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비피엠 파이 앤 타르트 (그리고 우리의 신촌은 그리움)
안녕, 친애하는 당신.

오늘은 너에게 묻고 싶어. 동네를 떠나고 수년이 지난 지금, 너에게 여기 신촌은 어떤 의미야? 이른 새벽 거닐던 산책길이나, 밤을 지새우던 오래된 카페와 칵테일 바. 어스름히 머리 위로 내려앉다가 나뭇가지에 걸리던 조명의 온기를 기억해?
너무 센치하고 뻔한 질문인가. 아무래도 점점 멋이 없어지는 게 난 요즘 조금 외로운가 봐. 새삼스럽게 네가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사람인지 절실히 느끼는 중이야. 타인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아주 가끔은 나를 바라지 않는 상대에게 너무 많은 마음을 내어주려 하는 나. 그런 바보를 꾸준함과 진심으로 대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요즘 너 없이 사는 신촌은 그때보다는 조금 쌀쌀하고 해가 짧다. 뒤에 남겨지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그래도 나름 애써서 정붙일 구석들을 찾아가고 있어. 오늘 이렇게 쓰기 시작한 것도 너에게 알려주고 싶은 카페가 하나 있어서야. 지난 달, 연대 서문에서 나와 연희동 사러가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파이집이 생겼거든.

호기심에 처음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공간이 마음에 들었어. 따뜻한 우드 톤에 귀여운 듯 힙한 포스터와 턴테이블. 식물들과 이런저런 포스터. 딱 보아도 사장님의 취향이 잔뜩 묻어나는데, 나의 그것과도 많이 겹쳐서 반갑더라. 일단 한구석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부터 예사롭지 않았어. 아닌게 아니라 가게 인스타그램 계정을 찾아보니 매일 아침 그날의 플레이리스트 설명도 적어두시더라고.


사실 사장님도 음악을 하시는 분이래. 한눈에 보아도 남다른 분위기에서부터 대강 짐작은 가는 일이지만. (너무 멋쟁이셔서, 따뜻하고 순박하게 맞아주시는 특유의 태도가 아니라면 난 아마 말도 못 붙였을걸?) 이 장소의 이름이 BPM 인 것도 사장님의 활동명인 바늘(Baneul)과 파이(Pie), 그리고 음악(Music)에서 약자를 따오신 거라네.



이 얘기를 들었던 날 기숙사 방에 돌아오자마자 발매하신 노래들을 찾아 들어봤어. 역시나 서정적이면서도 트렌디한 감각이 느껴지던. 잘은 모르지만 재즈와 힙합, 알앤비 등등 이런저런 장르의 매력이 차분하게 한군데 모인 인상이야.

모여있다는 것. 이 카페를 설명하는 데 꽤나 좋은 키워드인 것 같네. 사장님이 좋아하는 것들을 모아 만든 장소이기도 하고. 또 사장님을 아끼는 사람들의 마음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한 것 같아. 주변에 예술을 하시는 분이 많다 보니 이곳의 디자인은 그런 지인들의 손길을 거쳤다고 하시더라.

또 여기는 아버지와 아들의 두 세대가 한 곳에 모이는 장소이기도 해. 몇 번 더 카페를 들락날락하면서 사장님께 듣게 된 창업 스토리. 원래 사장님 아버지께서 10년이 넘게 다른 장소에서 파이집을 하셨대. 그런데 아버님의 건강이 안 좋아지시면서 오래된 가게를 닫게 되었고, 아쉬운 마음에 사장님이 레시피를 이어받아 새롭게 파이집을 차리신 거라고 해. 건강이 많이 좋아지셨다는 아버님께서 가게에 나와 사장님을 도와주시는 모습도 종종 보고 있어. 부자가 이렇게 함께 일하는 건 사장님께도 처음이라고 하시던데. 너무 훈훈하고 부러운 장면이지.

이렇듯 단단한 인력의 원리로 이루어진 장소라서 그런지 벌써부터 사람들의 발길을 끄는 것 같아. 내가 요즘 많이 가깝게 여기는 누나는 모르는 새 나보다도 먼저 여기의 열성적인 단골이 되어있더라. 나도 꽤나 자주 이곳에서 사람들을 보는데, 얼마 전에는 형님 두 분과 왔다가 그분들의 친구들까지 합석해서 갑자기 로스쿨 번개모임이 되었던 기억도 난다.

그렇게 사람을 불러들이는 이곳의 따뜻한 마법을 목격하면서 나는 당신을 생각했어. 이런 얘기를 적어 보내면 당신도 여기로 이끌릴까? 오랜만에 신촌이, 그리고 내가, 그리워질까?

그렇다고 또 너무 부담 갖지는 말아줬으면 해. 우리에게 앞으로도 시간은 많으니까. 이곳 카페도 내가 느끼기에는 든든하게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줄 것 같은 걸. 여기 타르트 종류가 꽤나 다양한데, 아주 화려하고 색다르지는 않아도 기본에 충실하고 빠지는 데 없는 맛이야. (난 레몬이랑 청포도, 그리고 얼마 전 새로 나온 단호박 타르트가 특히 맛있더라.) 가격도 착한 편이고. 문을 열고 한동안은 쉬는 날 없이 운영하시다가 이제서야 격주로 한 번씩 쉬신다는 사장님의 성실함도 믿음직스러워.


이 편지를 쓰겠다고 사장님과 나눈 대화 중 가장 오래 기억에 남던 내용은 아무래도 연희동이 사장님의 고향이라는 얘기 일거야. 어릴 적 이 골목에서 자랐고 언젠가는 돌아오고 싶으셨대.
사실 나는 그 반대로 요즘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하거든. 한때 성장의 토양이 되어준 장소이지만. 오래 머물다 보니 이제는 여기에서 자꾸만 퇴행하고 노쇠하기를 반복하는 것 같아. 나 자신을 더 잘 알고 단단해지기 보다는 혼란스럽고 걱정이 늘어나는 일이야.

조만간 떠날 나에게도 이곳이 고향이 되어주면 좋겠어. 언젠가 안식이 필요한 날 추억하고 가끔은 돌아와 힘을 얻기도 하는. 그래서 아까 신촌이 어떤 의미냐고 물어봤다. 지금 멀리 있는 너에겐 이미 여기가 그런 곳이면 좋겠어서.

그래서 여기 카페는 어때. 좀 마음에 들어?
나도 곧 네가 있는 쪽으로 가야지. 다음에 만나면 우리 함께 그리워하다, 같이 돌아오자.
오늘도 읽어줘서 고마워. 그럼 안녕.
비피엠 파이 앤 타르트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 10길 19 1층 101호
10:00 – 20:00 (휴무일은 인스타그램 참조)
tel. 0507-1369-8242
insta. @bpm_pie



단단한 인력으로 이루어진 장소라는 말 참 좋다. 글 전체에서 밀물이랑 썰물이 보여. 내가 했었고 하고 있는 생각들이랑 비슷해서 편하게도, 또 조금 까슬거리게도 읽히네! 키튼님.. 글써주셔서그저감사합미다…
늘 사려깊게 읽어줘서 고마워! 우리도 언젠가 조만간 함께 귀향하기를 기원해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