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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2025 · 05 · 06

240. 서강: 그대에게

Editor 이도

4월 15일, 화요일, 오전 11시.

 

오늘따라 날이 맑다. 

한바탕 흐드러지게 피었다 바람처럼 갠, 왕벚나무의 푸릇한 가지를 찬찬히 훑으며, 경훈은 로욜라 도서관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놈의 괴테가 뭐라고 매일같이 책을 빌리러 가야 하는지.

허나, 괴팍한 노교수의 눈은 언제나 맨 뒷줄에 조용히 웅크린 경훈의 그림자를 찾아내었기에 읽은 척이라도 하려면, 그리고 무엇보다 책값을 아끼려면 매일같이 J관* 앞에서부터 로욜라까지의 언덕을 등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인문학이 싫은 것은 아니다.

퍽이나 대단하다고 여겨지는 한 권의 책을 지겹도록 다시 잡고 물고 뜯으며 토론을 할 때, 3학년씩이나 되었음에도 아둔하게 느껴지는 뇌에 혈류가 도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활자로 펴낸 수많은 시선 중, 어떻게 하면 더욱 튈 수 있을까 고심하며, 법학적, 문학적 용어들을 남발하는 레포트를 쓸 때도 마찬가지였다.

막상 읽을 때는 죽을 맛이라 느껴졌던 것을, 경훈의 언어로 새롭게 정의하는 과정은 의외로 달콤한 중독성을 가졌다.

그렇다. 반질반질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한 로퍼와 로욜라 구릉지의 불화는, 인문학만의 지적 허영심으로 능히 상쇄 가능한 태만이었다. 이어폰의 최신 팝송 볼륨을 키우고 경훈은 걸어 올라갔다.

 

*서강대학교 정하상관: 인문대학 건물.

 

경훈은 로욜라 도서관의 창가 좌석을 좋아했다. 넓은 개방 공간에서 햇빛과 함께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라 언제나 생각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만 움직이는 낙관주의자의 면모는, 조금이라도 억압된 감정을 틀어막아 두지 못했다. 

 

 

오늘도 익숙한 그 자리에 에코백을 조신히 내려두고, 갈색 가죽 커버 태블릿을 세워 놓는다. ‘모모’ 독일어판과 율리 체의 ‘어떤 소송’도 옆에 쌓아 두었다. 내일까지 문장 구조 분석을 해 가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처럼 불이 꺼진 옆의 서가에서 무엇인가 움직인다. 그 녀석이다. 

 

그 녀석을 처음 만난 것은 K관***에서의 공통 교양 수업이었다. 

현대 사회의 이해 수업에서 그 녀석은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사회 현상을 분석할 때는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찌질한 눈빛을 날렸고, 발표를 준비할 때도 그저 자기만 아는 이야기뿐, 정치, 경제를 다루고 싶지 않아 했다.

이 회색 신사* 같은 놈. 그렇게 기술 효율 따질 거면 R관에 박혀 연구만 할 것이지. 경훈은 생각했다.

그 녀석은 외관 또한 가관이었다. 

새끼발가락 쪽에 구멍이 뚫려 너덜너덜한 운동화, 정체 모를 얼룩이 묻은 츄리닝 바지, 클론처럼 입고 다니는 체크 셔츠, 어마무시하게 크기만 하고 못생긴 검은 백팩까지. 머리에선 윤기라고 표현할 수 없는 불길한 반짝임이 흘렀다. 머리를 샴푸로 감는 건지는 아는 걸까, 아니 머리를 감긴 하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R관남**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야. 경훈은 생각했다. 대학교는 엄연히 사횐데 저렇게 다니는 게 맞나? 적당히는 관리하고 꾸미고 와야지, 냄새는 안 나야 할 거 아니야. 저게 말이 돼?

 

* 회색 신사: 소설 ‘모모”에 나오는 악당 무리. 시간을 저축하고 삶을 윤택하게 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꼬드기지만, 순차적으로 삶의 이유를 잃게 하는 모습을 보인다.

