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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2023 · 05 · 08

머금으며,

Editor 누하

찰나로 머물다 떠나가는 것들은 유체(流體)와 같다. 코끝을 간질이고는 저 멀리 사라지는 바람이 그렇다. 혀끝 위에 맴돌다가 식도 깊숙이 미끄러지는 한 호흡의 음료가 그렇다. 그렇게 흘러가 버리는 것들은 어째서인지 날 두렵게 만든다. 꼭 상실을 맛보는 기분 같아서일까, 나는 순간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기 위해 숱한 밤을 분투하며 살아왔다. 무심히 손끝을 빠져나가는 것들을 막아보겠다며 울며 댐을 짓기도, 연필, 카메라, 종이, 색연필 등으로 잊지 않겠다는 서약을 빼곡히 써 내려가기도 했다.

 

하지만 댐은 금방 무너지고, 흑연은 번지고, 필름은 빛이 바래어 버리기 십상이었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결국 나는 스스로 속을 깎아 깊은 구멍을 만들었다. 흐르는 강 옆의 작은 구멍이 되어 내 몸에 강의 일부라도 담고 싶었던 것이 이유다. 머금는 것이다. 지나가는 것들을 모조리 담아낼 수 없다면 단 몇 움큼의 순간이라도 머금는 웅덩이가 되고 싶었기에.

 

비단 나만이 이렇게 악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생각보다도 많은 웅덩이들이 가까이에 있었다. 그들은 같은 강 옆에 있다 해도 속에 머금고 있는 것들이 나와는 달라보였다. 난 그들이 머금고 있는 것들이 궁금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물길을 해체하고 뭉치고, 얼리고 녹이고를 반복하여 자신만의 가락을 만들고 있었다. 마치 음표를 마구 긁어모아 자기의 방식으로 배치한 음악가처럼. 그 웅덩이들은 꼭꼭 잡아둔 물살들을 토닥여 신촌 곳곳에 꽂아두었고, 나는 신촌의 길가에서 참방대는 선율을 따라 길을 나섰다.

 

 

 

1

카페 파파 – 곽한정 작품전(2023.05.01-05.30)

 

커피향, 자판 소리.

 

이들로만 가득 차 보이는 공간 속에 웅덩이가 숨어있다. 그는 공간의 입구에 앉아 선율의 한 자락을 보여주고 있었다. 길 위의 사람들과 눈을 맞추면서. 

하필, 나와 눈이 맞았다. 난 다른 이의 선율을 감상할 때 마냥 담담하지 못하다. 묘하게 긴장한 몸을 이끌고 살며시 안으로 들어갔다.

 

민트 케이스에 담겨있는 알록달록한 곡들. 섬세하고 다채로운 시선으로 순간을 머금은 흔적들이 보였다. 다음 달 1일이 되면 또 다른 웅덩이가 온단다.

 

커피와 사람만 가득한 것이 아니었구나. 다시 써 내려간다.

 

커피향, 자판 소리, 웅덩이.

 

 

 

2

갤러리 아미디 – The Blue Moon (2023.05.02-05.07)

 

파란 곡을 담은 하얀 케이스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매번 끼니를 챙기러 가는 골목 한구석에 버젓이 꽂혀있었으니 말이다. 

이렇게나 대놓고 있었는데 한번도 보지 못했다니. 나 자신, 참 대단하다. 평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따라가는 건 내가 고여있기 쉬운 구멍이기 때문일까. 스스로의 안에서만 맴돌다 보니 명곡을 놓칠 뻔했다.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서 어딘가로 들어가면 항상 더 긴장이 된다. 어떤 웅덩이가 있을까, 오늘은 없으려나, 안에는 사람이 많을까, 고민에 고민을 하며 한 발 한 발을 내딛는다.

 

신이 난다. 이토록 찬란한 물결이라니! 하얀 케이스 속 파란 곡을 열심히 듣다가 다른 곳으로 가는 법을 잊을 뻔했다.

