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 김서정, 에디터 시나리
찬 바람이 불다가도 볕 드는 쪽으로 걸으면 마냥 춥지만은 않은 1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의 날씨와 꼭 닮은 서정을 화면 너머로 만났다. 처음 만날 때부터 회갈색의 매력을 지녔던 서정은 차분하지만 차갑지 않고, 다정하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특유의 문체로 보물같은 신촌의 공간들을 전하곤 했다. 사람 김서정으로부터 에디터 시나리까지 이어지는 사유의 결을 따라가 보자.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네, 안녕하세요. 저는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김서정이라고 하고요. 작년 하반기부터 잔치 플레이스 팀에서 ‘시나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에디터명을 시나리라고 지은 이유도 다시 한 번 설명 부탁드릴게요!
고등학생 때, 앞으로의 삶에서 저를 딱 잡고 이끌어 줄 좌우명이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를 생각하다가 ‘나답게’,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결론을 내렸죠. 인생이 한 편의 극이라면,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극작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Be a scenarist of your life’ 라는 다소 거창한 좌우명이 생겼어요. 이후 대학교 2학년 때 들었던 국문과 수업에서 교수님이 각자의 필명을 정해 오라고 하셨는데, 제 좌우명에서 따 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시나리스트’에서 앞 세 글자인 ‘시나리’를 따 오니 좀 귀엽게 느껴지기도 해서 ‘시나리’를 제 필명이자 에디터명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잔치에 들어오면서 더욱 애정을 갖게 된 이름이에요.

처음부터 시나리라고 소개받아서 그런지 몰라도, 시나리님의 이미지와도 너무 잘 어울리는 에디터명 같아요. 지난 학기 플레이스팀 에디터로 활동하셨어요. 플레이스팀에 들어온 계기가 무엇인가요?
일단 저는 1지망이 플레이스팀이었구요. 플레이스가 아니면 조금 아쉬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원래부터 공간을 찾아다니는 걸 되게 좋아했거든요. 혼자 계획해서 훌쩍 여행을 다녀 오는 것도 좋아하고, 친구들과 약속을 잡을 때도 먼저 맛집을 찾아서 소개해 주는 걸 즐기구요. 다른 사람들이 제가 소개해 준 공간을 마음에 들어할 때 정말 뿌듯하잖아요.
좋아하는 사람이나 장소와 함께한 순간 순간의 기억들이 제 삶을 되게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그 추억들을 어떤 형태로든 간직하고픈 마음에 글을 자주 써왔는데, 평소에 쓰던 글이 몇 줄 정도의 조각글이었다면 좀 더 긴 호흡의 짜임새 있는 글을 써보고 싶더라구요. 신촌에서 사랑하게 된 장소들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만의 언어로 표현해 알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플팀에 지원해서 활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맞아요. 글을 쓰기 위해 모색한 장소가 아니라, 애정을 갖고 있던 공간을 온전히 전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시나리님의 글은 늘 울림이 컸어요. 잔꾼들도 시나리님의 사유의 깊이가 굉장하다는 피드백을 자주 하는데요. 평소에도 생각을 많이 하시는 편인가요?
대체적으로 그런 삶을 살았던 것 같아요.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좀 줄이고 싶다는 생각..을 또 하며 살고 있네요.(웃음) 하지만 그 중에 삶을 좀 더 윤택하게 하거나, 살아감에 있어서 도움이 되는 생산적인 생각들도 없진 않았거든요. 삶이나 관계, 다양한 가치에 대해 깊이 있는 사유를 하며 살아가려고 노력은 하고 있어요.
평소에는 대화에서 쉽게 꺼내기 어려운 주제들 있잖아요. 예를 들면.. 왜 살아가는지, 어떤 것들이 나를 살아가게 만드는지. 무엇을 할 때 내가 가장 행복하고,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가치가 무엇일지. 어떻게 보면 좀 철학적인 고민들을 일부러라도 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그런 것들을 글로 남기는 것도 좋아하구요. 잔치에서 그런 사유를 나눌 수 있어서 참 즐거워요. 오히려 저는 다른 에디터들의 글을 보면서 ‘이 사람의 사유, 정말 깊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저에게서 그런 면모를 봐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네요.