**R관남: 서강대학교 에브리타임, 서담(서강대학교 커뮤니티) 등에서 사용하는 공대 남학생의 멸칭. 공과대학 건물인 리치과학관으로부터 파생되었으며, 잘 씻지 않고 냄새가 나며 독선적이라는 인식이 있다. J관녀, MA관남 등의 아류어도 존재한다.

***K관: 서강대학교 김대건관. 공과대, 자연과학대가 주로 사용하지만, 교양 수업이 열리기도 하는 건물.

 

R관에나 박혀 있을 화공생명공학과 학생이 로욜라에 나타난 것은 어쨌든 기이한 일이었다. 공대생이 로욜라 도서관에 올 일은 없었다. 혹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경훈은 현욱의 못생긴 백팩과 그 안에 들어있을 거대한 노트북을 짐작했다. 대체 공대생들은 왜 저렇게 무식한 가방에 노트북을 메고 다니는 걸까.

경훈은 거의 언제나 태블릿만을 에코백에 넣고 다녔다. 필기와 검색까지 전부 되는 태블릿에, 말아서 들고 다닐 수 있는 블루투스 키보드까지 있는데 굳이 노트북을 가지고 다닐 이유를 못 느낄 따름이었다. 

 

어휴… 음침한 놈. 거기 종교학 서가잖아. 종교학도 인문학인 거 알지? 네가 뭘 아는데. 

불쾌한 기운이 몸을 휘감았다. 경훈은 가만히 서서 그 감정을 소모하느니 괴테 할아버지를 찾으러 다녀오는 것이 현명할 거라는 걸 깨달았다. 

 

현욱

 

1교시 수업은 언제나 힘들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더 힘든 것 같다. 

현욱은 AS관에서의 9시 수업을 끝마치고 한숨을 쉬며, 5층의 자판기에서 몬스터 에너지를 하나 뽑았다. 

어제도 수업이 늦게 끝났더랬다. 전공 실험 수업은 결괏값이 도출되지 않으면 끝까지 재실험을 하기 때문에, 10시를 넘기고서야 집에 갈 수 있었다. 집에 가서도 데이터 정리하고 그래프를 그리다 잠을 청해서 그런가, 오늘은 정말 죽을 맛이다. 

날씨는 이런 현욱의 마음을 알까. 구름은 청명한 하늘에 튀었고, 햇빛은 나선을 그리며 내려왔다. 

 

문득, 노고산*쪽으로 올라가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K관 앞에서 시작되는 노고산 오르막길은 낯설었다. 보통 엠마오관에서 파는 학식을 먹으러 많이들 가는 길이겠지만, 현욱은 언제나 우정원 또는 곤자가 플라자에서 끼니를 해결했기 때문에 갈 일이 없었다. 

엠마오관 위, 소위 엠뚜**라고 불리는 곳에서 바라보는 학교의 전경은 아름다웠다. 큰 소리로 소통하며 농구 경기, 또는 야구 연습을 하는 학우들을 지켜보는 것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현욱이라고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몸이 따라 주지 못할 뿐. 공대 3학년의 학기는 외발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았다. 레포트의 날카로운 매질과, 하루라도 복습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는 전공 과목의 정권지르기를 얼버무리며 피하는 것만으로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현욱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은 울적해졌다.

발걸음을 돌려 풀밭을 가로지른다.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오랜만에 로욜라 도서관도 가 보아야겠다고 현욱은 생각했다.

 

*서강대학교 뒷산: 로욜라 도서관과 산책 코스가 위치해 있다.

**엠마오 뚜껑

 

학교의 자랑 중 하나인 로욜라 도서관은 사실 공대생을 위한 곳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공대 과목과 관련된 도서도 인문과 상경에 비하면 많은 편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RISS니, DBpia니, 인터넷 자료와 교수님이 던져주시는 논문 읽기만도 힘든 것이 공대생의 현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1학년 때나 호기심으로 가 보았던 로욜라는 역시나 현욱에겐 낯설었다.

