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 이상한 신촌의 앨리스
나른한 4월 오후. 노고산 중턱에 위치한 서강대 로욜라 도서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나에게 졸음이 몰려왔다. 잠도 깰 겸 아끼는 소설책을 들고 도서관 앞 로욜라 동산으로 갔다. 말로만 듣던 로욜라 동산의 토끼도 봄기운을 즐기는 중이었다.

그런데 나에게 다가온 로욜라 토끼가 소설책 페이지 한 장을 들고 도망쳐버렸다!
사라진 토끼를 이리저리 찾아다니다 경의선 책거리까지 와버렸다. 어라? 여기엔 체셔가 여러 마리 있다.
“ 체셔야! 나 어느 쪽으로 가야 하니? ”

경의선 책거리의 체셔는 무섭지 않고 귀엽다…
“ 그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에 달렸지. 어디로 가든 상관없겠네. ”

경의선 책거리의 입구
“ 경의선 책거리는 녹슬어버린 기찻길에 열차들이 영원히 정차해있는 곳이지. 지금처럼 봄이 한창일 땐 꽃눈이 내리기도 한단다. 열차들 속에 작가들이 산단다. 찰나의 순간을 좋아하는 이들이 영원히 멈춰버린 곳에 모인 거지. 꽃잎과 사람 모두 찰나의 순간에 아름다운 법이야. ”
말하는 고양이를 뒤로하고 정처 없이 걷다 보니 환상적이지만 아늑한 공방이 나왔다. 동화 속 인물들을 인형으로 만들어 생명을 불어넣는 인형사의 집이었다. 그곳엔 앨리스가 살아있었다.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2004년부터 구체관절인형부터 관절 없는 인형까지, 다양한 인형을 만들어온 인형작가 구기윤입니다. 경의선 책거리에서 ‘사자와 물고기’라는 갤러리를 운영하며, 인형을 만들고 있어요.

경의선 책거리는 어떤 곳인가요?
책에 관해서 대중에게 좀 더 다가갈 수 있도록 책과 관련된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주는 공간이에요. 현재는 비영리민간단체 ‘비엠’이 위탁운영 중입니다. ‘비엠’은 책거리에서 문화 예술에 관한 다양한 전시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총괄 운영하면서 지역 발전을 위하고 있다고 해요.
저는 책에 관한 전시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인형전시, 그림, 목공예와 같은 예술 관련 갤러리도 많더라구요. 이 갤러리들이 추구하는 하나의 목표가 있을까요?
사실 경의선 책거리 주최 측은 책과 문화 예술이라는 하나의 통합적인 컨셉을 생각하는듯해요. 하지만 부스마다 보여주고자 하는 이야기가 조금씩 달라요. 비영리단체인 ‘비엠’이 운영 중이지만, 각각의 부스는 예술 활동을 위해 영리를 추구하구요. ‘아티스트 9’라는 예술인을 위한 장소도 있고, 레고 부스인 ‘핸즈 온 소프트’, 그림책과 관련해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 놀이터’도 있어요.
그러면 작가님은 어떻게 경의선 책거리까지 오게 되셨나요?
2004년에 인형전시를 처음 시작해서 2007년에 추가 제작을 하며 전시를 이어왔어요. 유동인구가 많은 경의선 책거리에서 기회를 잡아보고 싶어 여러 번 지원했지만 심사가 까다로워 6월, 8월, 11월 3번에 걸쳐 들어오게 되었답니다.
갤러리에 대해서 소개해 주세요!
경의선 책거리라는 점을 생각해서 인형에 동화를 접목시켰답니다. 동화에 나오는 인물들, 그러니까 주인공이든 주변 인물이든 동화 속의 사람들을 인형으로 만들어 생명을 불어넣고 있어요. 이번엔 <앨리스, 내 안의 환상>이라는 전시를 진행 중이에요. 고전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여러 인물들이 인형으로 탄생한 걸 보실 수 있어요. 요 앨리스 인형들은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 네버랜드 픽처북 뮤지엄이던가요? 그곳에서 스승님 산하 의뢰를 맡아서 시작하게 된 프로젝트입니다. 프로젝트의 일부를 맡았다가 앨리스 이야기가 파고들수록 재미있어서 관련 작품을 늘려나갔어요. 2004년부터 시작해서 2007년에 작품을 추가하고, 지금의 전시로 이어졌답니다.

갤러리 내부
그럼 <앨리스, 내 안의 환상>은 어떻게 기획하게 되었나요?
많은 사람들에게 디즈니의 앨리스가 뇌리에 박혀있잖아요. 귀여운 캐릭터와 밝고 환상적인 분위기.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는 그런 이미지요. 그런데 저는 디즈니스럽지 않은 앨리스, 저만의 앨리스를 만들려고 노력한 거 같아요. 모자 장수도 좀 더 나이가 들어있는 중후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크로켓을 할 때 앨리스가 들었던 홍학도 개성 있게! 특히 쐐기벌레는 인도의 현자를 표현했어요. 책 속에서도 그렇지만, 시들어가다가 번데기를 거쳐 나비가 되어 날아가잖아요? 새로운 삶을 살기 직전 쐐기벌레의 모습을 표현하려고 노력했어요.

