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친애하는.
친애하는 S에게
당신이 동경했던 2024년의 신촌에 여전히 아날로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나요? 연필과 편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남아 있습니다.
당신은 편지를 자주 쓰지 않았습니다. 번거롭다는 핑계로 진심을 한마디 말로 대체했지만, 이제 그 말은 휘발되어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죠. 당신의 생각대로 편지 쓰기는 진득함이 필요합니다. 편지를 써야겠다고 다짐한 날은 침대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할 말이 입가에 웃돕니다. 상대방이 좋아하는 색깔, 음식, 향, 옷, 노래가 머릿속에서 동시 재생되며 하루가 시작됩니다. 파편처럼 튀어 오르는 생각들로 ‘와장창!’ 머릿속이 시끄러워 밥을 먹다가도, 수업을 듣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생각 조각들을 메모장에 끄적이곤 합니다. 거리마다 자리한 상점을 들러, 가장 맘에 드는 엽서를 고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함께 나눴던 대화를 되감아봅니다.
잉크가 잘 묻어나는 색깔 펜을 골라 책상에 앉습니다. 하루 종일 떠올린 말을 적어내자니 막상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됩니다. 편지지에 글씨를 적을 기회는 단 한번 뿐. 연습장을 꺼내 잔뜩 구겨진 공책 한 편에 속마음을 쏟아냅니다. 넘쳐흐르는 마음을 조금씩 정리하며 엽서에 꾹꾹 옮겨적다, 글씨가 어설프게 기울어 버리기도 하죠. ‘아!’ 짧은 감탄사와 함께 이럴 줄 알고 산 두 번째 엽서를 꺼냅니다. 두 시간을 고군분투한 끝에 편지봉투에 ‘-에게’라고 상대방의 이름을 새깁니다. 편지를 쓰는데만 하루가 다 지나갑니다. 그래도 지금의 저는 번거로움을 감수하고서라도 편지를 전하곤 합니다. 아날로그는 그 고민의 시간을 고스란히 담아내니까요.
건네는 이의 마음씨가 내밀하게 드러나서인지, 모든 것이 디지털화된 지금도 사람들은 편지를 씁니다. ‘문자는 매일 보내는데, 편지도 꼭 특별한 날에만 써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 오늘은 문득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졌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속 시끄럽게 상점을 돌아다니다 ‘Dear.’ 편지지 같은 가게를 발견했습니다. ‘Letter gift shop’ 햇살을 피해 실눈을 뜨고 읽어봅니다. 분주한 도로 사이에 편지지를 파는 상점이라니! 발걸음을 잠시 멈춰봅니다.
인센스 향을 따라 입구에 들어섭니다. 늦잠 자고 일어난 주말 아침처럼 익숙한 나른함이 밀려옵니다. ‘Positive vibes’, ‘Lemon grass’, ‘Christmas tree’… 인센스 스틱의 이름을 하나씩 살피며 향을 유추해 봅니다. 매장 속은 무거운 나무 향에 시트러스를 한 방울 떨어뜨린 듯 상큼한 향기로 가득합니다. 베이지색 벽지를 배경으로 초침이 분주하게 돌아가는 시계, LP, 편지지와 연필이 눈에 띕니다. 곳곳에 적힌 사장님의 메모, 노래 가사를 읊으며 편지처럼 공간을 읽어갑니다. Dear.는 모든 것이 조금은 느리고 천천히 굴러가는 공간입니다.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되던 생각들이 한 번에 뚝- 끊깁니다.
진열대를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편지지 추천받고 싶으시면 주인을 불러주세요. 기념일, 원하는 분위기, 편지 양 등을 고려해 용도에 따라 추천해 드립니다’ 손 글씨로 사장님의 진심이 적혀 있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편지지 디자인부터 아기자기한 샌드위치 모양, 붕어빵 모양, 유리병에 담긴 Dear.의 시그니처 편지지까지. 평범하지 않으면서도 실용적인 편지지가 한가득입니다. 엽서에는 봄꽃 사진, 불 꺼진 밴드 공연장 사진 등 일상의 소소한 장면들이 담겨 있습니다. 마음이 피곤할 때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며, 평범한 하루를 특별하게 기록할 수 있도록 Dear.를 만든 사장님의 철학이 고스란히 묻어나오죠.