서가를 뒤적거려 본다. 종교학 도서로 도배된 서가이다. 

종교학은 대체 뭘 하는 걸까? 현욱은 생각했다. 신을 연구하나? 그럼 종교를 믿나? 전지자가 있다는 게 말이 되나? 일론 머스크가 그러던데. 이 모든 게 다 시뮬레이션이라고. 그럼 매트릭스 같은 것이겠네. 와… 그럼 왜 살지? 답이 없는 방정식인데?

현욱은 서가에 머리를 박았다. 부질없는 상상을 멈춰야지. 인문학은 입만 산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런 거 한다고 세상이 바뀌나? 결국 기술이 우리를 진보하게 만드는 거 아니냐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창가 자리에는 익숙한 가죽 커버 태블릿이 있다. 

 

그 녀석은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듣는 공통 교양수업에서, 그 녀석의 반질반질한 로퍼와 함께 빼입은 셔츠를 볼 때마다 현욱은 신물이 올라왔다. 

학교는 배우러 오는 곳이지 패션쇼 하러 오는 곳은 아니지 않나. 현욱은 생각했다. 누가 저렇게 꾸미고 오냐고, 수업 끝나고 홍대 가서 공연하시게?

발표 주제를 가지고 논쟁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현대 사회의 정치 제도니, 뭐 AI시대에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 그냥 열심히 하면 되지 뭔 소리야. 저렇게 입만 살아서는 쪽박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재차 생각했다.

 

‘모모’, ‘어떤 소송’이라고 쓰인 책 옆의 태블릿은 켜져 있었다. 현욱은 ‘모모’를 집어 들었다. 이거 어린애들이 읽는 동화잖아. 독일어과라면서 이런 거나 읽는 건 좀 부끄럽지 않나. 현욱은 던지듯이 책을 내려놓다 실수로 태블릿을 건드렸다. 넘겨진 메모장에는 기초적인 반응 공식이 휘갈겨 써져 있었다. 

참… 꼴값은 다 떨더니 결국 뭐 변리사라도 준비하나 보네. 

현욱은 사실 즐거웠다. 남들의 치부를 파헤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온갖 고상한 척을 하더니 결국 그 콧대도 거짓이었구나. 어차피 안 팔리는 전공 탓하며 CPA, 로스쿨, 변리사 노릴 거면서 그렇게 고결한 척은. 참…

 

현욱은 메모를 원래 페이지로 슬쩍 돌려놓고 로욜라를 나섰다. 

 

경훈

4월 16일, 수요일, 오후 4시 반.

 

오늘도 그 녀석은 오만한 소리를 지껄였다. 인문학의 가치도 모르는 놈 같으니.

그렇지만 현대 사회의 이해 수업을 마친 경훈은 마음이 급했다. 팀 프로젝트 톡방에 만들어 보내야 할 자료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 K관 열람실이라도 가야지. 

평소 경훈은 J관 열람실을 주로 찾았다. 아무래도 독일어 수업은 대부분 J관이라, 그렇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무엇보다, K관에마저 서식하는 수많은 공대 학생의 존재는 불쾌한 냄새의 예상치를 한없이 솟게 만들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K관의 열람실은 쾌적했다. J관의 열람실보다 무엇인가 딱딱한 분위기가 느껴지긴 하였으나, 부족한 환기 시설 덕에 여름이면 어김없이 땀 냄새로 절어 있는 J관의 노트북 열람실보다 오히려 나은 듯했다.

잘 가져오지 않던 노트북을, 간신히 품고 있는 에코백에서 꺼내어 헐레벌떡 작업을 시작했다. 크고 무거운 노트북은 경훈의 자취방 책상을 벗어나는 일이 드물었다. 그렇지만 어쩌겠나. 오늘만큼은 미리미리 해놓지 않은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1시간 반 동안 혼신의 힘을 불태운 경훈은 K관 열람실을 나섰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려던 그때, 게시판을 우연히 보게 된 경훈은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기업들의 채용 공고가 도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B 전자, OO 엔지니어 모집. S 상사, 생산관리 매니저 모집. H 바이오, 채용 연계 연구직 모집.