인도 현자의 모습으로 표현한 쐐기벌레
인형들을 구경하니까 어릴 때 읽었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가 다시 생각나요. 얘네가 정말 이렇게 생겼었나? 이런 이미지였나 하면서요.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다시 읽고 싶기도 하네요.

카드 병정? 이렇게 귀여운 애가 있었나…?
그렇죠. 막 ‘카드 병정? 이런 애가 있었나?’ 이런 얘기를 아저씨가 구경하시면서 하시더라구요. 그런 얘기도 간간이 들으면 참 재밌어요. 이 전시의 장점이 동화와 인형을 접목시킨 거다 보니까 사람들에게 다가가기가 쉬운 것 같아요. 또 전시를 본 후에 책을 다시 읽어보겠다는 분들도 많이 계시더라구요. 바로 그런 포인트를 노린 거기도 하답니다.
인물을 인형으로 형상화하려면 동화를 꼼꼼히 봐야 할 것 같아요.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매력 포인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사실 앨리스 이야기가 요즘 기승전결로 보면 잘 만들어진 건 아니에요. 워낙 여러 이야기들이 순서도 없이 계속 나타나잖아요. 그러다 보니 처음 읽을 때는 꾸준히 읽어 나가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장면 하나하나를 짚어 나가다 보면 재미가 있고, 언어유희도 굉장한 소설이더라구요. 동화임에도 주석도 엄청 많이 달려있어서 접근도 조금 힘들구요. 하지만 그 깨알들까지 알게 되면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 본 동화를 생각했던 저에게 앨리스가 조금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어른용 동화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럼 앨리스 이야기를 자세히 본 입장으로서 인상적인 장면을 꼽자면 무엇일까요?
마지막 부분이요. 처음에는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서 그 흐름을 따라가기만 하거든요. 체셔한테 길을 물어보는데 체셔가 두 길 다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걸 순응해서 따라가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것에 대해서 주저하는 모습이 초반부에 많이 나와요. 상당한 고난을 겪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카드 병정과 여왕에게 ‘너희는 카드일 뿐이야’라고 말하게 돼요. 그러자 앨리스를 괴롭히던 카드 병정과 여왕이 카드가 되어 날아가고 꿈에서 깨게 됩니다. 그 부분이 자기 의견을 주장하는 장면이어서 주체성이 보이고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인형들을 보면 신비롭고 환상적이기도 한데요, 전시의 주요 타깃층이 있나요?
인형들을 보시면 알겠지만, 인형들이 마냥 귀엽지만은 않기도 하고, 동화 속 인물을 재현한 거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보다는 책을 한 번 읽어서 내용을 알고 계신 분들을 주요 타깃으로 하고 있어요. 늘 알던 것과, 내가 읽었던 것과 또 다르네. 하면서 동화뿐만 아니라 저의 작품에도 더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 바람이죠.
앞 질문과 이어지기도 하는데요,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바라는 점이 있나요? 사람들에게든, 예술에게든…
사실 인형작가는 인형 자체를 판매해서 수익을 얻기는 힘든 일이에요. 조금 현실적인 이야기지만 예술 활동을 이어나가려면 수익이 어쩔 수 없이 있어야 하죠. 그래서 저희 갤러리도 보시면 앨리스와 관련된 엽서나 파생 상품들을 개발해서 판매하고 있어요. 저는 인형 만드는 일을 좋아해서 활동을 계속하고 싶기 때문에, 저의 후속 인형들을 보고 싶다면 엽서와 같은 파생 상품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게 활동 후원으로 도움이 된답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관련된 파생상품
예술 활동을 이어가고 싶다는 바람이 강하신 것 같아요. 그럼 인형 제작의 첫걸음으로 돌아가서, 인형을 만드시게 된 계기가 무엇일까요?
제가 대학 졸업할 때쯤에, 인형 붐이 일었어요. 언젠가 만들어봐야지 하다가 학원을 들어가게 됐죠. 그때 선생님이 상품이 아니라 전시 쪽으로, 작품성 있는 인형을 만들어 활동하시는 분이었어요. 그 영향을 받아서 예술성 있는, 이야기를 담은 인형을 만들려고 노력하게 되었어요.
사실 인형 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제가 저번 가을에 체코에 교환학생을 다녀왔거든요. 체코가 마리오네트가 유명하더라구요. 혹시 체코 인형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신지 궁금해요.
체코의 마리오네트를 보면 화려하고 또 인형 문화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끼고 노력하는 게 보여요. 이에 비해 한국에서 ‘인형’하면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라는 인식이 있어요. 인형이 꼭 장난감이 아니라 예술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인식을 좀 더 높였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요. 또 구체관절인형이 일본의 제작방법을 구체화해서 한국으로 들여온 거거든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국적인 개성을 담아서 인형을 제작하면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인형 문화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어린이 문화가 아니라 넓은 마음으로 인형을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체코의 마리오네트 인형
인형에 어떤 종류가 있나요?
우선 전형적으로 구체관절인형이 있어요. 목, 팔, 어깨, 손목, 대퇴부, 무릎, 발목까지 모든 관절이 있는 인형이죠. 다음으론 인형사의 입장에서 필요한 부분만 빼고 관절을 몇 개 생략한 인형도 있어요. 또 관절이 따로 없는 오브제 인형도 있죠. 마지막으로 비스크 인형이 있는데, 구워서 만드는 뽀얀 도자기 인형이랍니다. 가마에 4-5번 이상 구워서 나오기 때문에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인형이에요. 관절 인형들은 복제가 불가능하지만 비스크 인형은 틀을 떠서 만들기 때문에 복제가 가능하다는 게 특이한 점이랍니다.