 

바다를 꿈꾸는 웅덩이는 자신의 안에 해파리도, 고래도 키운다. 

 

‘바다는 젖지 않는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담담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웅덩이, 바다.

곧 이 파란 레코드는 하얀 케이스에서 빠지게 된다. 다음엔 어떤 레코드가 끼워질까.

 

 

 

 

 3

앤드뉴 갤러리 – 부가 가치 (2023.05.01-05.28)

 

퐁     당    퐁     당

여러 웅덩이가 모인 땅밑 공간이 있다. 그들이 머금고 있던 것들로 가득 찬 지하. 이들은 세상을 어떻게 머금었을지 궁금해 참을 수가 없다.

비둘기. 아니다, 사람인가?

그들이 잡고자 했던 순간은 무엇일까? 한참을 바라본다.

참 많은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장소였다. 슬프게도 이곳에 들어와서 나갈 때까지 방문자는 오직 나 하나뿐이었지만 말이다. 멋진 선율로 가득 찬 공간을 나서며 점점 거리 위 사람들의 소리가 가까워졌다. 레코드 소리가 꺼졌다. 모두가 앞만 바라보며 바쁘게 걷고 있었다. 내 뒤로 보이는 지하공간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4

공씨책방 – My Little Soft Sculptures (2023.04.10-05.09)

 

빽빽하게 겹쳐진 책들 사이에서 참방이는 소리가 들린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짙은 방 안에는 웅덩이가 숨겨둔 선율 조각들이 있다. 정말 상상도 못할 콜라보가 아닐까?

 

책장과 벽에 걸려있는 작은 액자들이 전시작품이다.

 

난 헌 책방 사이사이에 매달려 있는 선율을 이으며 레코드의 음악을 완성하려 노력했다. 그러다 눈치챘다. 벽에 걸려있는 작품뿐 아니라 이 책들도 누군가의 머금음이라는 걸. 진짜 바다에 온 기분이었다. 심해 깊게 가라앉은 묵직한 이야기들은 고요하게, 동시에 웅장하게 나를 감쌌다. 

나는 바다의 바닥에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났다.

 


 

 

5

신촌문화발전소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움직임 (2023.03.25-06.17)

 

신촌 꼭대기에 꽂혀있는 레코드. 여러 웅덩이들의 멜로디가 함께 울리고 있다. 글로, 소리로, 그림으로.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움직임’이 무슨 뜻일까? 모를 때는 슬쩍 설명을 찾아본다.

 

‘너는 찾고 있나. 이 냇가에서 기를 수 있는 것들을.

다 기르고 난 후의 일들을. 머무르다가 흔들리는 것들을.

이런 것들을 과거라고 생각할 수 있나. 기억이 되어 당분간 멈출 수 있나.

무음에 기대어 너는 냇가로 들어갔지. 네가 건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움직임.’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들의 고민이 나의 것과 너무나 닮아있어서. 가파른 언덕 위 작은 음악회는 1인 관객을 위해 신나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기대 없는 무심한 발걸음의 대가는 분에 넘치는 공감과 깨달음이었다.

그래,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움직임.

 

 

 

 

 

내가 웅덩이로 사는 이유, 다른 웅덩이들의 속을 헤엄치려는 이유.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순간을 머금고 싶었으며 다른 이들의 머금음이 궁금했다. 그렇게 찾아 나선 저마다의 변주는 나의 구멍 속 고여있던 물들이 다시금 찰랑이게 도와주었다. 하지만 혀끝에 씁쓸한 맛이 맴도는 건 왜일까. 아마도 자신의 것을 꺼내둔 웅덩이의 용기를 많은 이들이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인 듯하다. 어딘가 웅크린 웅덩이는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이야기를 건네기를, 또 건네받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어려운 것 없다. 그저 신촌 곳곳에 꽂혀있는 레코드판을 꺼내 듣기만 하면된다. 그러면 당신은 누군가의 머금음으로 퐁당, 초대받을 것이다.

 

 

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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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하

잔치의 시선으로 신촌의 장면과 사람, 장소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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