J관의 게시판에서는 보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인문학 강연, 대학원생, 학부 조교 모집 등이 난잡하게 펼쳐진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무엇인가 위축되었다. 자본주의의 냉혹함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

 

터덜거리는 발걸음을 이끌고 메리홀*로 향했다. 

경훈은 연극 동아리의 부원이었다. 대학생으로서, 더 나아가 인문학도로서 연기는 꼭 해보아야 하는 경험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동아리를 선택하게 되었다. 연기를 통해 다른 인물의 영혼에 거주하는 경험은 일종의 해방감을 주었다. 백날 책에서 읽던 인물들의 감정을 체화하는 것은 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수반하기 때문일 것이다.  

 

*메리홀: 서강대학교 내 공연을 위한 극장. 

 

다음 날의 결전을 위한 최종 연습을 마치고, 경훈과 동아리원들은 청년광장*에서 저녁을 함께하기로 했다. 적당히 선선한 저녁의 날씨는 언제나 초록빛의 광장에 낭만을 더했다. 그것이 수많은 서강대생이 청광을 사랑하는 이유일 터이다. 

언제나처럼 피자를 시켜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즐기던 경훈은, 무심코 건너편의 벤치를 바라보았다. 그 녀석이었다. 

이어폰을 꽂고 반쯤 늘어져 있는 그 녀석은 혼자였다. 혼자여서 외로워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나 오만하고 독선적으로 보이던 그 녀석이 오늘은 이상하게 초라하게 느껴졌다. 측은하달까. 경훈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는 감정이 눈을 스쳤다.

 

*청년광장: 서강대학교 알바트로스탑 뒤의 인조 잔디 광장. 서강대학교 학생들의 배달 음식 명소이다. 현재는 리모델링 중인 상태이다.

 

현욱

4월 17일, 목요일, 오후 1시 반.

 

3교시, 공업 수학 수업을 마친 현욱은 곤자가 플라자*를 찾았다. 이상하게 배가 많이 고팠다. 이 정도라면 곤플을 가기에 충분하다. 라고 현욱은 생각했다. 별생각 없이 우정원에서 밥을 먹을 때와는 다르게,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섭취할 수 있는 곤플을 가려면 명분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감각적인 현실 도피 사유로 이만한 게 없었다.

 

*곤자가 플라자: 예식장으로 주로 사용하지만, 평일 점심에는 7,000원이면 한식 뷔페를 먹을 수 있는 서강대학교 내의 행사장.

 

곤플에서 허기진 위장에 기름기를 잔뜩 채워 넣은 현욱은, 정처 없는 걸음을 옮겼다. 3시 수업은 취소되었다. 학기에 한두 번은 있는 교수의 학회 발표 때문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K관 열람실에서 예습의 시간을 가져야 할 수업이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아도 된다. 물론 대체 과제는 있다. 그냥 곱게 휴강 좀 해주지, 언제나 교수들은 과제를 던지고 사라졌다. 하지만 현욱은 애써 그걸 외면하고 걸음을 옮겼다.

 

요즈음 무엇인가 무기력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제도 현욱은 청광*에 앉아 남몰래 다른 이들이 토론하며 청춘을 즐기는 모습을 엿보았다. 허무했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던 어른들의 말은 거짓이었나? 문득 수능 비문학 지문에서나 보았던 “절대정신”이니, “주관성의 재객관화”니 하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생각났다. 

철학이 조금은 궁금해졌다. 무거운 발걸음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고자 현욱은 이어폰의 펑크락 볼륨을 높였다.

 

*청년광장 

 

어쩌다 보니 메리홀까지 오게 되었다. 학교 연극 동아리에 대해 어렴풋이 들어 보기는 하였으나 오늘이 공연인지는 몰랐다. 현욱은 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무대 위에는 그 녀석이 있었다.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겉멋만 잔뜩 든 것처럼 보인 그 녀석은 생각보다 연기란 것을 할 줄 알았다. 감정이 극대화된 표현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녀석은 너무나 자유로워 보였다. 인문학을 하면 저런 걸 할 수 있으려나. 답답했다. 