문득 ‘I LOVE YOU!’ 큼직한 글씨가 적힌 포스터가 궁금해집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 포스터마저 하나의 편지지입니다. 상대방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계절, 함께 보고 싶은 영화, 있었던 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 등 연인과 간지러운 질문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공간 곳곳에 숨은 편지지를 찾는 데 재미가 들립니다. 벽을 꾸미고 있는 엽서조차도 하나의 편지지입니다. Dear. 의 편지지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공간, 일상에 쉽게 어우러집니다.
편지지 옆 문구도 구경해봅니다. ‘Black wing’, 세련된 검은색 연필부터 커다란 점보 연필까지. 하나씩 집어봅니다. 색깔도, 모양도 가지각색이지만 연필의 익숙한 감촉은 그대로입니다. 커터칼로 깎아 쓰던 연필의 꿉꿉한 냄새와 함께 처음 글씨 연습을 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가, 나, 다…’ 오른손 중지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연습하곤 했죠. 당시엔 ‘생일 축하해’, ‘앞으로 더 친하게 지내자’ 상투적인 말이 적힌 편지도 흑연이 덕지덕지 묻은 손으로 건네주면 그 마음이 얼마나 따뜻하게 느껴졌는지요. Dear.의 연필은 편지를 쓰는 이의 진심을 담고 있습니다.
입구 근처엔 편지지를 고른 후 곧바로 편지를 쓸 수 있는 공간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편지를 쓸 때면 혼자만의 공간에서 생각을 정리한다고 말했었죠. 한 번에 적어내고 싶다는 생각에 몇 번이고 연습한 후 편지지에 옮겨 적었습니다. Dear.를 둘러본 오늘,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편지지에 하고 싶은 말을 곧바로 적는 것도 좋겠다고요. 문장을 고친 흔적을 그대로 남겨 편지를 쓰는 행위 자체를 고스란히 담아내려고 합니다. 정돈되지 않은 문장도 괜찮습니다. 상대가 건네받는 것은 깨끗하게 포장된 말이 아닌 편지 속 진심이니까요. Dear.에서 편지를 써보고 싶습니다. 여과 없이 마음을 적어 내리고 싶습니다.
‘친애하는’이라는 단어는 편지 시작 부분에 흔히 쓰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 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라는 의미를 전달합니다. ‘Dear’가 암시하듯이, ‘Dear.’는 여러분의 진심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줍니다.
담백하게 적어낸 손 편지는 화려한 수식어가 필요 없이 그 자체로 값집니다. 당신은 언제부턴가 편지를 받으면 기쁘면서도 동시에 어색한 마음이 든다고 했었죠. 진심을 주고받기 두렵다고 했던 게 기억납니다. 편지를 받으면 내용이 당장 궁금해 뜯어보려다가도 조금 미뤄뒀다 읽던 당신의 모습이 눈에 그려집니다. 종일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돌아가는 길, 혼자 꺼내 보며 뒤늦게 진심을 발견하는 뒷모습이요. 다 읽은 편지지를 다시 봉투에 접어 넣으며 ‘다음엔 내가 먼저 표현해야지’ 다짐을 하지만, 결국 또다시 툭툭 뱉는 말로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곤 했죠. 겁이 많아 빙빙 돌려 말하다 숨어버리길 되풀이했습니다.
You lack substance when you say something like “Oh, what a shame”.
It’s just a self-referential way that stops you having to be a human.
<Sincerity is scary – The 1975>
당신은 섭섭하지 않을 정도로만 마음을 주고, 기대하지 않으려 노력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애써 괜찮은 척하며 진심을 거두기만을 반복하면 결국 고립되는 건 스스로였죠. 지금 저에게도 진심을 다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젠 조금이나마 용기를 얻게 된 것 같습니다. 재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하려고 합니다. 그 대상이 사람인지, 이루고 싶은 꿈인지는 상관 없습니다. 엽서를 사고 말을 골라 편지를 적어내는 과정에서 최선을 다하듯 하루를 충실히 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손글씨 같은 매일을 살고자 합니다. 세상에 저의 진심이 닿기를 바라며 오늘도 또 한 통의 편지를 적어 보내 봅니다. 진심은 반드시 통하는 법이니까요.
마음을 담아, S가
–
Dear.
이화여대길 88-14
영업시간 매일 11:00 AM- 20:00 PM
@dear._is_letter_sh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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