‘시나리의 인생’을 담은 극에 제목을 붙인다면, 어떻게 붙이고 싶은가요?
질문을 받고 고민을 좀 많이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지을 수가 없어요. 제목을 붙이면 그 큰 틀 안에서 모든 이야기가 쓰여지니까 수정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질 것 같아요. 결말을 정해 놓고 사는 인생보다 새로이 개척하는 삶을 살고 싶거든요. 그래서 제 극은 아무래도 ‘제목이 없는 극’으로 마무리되지 않을까 싶어요. 다만 제가 쓰고 있는 극의 방향성만 대략적으로 언급하자면, 다른 사람들이 해 주는 조언은 감사히 듣겠지만 선택을 내리는 주체는 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고난이나 역경이 닥쳐 온다 해도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야겠더라구요. 아마 강인하게 이겨내는 삶을 담은 극이 되지 않을까요.(웃음)
하나로 국한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해 주셨는데, 진로에 있어서도 하고 싶은 것이 다양하게 많은 편이신가요?
이것저것 경험해보고 싶다는 쪽인 것 같긴 해요. 아직까지는 시간이 좀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웃음) 최대한 대학생일 때 넓은 범위의 경험을 쌓고 싶어요. 잔치에 들어온 것도 사실 저에겐 굉장한 모험이었거든요. 단순히 글만 쓰려고 들어온 게 아니라 그 안에서 뭔가를 얻어가고 싶었기 때문에 들어온 거고, 지난 학기 활동을 하면서 충분히 많이 얻은 것 같아요.
사실 잔치에 들어와서 뭘 얻을 수 있을지는 들어오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제가 내린 결정 중에는 과감한 편이었는데, 돌이켜 보니 계획하지 않고서 갑자기 던져보는 것들도 제 인생에 있어서 긍정적인 변화들을 많이 가져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잔치에 들어온 것처럼 기분 좋은 경험들이 있어서, 최대한 많은 것들을 체험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편이에요.
멋있어요. 알게 모르게 차곡차곡 쌓인 경험치들이 시나리님의 글에서 자연스레 묻어나오는 것 같기도 하구요. 한 학기 동안 총 4편의 글을 쓰셨어요. 각각의 글이 시나리님에겐 어떤 경험으로 남았는지도 궁금한데요!
음.. 일단 첫 웹진 글인 ‘연 바’는 가장 오랜 시간 고민하고 기획했던 글인 만큼 굉장히 애정이 있었던 것 같아요. 기획 단계에서부터 장소에 너무 국한되기보다는 제 자신이 좀 많이 드러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시나리’라는 사람의 사유라든지, 그 사람이 그 공간에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 같은 것들이요. 에디터 ‘시나리’의 방향성을 잡아준 첫 글이기에 정말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카페 27도씨’는 제 글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어요. 늘 선한 영향을 주는 사람, 도움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카페 사장님께서 제 글을 보시고 정말 좋아해 주셨거든요. 애정을 지닌 공간에 대해 너무나 정성스러운 글을 써 주어서 고맙다며, ‘선물 같은 글’이라고 말씀해 주셨을 때 더할 나위 없이 뿌듯했습니다.
실물잡지에는 ‘킬더유튜브’라는 공간을 담은 ‘청춘기록’이라는 글을 썼어요. 다이닝 바에서 뮤지션들의 공연을 보며 파스타에 칵테일 한 잔 곁들일 수 있는 곳이에요. 처음 방문한 날 대학생 밴드 공연이 편성되어 있었는데, 긴장과 설렘이 가득 찬 표정들이 꼭 제가 처음 무대에 올랐던 모습과 닮아 있어서 기분이 묘했답니다. 저 역시도 학교에서 밴드를 하고 있는데, 그걸 빼놓고는 대학생활의 청춘을 논할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제가 기타를 배웠던 이야기, 공연을 했던 경험, 첫 무대의 설렘을 떠올리며 ‘다른 누군가의 청춘의 첫 페이지가 쓰여지는 현장’을 목격했던 경험까지를 연결해서 쓴 글이에요. 제 경험과 맞닿아 있어서 애착이 많이 갔던 글이었죠.
