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금으며,
찰나로 머물다 떠나가는 것들은 유체(流體)와 같다. 코끝을 간질이고는 저 멀리 사라지는 바람이 그렇다. 혀끝 위에 맴돌다가 식도 깊숙이 미끄러지는 한 호흡의 음료가 그렇다. 그렇게 흘러가 버리는 것들은 어째서인지 날 두렵게 만든다. 꼭 상실을 맛보는 기분 같아서일까, 나는 순간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기 위해 숱한 밤을 분투하며 살아왔다. 무심히 손끝을 빠져나가는 것들을 막아보겠다며 울며 댐을 짓기도, 연필, 카메라, 종이, 색연필 등으로 잊지 않겠다는 서약을 빼곡히 써 내려가기도 했다.
하지만 댐은 금방 무너지고, 흑연은 번지고, 필름은 빛이 바래어 버리기 십상이었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결국 나는 스스로 속을 깎아 깊은 구멍을 만들었다. 흐르는 강 옆의 작은 구멍이 되어 내 몸에 강의 일부라도 담고 싶었던 것이 이유다. 머금는 것이다. 지나가는 것들을 모조리 담아낼 수 없다면 단 몇 움큼의 순간이라도 머금는 웅덩이가 되고 싶었기에.
비단 나만이 이렇게 악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생각보다도 많은 웅덩이들이 가까이에 있었다. 그들은 같은 강 옆에 있다 해도 속에 머금고 있는 것들이 나와는 달라보였다. 난 그들이 머금고 있는 것들이 궁금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물길을 해체하고 뭉치고, 얼리고 녹이고를 반복하여 자신만의 가락을 만들고 있었다. 마치 음표를 마구 긁어모아 자기의 방식으로 배치한 음악가처럼. 그 웅덩이들은 꼭꼭 잡아둔 물살들을 토닥여 신촌 곳곳에 꽂아두었고, 나는 신촌의 길가에서 참방대는 선율을 따라 길을 나섰다.
1

카페 파파 – 곽한정 작품전(2023.05.01-05.30)

커피향, 자판 소리.
이들로만 가득 차 보이는 공간 속에 웅덩이가 숨어있다. 그는 공간의 입구에 앉아 선율의 한 자락을 보여주고 있었다. 길 위의 사람들과 눈을 맞추면서.

하필, 나와 눈이 맞았다. 난 다른 이의 선율을 감상할 때 마냥 담담하지 못하다. 묘하게 긴장한 몸을 이끌고 살며시 안으로 들어갔다.

민트 케이스에 담겨있는 알록달록한 곡들. 섬세하고 다채로운 시선으로 순간을 머금은 흔적들이 보였다. 다음 달 1일이 되면 또 다른 웅덩이가 온단다.

커피와 사람만 가득한 것이 아니었구나. 다시 써 내려간다.

커피향, 자판 소리, 웅덩이.
2
갤러리 아미디 – The Blue Moon (2023.05.02-05.07)
파란 곡을 담은 하얀 케이스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매번 끼니를 챙기러 가는 골목 한구석에 버젓이 꽂혀있었으니 말이다.

이렇게나 대놓고 있었는데 한번도 보지 못했다니. 나 자신, 참 대단하다. 평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따라가는 건 내가 고여있기 쉬운 구멍이기 때문일까. 스스로의 안에서만 맴돌다 보니 명곡을 놓칠 뻔했다.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서 어딘가로 들어가면 항상 더 긴장이 된다. 어떤 웅덩이가 있을까, 오늘은 없으려나, 안에는 사람이 많을까, 고민에 고민을 하며 한 발 한 발을 내딛는다.

신이 난다. 이토록 찬란한 물결이라니! 하얀 케이스 속 파란 곡을 열심히 듣다가 다른 곳으로 가는 법을 잊을 뻔했다.

바다를 꿈꾸는 웅덩이는 자신의 안에 해파리도, 고래도 키운다.

‘바다는 젖지 않는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담담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웅덩이, 바다.
곧 이 파란 레코드는 하얀 케이스에서 빠지게 된다. 다음엔 어떤 레코드가 끼워질까.

3
앤드뉴 갤러리 – 부가 가치 (2023.05.01-05.28)

퐁 당 퐁 당
여러 웅덩이가 모인 땅밑 공간이 있다. 그들이 머금고 있던 것들로 가득 찬 지하. 이들은 세상을 어떻게 머금었을지 궁금해 참을 수가 없다.
비둘기. 아니다, 사람인가?
그들이 잡고자 했던 순간은 무엇일까? 한참을 바라본다.

참 많은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장소였다. 슬프게도 이곳에 들어와서 나갈 때까지 방문자는 오직 나 하나뿐이었지만 말이다. 멋진 선율로 가득 찬 공간을 나서며 점점 거리 위 사람들의 소리가 가까워졌다. 레코드 소리가 꺼졌다. 모두가 앞만 바라보며 바쁘게 걷고 있었다. 내 뒤로 보이는 지하공간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4
공씨책방 – My Little Soft Sculptures (2023.04.10-05.09)

빽빽하게 겹쳐진 책들 사이에서 참방이는 소리가 들린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짙은 방 안에는 웅덩이가 숨겨둔 선율 조각들이 있다. 정말 상상도 못할 콜라보가 아닐까?
책장과 벽에 걸려있는 작은 액자들이 전시작품이다.
난 헌 책방 사이사이에 매달려 있는 선율을 이으며 레코드의 음악을 완성하려 노력했다. 그러다 눈치챘다. 벽에 걸려있는 작품뿐 아니라 이 책들도 누군가의 머금음이라는 걸. 진짜 바다에 온 기분이었다. 심해 깊게 가라앉은 묵직한 이야기들은 고요하게, 동시에 웅장하게 나를 감쌌다.

나는 바다의 바닥에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났다.

5
신촌문화발전소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움직임 (2023.03.25-06.17)

신촌 꼭대기에 꽂혀있는 레코드. 여러 웅덩이들의 멜로디가 함께 울리고 있다. 글로, 소리로, 그림으로.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움직임’이 무슨 뜻일까? 모를 때는 슬쩍 설명을 찾아본다.
‘너는 찾고 있나. 이 냇가에서 기를 수 있는 것들을.
다 기르고 난 후의 일들을. 머무르다가 흔들리는 것들을.
이런 것들을 과거라고 생각할 수 있나. 기억이 되어 당분간 멈출 수 있나.
무음에 기대어 너는 냇가로 들어갔지. 네가 건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움직임.’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들의 고민이 나의 것과 너무나 닮아있어서. 가파른 언덕 위 작은 음악회는 1인 관객을 위해 신나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기대 없는 무심한 발걸음의 대가는 분에 넘치는 공감과 깨달음이었다.

그래,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움직임.

●
내가 웅덩이로 사는 이유, 다른 웅덩이들의 속을 헤엄치려는 이유. 그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순간을 머금고 싶었으며 다른 이들의 머금음이 궁금했다. 그렇게 찾아 나선 저마다의 변주는 나의 구멍 속 고여있던 물들이 다시금 찰랑이게 도와주었다. 하지만 혀끝에 씁쓸한 맛이 맴도는 건 왜일까. 아마도 자신의 것을 꺼내둔 웅덩이의 용기를 많은 이들이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인 듯하다. 어딘가 웅크린 웅덩이는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이야기를 건네기를, 또 건네받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어려운 것 없다. 그저 신촌 곳곳에 꽂혀있는 레코드판을 꺼내 듣기만 하면된다. 그러면 당신은 누군가의 머금음으로 퐁당, 초대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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