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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2025 · 05 · 13

241. 사러가 마트, 그래도 사랑하시죠?

Editor 정원
#1 2000년대,  도시 A의 한 아파트, 거실.

 

나니아 연대기의 에드워드는 터키쉬 딜라이트가 대체 뭐길래 영혼을 팔았을까?

해리 포터 속 탐스러운 칠면조 요리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고기 같았다. 제비꽃 젤리, 버터 맥주, 진짜로 움직이는 치실 껌이 있다면 좋을 텐데. 책등에 줄이 가도록 읽은 퍼시 잭슨 시리즈에서는 엄마가 주인공인 청소년에게 늘 타 주던 쿨-에이드를 한 모금만 마셔 보고 싶었다. 또 신의 음식인 암브로시아는 브라우니 같다는데 마트에서는 오예스만 팔았다. 이마트에서 사 온 초록색 사과 젤리를 우물거리며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 에 나온 거대한 젤로(jell-o) 탑도 이런 맛일까 상상했다. 

가짜 음식만 접한 것은 아니다. 청소년 문학과 디즈니 채널을 섭렵하며 닳도록 들은 PB&J는 채소가 없는데 왜 샌드위치라고 부르는 것인지 항상 궁금해했다. 고기도 들어가고 채소도 들어가야 할 텐데… 잼이 아니라 젤리라면*, 그럼 제리뽀를 식빵에 바르는 건가? 라고 사춘기 직전의 아이는 상상했다. 

* 나중에 알게 된 토막 상식: 설탕과 과일을 조린 보존식품 중 복음자리 딸기잼처럼 과육이 으깨져 들어간 것은 잼, 과육이나 섬유질 없이 과즙만 사용해 만든 것은 젤리라고 부른다. 

 

#2 학교 앞 상가.

 

2000년대 중반의 나는 집앞 떡볶이 가게와 급식이 전부였던 초등학생임을 유의하시라. 책 밖의 행복은은 한스델리, 중앙공원에서 시켜먹는 신드롬치킨, 친구 어머니가 사주신 떡튀순 세트, ‘하드 열 개 천 원’ 사인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동네 할인마트 아이스크림 냉장고였다. 오뚜기 크림스프보다는 가끔 가던 애슐리의 브로콜리 스프가 훨씬 맛있더라 정도의 사리분별을 배워 가고 있었다. 그래서 컵떡볶이가 500원이던 시절에, 시험을 잘 보거나 특별한 날 가던 9900원짜리 애슐리가 나에게는 최고 신나는 일이었다. 

당시는 경양식을 지나 퓨전 요릿집이 유행하고,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라는 하위 구분보다는 ‘양식’ 식당을 말하던 때였다. 피자스쿨 스타일의 동네 피자집, 5학년 때쯤 출시된 마켓오 브라우니처럼 누군가의 재해석을 거친 결과만 접할 수 있었다. 플라톤의 동굴 속 그림자가 원형과 얼마나 닮았나 의문만 커지는 환경에서 책과 영화 속 음식들은 더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3 2010년대, 모 독서실의 휴게실 안.

머리가 굵어지면서는 페번시 남매가 교수님 댁의 사과나무 옷장을 잊은 것처럼 책의 세계와 멀어졌다. 대신 현실의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커졌다.

고등학교 때 살았던, 나름 부촌인 도시 B는 나에게 버거웠지만 시야를 조금 더 넓혀주었다. 소위 ‘카페거리’라 불리던 집 근처 상가촌은 테이블마다 가짜 촛불이 일렁이는 이탈리안 비스트로와, 사진 하나 없이 깨알같은 한글-영어 병기가 들어찬 A3 사이즈 메뉴판의 브런치 집 사이마다 STONE ISLAND GUCCI FENDI 같은 알파벳을 유리창에 빼곡히 붙이고 5만원짜리 카피품을 같이 파는 옷가게가 있었다. 

가끔 그런 식당 중 하나에 들어갈 때마다 2010년대임에도 알리오 올리오가 만원 후반대인 가격표에 한 번 긴장하고, 파스타 아라비아따, 콰트로 풍기 깔조네 같은 말을 읽다 혀가 꼬이지 않으려고 또 긴장했다. 한국인데 왜 이리 외국어를 사랑하는지. (전에 살던 동네에 비해 외국 물 먹은 사람들이 태반인 곳이었다.) 이때 덕분에 이탈리아에 가더라도 메뉴판은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이 생겼다. 원형에 좀 더 가까운 음식을 파는 곳들을 등하교길에 지나며 세상 모든 요리의 정석부터 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동시에 이맘때는 밀도(Mealº) 식빵이 태동하고 곤트란 쉐리에가 인기를 끌었다. 뚱카롱집이 우후죽순 범람하던 시기, 우리 동네는 그 유행에서 다소 안전했다. 약간 욕심을 내 파티세리에서 사 온 정통 프렌치 마카롱 하나를 독서실에서 까먹으며 생각했다. 이 세상에는 맛있는 것이 너무 많다고. 