팀글도 있네요. 팀글은 제 안에 있는 새로운 자아를 꺼내는, 재밌는 경험이었어요. 수염이 듬성듬성 자란 35세 정도의 아저씨 입장에서 쓴 글이거든요. 색다른 도전이었어서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아요. 아, 중독성 강한 ‘타코야끼 송’도요!(웃음)
글 하나 하나 애정이 듬뿍 담기신 게 전해지네요. 시나리님이 글을 쓸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이 무엇인가요?

결국은 ‘밸런스’ 같아요. 플레이스팀 글 같은 경우에는 담아야 하는 요소들이 많잖아요. 나도 잘 드러나야 하고, 내가 소개하고자 하는 공간도 잘 드러나야 하는데 어느 한쪽에 욕심이 과해지면 굉장히 개연성 없는 글이 되겠더라구요. 어느 한쪽 얘기를 했을 때 다른 한쪽이 떠오를 만큼 탄탄하게 조합된 글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뜬금없다’는 느낌이 들면 절대 안 된다는 마음으로, 밸런스를 잡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진솔하게 나다운 글을 쓰되, 가독성을 해치지는 않도록 균형을 잘 맞춰야 하죠.
플레이스팀의 관점을 조금 더 넣자면, 그래도 그 장소의 매력 자체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글이 가장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요. 인터뷰나 소설 같은 요소들을 차용하더라도 어쨌든 총체적으로는 가게나 공간으로 수렴하게 하는 거죠.
이번에 이례적으로, 6개월밖에 활동하지 않았는데 운영진이 되셨어요! 비하인드 스토리를 조금 부탁드려도 될까요?
사실 글을 나누고, 정성 어린 피드백을 들으며 잔치에 대한 애정이 너무 커져서 운영진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어요. 1년 활동이 끝나면 지원해 볼 생각이었는데, 이번 운영진 모집기간이 끝나고 나서 일정상 1년 넘게 활동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쉬워하던 참이었죠. 그런데 단 언니가 마침 연락이 와서 ‘운영진 해 볼 생각 없냐’는 말을 해 주시길래 너무 반가웠어요. 저로서는 정말 운명 같은, 감사한 제안이기도 했고 어쩌면 지금이 아니면 찾아오지 않을 기회니까 굉장히 흔쾌히 수락했던 것 같아요. 많이 부족하지만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파이팅이에요. 시나리님이 운영진이라니, 생각만 해도 든든한데요. 그렇다면 다음 학기에는 운영진 활동에 집중하실 예정이신지, 잔꾼으로서의 행보가 궁금해요. 한편으론 시나리님 글의 광팬으로서 살짝 아쉽기도 한데요.
음.. 그 부분은 사실 아직 마음을 확실히 못 잡았어요. 운영진을 하더라도 제가 원하면 글을 쓸 수는 있지만 다음 학기에는 복학도 할 예정이라, 정신이 많이 없을 것 같긴 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글을 포기하기엔 저도 너무 아쉽고, 제 글을 좋아해주시는 잔꾼들이 있으니까 보답하고 싶다는 생각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아직 확답은 못 드리겠지만, 최대한 틈틈이 글을 쓰려고 노력해 볼게요. 아마 실물 잡지에는 꼭 참여할 것 같은데요?(웃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오래오래 써 주셨으면 좋겠어요. 에디터 자아와 실제 자아가 얼마나 일치하는지도 궁금한데요. ‘시나리’와 ‘서정’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진짜 제일 어려운 질문인 것 같은데요.(웃음) 일단 저는 ‘서정’이라는 커다란 세계 안에 ‘시나리’가 하나의 요소로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시나리’는 ‘서정’의 수많은 자아 중 하나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날것의 내면을 대변하는 자아가 아닐까 싶어요. 사회적인 시선이나 대외적인 이미지 때문에 감추고 살아가는 면들이 누구나 다 있잖아요. 평소에 가끔 하는 생각들, 나와 타인, 세계에 관한 고찰, 다양한 감정들과 간절히 열망하고 사랑하는 것들. 그것들을 세상에 좀 더 알리고 싶어서, 표출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자아가 ‘시나리’인 것 같아요. ‘서정’의 페르소나 중 가장 나다울 수 있는 자아.
