나면 그 자리엔 눅눅한 갯벌이 남아 내 발을 옭아 맨다. 아 무기력하다. 섬을 피해 걸레질을 할 때도, 빙 둘러가기 귀찮아 그 위를 뛰어 넘어가면서도 ‘언젠가 해야지, 언젠가는 해야지..’. 설거지를 할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양치할 때도 거슬리기 시작할 즈음 가만히 노려보고 있자니 이제는 무기력하기보다 마음 한 구석에 부아가 치미는 것이다. 발이 푹푹 빠지는 갯벌을 겨우 걸으며 하루 이틀을 전전하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건가 싶어, 이놈의 집구석 나가버려야지.
오랜만에 햇빛을 보자 세상이 일렁이고 귀는 먹먹했지만 날씨는 아주 좋았다. 때로는 어떤 위로보다도 짜증이 돌파구가 되기도 하는구나. 날씨가 참 좋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노래를 고르다, 엄마한테 전화나 해볼까. 분명히 엄마가 ‘그럴 땐 그냥 확 넣어버려!’ 라고 하면, ‘나도 그러고 싶어!’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럼 엄마는 ‘그래~ 그럴 때도 있는거지!’ 라고 하겠지. 나를 잘 아는 엄마는 분명 그럴 것이다. 그 말이 듣고 싶지만서도 선뜻 전화하지 못하고 고민하다 보니 버스가 왔다. 연세로에 내려서 투썸 플레이스에 가야지 생각하고 멍 때리는데 거의 도착했을 즈음 평소 노선과는 다른 방향으로 꺾어버리는 버스에 당황스럽다. 지도앱에서 다시 버스 번호와 목적지를 확인해보지만 이 버스가 틀림없는데. 허망하게 바로 다음 정류장에 내려서 전자 시간표를 올려다 보는데 ‘차없는 거리’ 기간이란다.

불규칙하고 습관이 없는 나에게는 조금의 습관과 규칙이 도움이 된다. 조금의 의무감과 한걸음이라도 쓸모없이 걷지 않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해내기 쉬운 것들이다. 아침엔 제철과일 챙겨먹기, 월요일엔 장보기, 수요일엔 분리수거, 목요일은 잔치 회의, 그리고 금토일은 이제.. 차없는 거리! 익숙하다가도 때로는 무섭기도 한 썰물은 언젠가는 물러가고 물이 차올라 섬은 다시 보이지 않을 것을 알기에. 조금만 규칙적인 바람을 불어넣으면 밀물이 다시 번쩍이는 모래를 품고 밀려올 것을 알기에 좀 더 의연하게 기다려보는 것으로 하자.

신촌에도 섬이 있다. 금, 토, 일에 썰물이 오고나면 빨간 고깔콘이 군데군데 설치된 긴 섬. 2호선부터 경의선을 잇는 연세로에 물이 빠지면 그 속에 잠겨있던 섬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섬 위를 밟고 지나가고 초록색 대중교통선은 저 멀리로 우회한다. 아무리 큰 배라도 물도 없이, 섬 가운데 가로질러 갈 수는 없는 것처럼 대단한 의지로도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겨낸다’라는 말이 성립할 수 없는, 그냥 그런 때가 있는 것들 말이다. 집에 돌아와 양치하며 섬을 한참 들여다보다, 오늘은 아니더라도 곧 파도가 밀려들어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세로도 월요일이면 다시 물이 채워져 섬은 잠기고 잔디색 배가 사람들을 태우고 그 자리를 지나가는 것처럼, 뻘에 잡아먹히지 않게 부지런히 배회하다보면 곧 나에게도 다시 따뜻한 모래와 예쁜 조개껍데기가 채워지겠지!

조금의 규칙 불어넣기: 아침에는 제철과일
누가 보지도 않는 비공개 블로그에 임시저장이라니, 참 나답다 싶었다. 어쩌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다 붙잡고 있는 게 나를 아주 잘 설명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자고 마지막 글에 이렇게 정리가 안된 폭탄들을 던져버리는지, 글 하나 올리는 것에 발발 떠는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 나조차도 알 수 없다. 우물쭈물하고 자주 배앓이를 하던 나에게 나 이렇게 머리가 컸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멋있는 사람들과 좋은 글들을 얻은만큼 개인적으로도 성장했다는 마무리를 하고 싶은 걸지도. 뭐, 성장이라고 부르기도 뭣하지만.
p.s 비어버린 목요일 잠시 방황하더라도 곧, 다시 그 자리가 빈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될테니까,
…
함께 벌입시다, 잔치!
업로드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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