(왼쪽) 상단에 위치한 도로시 인형이 구체관절인형 (오른쪽) 좌측에 위치한 인형이 관절이 몇 개 생략된 인형, 우측의 나머지 4개 인형이 오브제 인형들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인형이 있는지 몰랐어요. 생김새도 그렇고 관절도 있는 인형의 특징을 보니까 진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혹시 만들 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만드시나요?
이미지를 생각할 때가 많아요. 보통 연예인을 생각하면서 만드는데, 연예인의 얼굴보다는 느낌, 분위기를 생각하는 편이죠.
그럼 갤러리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인형이 있나요?

트럼프 나라에서 홍학 채로 고슴도치 공을 치는 앨리스
홍학을 든 앨리스 인형이요. 홍학으로 크로켓을 하는 앨리스를 표현했어요. 사실 이 전시의 시작이 된 인형이에요. 우여곡절도 많았어요. 흰 드레스에 빨간 리본이었다가 앨리스가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듣고 파란 드레스로 바꿔도 보고…. 이 인형 덕분에 ‘돌모아’라는 인형제작회사에서 판매 인형도 제작하고 그랬죠.
예술로서의 인형에 사랑이 가득하신 거 같아요. 그럼 예술이란 작가님께 어떤 존재인가요?
애증의 관계죠. (웃음) 미대를 나와서 주변 친구들도 다 예술을 하는데, 사실 힘들어요. 대학교 3,4학년 때 인형을 계속 만들다 벗어난 적도 있었죠. 수학 교사를 하기도 했는데, 수익은 안정적이어서 좋았지만 결국엔 예술로 다시 돌아오게 되더라구요. 막 다시 하고 싶다기보다는 완전히 놓지 못한 마음, 미련 때문에…. ‘한 번 더 해볼까…?’ 이런 마음이요. 다 떼버리지 못했던 마음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 같아요.
이런 인형들을 경의선 책거리에서 보는 게 정말 영광입니다. 작가님께 책거리, 신촌이란 뭘까요?
기회가 있는 곳이요. 다양한 연령대의 분들이 전시를 봐주시는 곳이 많이 없어요. 그런데 책거리에선 감상평을 남겨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소통이 되는 느낌입니다. 예술을 계속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힘이 돼주시길 바랄 뿐이에요.
전시를 구경하고 작가님과 얘기하다 보니까 이 전시의 매력을 알 것 같아요. 이야기 속 주인공뿐만 아니라 여러 주변 인물들도 섬세하게 형상화하니까 동화를 재해석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기억 속에 흐릿하게 남아있는 동화를 다시 펼치고 싶은 마음이에요. 혹시 다음 후속 작품에 대한 계획이 있나요?
앨리스 인형이 전시되고 있는 뒤편에 <오즈의 마법사> 인형들이 있어요. 좀 더 만들어서 추가할 예정입니다. 또 <라푼젤>도 있고, <장화 신은 고양이>도 있어요. 특히 이 고양이는 얼굴은 사람이지만 고양이 귀가 있고 고양이 화장을 한 독특한 인형이랍니다. <백설공주> 인형도 있는데 <백설공주>의 검은 여왕에 집중해 봤습니다. 특히 비스크 인형으로, 하나의 틀에서 3개의 같은 인형을 복제했지만 세 인형 모두 분위기가 다 다른게 매력입니다.
앞으로 자주 놀러 오세요:)

인형사님과 얘기를 나누는 동안 줄곧 공방 뒷문을 지키고 있던 카드 병정들과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난 뒤 공방을 나올 때에는 모두 누군가의 소망을 담은 카드가 되어 나무에 묶여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나를 감싸고 있던 신비로운 책거리의 분위기가 선선한 봄바람에 날아갔다.
다시 눈을 떠보니 로욜라 동산이었다. 포근한 바람에 소설책의 한 페이지가 팔랑이고 있었다.

THE END
사자와 물고기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 37길 35 5번 갤러리
화-일 11:00-20:00
(월요일 휴관)
<앨리스, 내 안의 환상> 전시 중

경의선 책거리 홈페이지 ‘책거리 배치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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