현욱은 척추의 한 켠이 찌뿌둥해짐을 느꼈다. 

 

연극이 끝나고 메리홀을 나서며 신발 코를 내려다보았다. 닳고 해진, 구멍까지 뚫린 운동화에는 커피와 grignard 시약 얼룩이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저 앞의 땅에는 짓눌린 목련 꽃잎이 있다. 고동색 얼룩이 운동화의 그것과 같다.

 

걷는다. 

 

경훈

 

오늘은 드디어 무대에 서는 날이다. 수업은 하루 정도는 빼 먹어도 될 것이다. 오늘만큼은 우선순위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끔은 선택적 몰입도 필요하다. 필기는 효범에게 밥 한 끼 사주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 생각한다.

 

연극이 시작되었다. 

가득 찬 관중석의 맨 뒷줄에는 그 녀석이 있었다. 녀석은 오늘도 혼자였다. 

저 녀석이 보는 세상은 어떨까. 막연히 삭막한, 단조로운 일의 연속일까. 돈만을 보고 저런 길을 선택했다면 그것대로 힘든 현실일 것이라고 경훈은 생각했다. 그렇지만, 저 녀석이 지향하는 어떤 이상이 저곳에도 있지 않을까.

 

감정을 털어낸다. 어느 하나 무엇도 남기지 않고. 오늘은 재채기 같은 열정을 보여주겠다고 경훈은 마음먹었었다. 

몰입이란 것은 신기하다. 시간은 특정 상태에서 무엇보다 빠르게, 채찍같이 나아간다. 

끝났다.

경훈은 관중에게 인사를 하고 뒷문으로 나갔다.

 

알바트로스탑의 표면은 언제나처럼 반짝인다. 건너편에는 그 녀석이 있다. 

 

 

현욱

 

현욱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잔뜩 헤진 운동화를 대충 구겨 벗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살핀다. 천장은 격자무늬이다. 데카르트가 저런 걸 보고 Cartesian Coordinate을 발명했다는데. 공업 수학 시간에 귓밥이 벗겨질 정도로 들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철학자 아니었나? 모르겠다. 현욱의 우매한 뇌로는 철학자이면서 어찌 수학과 과학까지 그렇게 잘했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했다. 문 이과로 절단되어, 흔들리는 길이 정해진 현대의 이 세상에 나는 불완전한 잡종일 뿐이다. 뭐 하나라도 제대로 할걸. 

 

무식하게 큰 검정색 가방에서 가죽 케이스 태블릿을 꺼낸다.

무조건적인 반항을 표방하는 펑크락이나 나뭇잎 같은 감성을 뽑는 팝송은 질리도록 들었다.

가끔이지만 이유를 찾고 싶을 적도 있는 법이다.

유튜브를 열어, 수없이 본 전설적인 그 영상*을 다시 한번 누른다.

 

숨가쁘게 살아가는 순간 속에도

우린 서로 이렇게 아쉬워하는 걸

아직 내게 남아있는 많은 날들을

내가 사랑한 그 모든 것을 다 잃는다 해도

그대를 포기할 수 없어요

 

구겨 벗어 제멋대로 끈이 나풀거리는, 현관의 지저분한 운동화 곁에는 반질거리는 로퍼 한 쌍이 있다.

 

내일은, 저 녀석의 신을 신어 보아야겠다.

 

 

출처: 서강 Q카드(https://quickguide.sogang.ac.kr)

* 서강대학교 동문인 신해철이 결성한 밴드 ‘무한궤도’는 <그대에게>로 1988년 MBC 대학가요제 대상을 수상하였다. <그대에게>는 현재도 서강대학교 응원가로 사용되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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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

잔치의 시선으로 신촌의 장면과 사람, 장소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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