가장 ‘서정’다운 ‘시나리’… 그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을 것 같네요! 그렇다면 2024년 서정과 시나리의 목표를 각각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일단 김서정의 목표는 건강.(웃음) 진짜 건강을 한 번 잃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것을 항상 느끼고 있거든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려면 정말 건강해야 됩니다. 그래서 식사도 잘 챙기고, 운동도 올해는 꼭 시작을 하려구요. 시나리의 목표는.. 내가 열망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솔직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지금 바라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스스로도 잘 알고 남들한테도 잘 전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 매체가 글이면 참 좋구요.
맞아요. 그냥 묵묵히 잘 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세상에 알려야 더 도움이 될 때도 있잖아요. 나에게 솔직할 뿐 아니라, 여러 기회를 불러오거나 의지를 다지는 데도 동기부여가 되구요.
전 그걸 선언이라고 표현을 하고 싶어요. 나에 대해, 세상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선언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좋아요. 어느덧 마지막 질문이에요. 시나리님 인생의 주제가를 고른다면 어떤 노래가 될지, 이유와 함께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이 너무너무 좋아서 완전 열심히 골랐어요!(웃음) 제가 밴드 음악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한국에서는 마이너한 밴드지만 일본에서는 롱런하는 그룹이에요. ‘Flumpool’의 “強く儚く” 라는 곡인데, 한국어로 해석하면 ‘강하고 덧없게’ 라는 뜻이에요. 가사가 정말 제 마음을 울렸는데, 젊은 화자가 나와요. 아픈 현실에 치이고, 고독한 감정들을 삼키거나 때로는 자신의 잘못을 곱씹으며 깊은 우울에 잠기기도 하는 존재거든요. 그 화자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갈팡질팡하는 청춘의 한 시점을 살아가고 있는 제 모습이 보였던 것 같아요.
이 곡이 특히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화자가 삶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흔히 ‘들풀 같다’고 표현하잖아요. 세상에 흔들리면서도 한 발 한 발 나아가면서, 이토록 강하고 아름답게 삶을 살아내는 화자가 스스로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걸 가사를 통해 느낄 수 있었어요. 심지어 노래 가사에 ‘시나리오’도 등장을 해서 되게 운명적이라고 느꼈어요. “이 손으로 붙잡는 현재가 이상과 달라도 좋다. 시나리오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가 한 잘못도 그냥 한 장면에 불과하다.” 이런 가사인데, 개척하는 삶을 살고 싶다, 시나리스트로 살고 싶다는 제 열망을 너무나 잘 대변해 주는 느낌이었죠. 이상과 현실이 달라도 상관없어, 나는 앞으로 나만의 시나리오를 써 나갈 거니까! 그런 의지를 갖게 한 곡이었어요.

시나리의 말들은 부드럽지만 강인하다. 깊은 사유를 몰입감 있는 문체로 풀어내는 시나리의 글 뒤에는 빼곡히 쌓아 온 생각들이 있었다. 수많은 경험들을 흐트러짐 없이, 가지런히 정돈할 줄 아는 능력은 큰 소리 내어 자랑하지 않아도 차분한 음성을 타고 은은한 존재감을 뽐냈다. 삶의 균형을 맞추며, 때로는 순간에 흠뻑 빠져들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시나리의 극은 지금 이 순간에도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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