 

#4 2024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 50 (연희동) 우정원.

결국 학벌주의에 저항하지 못하고 재도전까지 해서 신촌으로 대학을 왔다. 학력에는 재학기간 2020년~2025년 2월이라 적지만, 나는 신촌 생활을 단 1년 동안 했다.

나에게는 거의 신촌 토박이인 외삼촌이 있다. 비대면 수업을 듣던 시기에 삼촌과 만났는데, 사러가 마트 쪽 앞에 학생들이 많이 산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려 했는데 “너 사러가 마트 알아?” 하는 질문에 그만 딱 걸렸다. “아뇨, 처음 들어봐요.” “이야~ 사러가 마트도 몰라? 이거 완전히 가짜 연대생이네!” 학교에 못 가는 것도 왠지 억울한데, 웃자고 한 말에 티는 안 났겠지만 제대로 자존심이 긁혔다.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했다. 이마트, 홈플러스도 아닌데 그 정도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면 필히 동네 터줏대감일 터였다. 그렇다면 몇십 년이 됐다는 소리인데, 사람들이 자주 왕래한다? 세월을 맞아 약간 빛 바랜 간판에, 미닫이 유리문 앞에는 ‘사과 6개 만원’ 같은 청과가 쌓여있는 가게가 그려졌다. 배부른 소리지만, 이제 이십 년 조금 넘게 세상을 살아보니 신도시는 역사와 전통이 없는 껍데기라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유서 깊은 마트의 등장이라! 신촌에 살게 되는 그날 꼭 정체를 밝히기로 다짐했다.

 

사러가를 비롯한 연희동 일대는 연세대학교가 위치한 신촌동과 경계를 공유하고 있다. 학교는 행정구역 상 신촌동인데, 교내 기숙사의 주소지는 연희동이다. 그렇다 보니 나는 1년 동안 주말에 기분 전환 겸 부촌 산책을 나설 수 있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어느 날, 대충 국민은행 사거리 즈음을 지나다 별안간 기억났다. 맞아, 장도 봐야 하는데 사러가 마트를 가보자! GPS를 켜고 방향을 찾았다. 코스트코 뒷통수를 닮은 넓적한 콘크리트 건물을 지나서 아무리 걸어도 마트 코빼기도 안 보였다. 큰 네모를 그리며 연희동 반 바퀴는 돌다가 지칠 즈음 아까 그 건물의 앞으로 돌아왔다. 비로소 SARUGA SHOPPING CENTER 이라 적힌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간판이 영어일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 허탈했다.

 

 

#5 2025년, 사러가 쇼핑센터 1층, 사러가 마트.

사러가는 마트이자 쇼핑센터이다. 이마트 안에 안경점도 있고, 푸드코트도 있듯이 이곳도 마찬가지다. 다른 점이라면 사러가는 매장이 1곳, 후자는 전국구 대기업이라는 것이다.

진짜 ‘마트’ 부분에 들어가기 전에는 흡사 부산 국제시장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미제와 일제를 비롯해 각종 수입품을 취급하는 조그마한 점포들이 등을 맞대고 있다. 

밥풀이 덜 달라붙는 일본산 주걱과 미국에서만 파는 팝 타르트, 치토스 플레이밍 핫 플레이버 같은 과자들도 많다. 몇십 년 전에는 같은 자리에 허쉬 초코렛과 코티 분* 같은 미제 물건으로 채워져 있었을 것이다. 이제 ‘메이드 인 재팬’을 둘러싼 후광은 옅어지고 기념품으로 전락했다. 해외 체류 귀국길에 캐리어 가득 사온 ‘00에서만 파는’ 것들 일체가 여기에도 있었다니 애물단지처럼 느껴진다. 

연희동은 그런 동네다. 한때는 숭상했던 외제 물건들을 지금까지 사는 노인들과, 제1세계 국가들에 추억할 만한 물건 하나쯤은 있는 해외파 또는 외국인 주민들이 다수 살고 있다. 사러가 마트가 자리한 연희맛로 너머에는 반듯하지만 나름대로 개성 있는 담장 너머로 서울 한복판에서 보기 힘든 번듯한 단독주택들이 자리한다. 

*정식 이름은 COTY Airspun Loose Powder. 주황색 배경에 흰색 퍼프 그림이 패턴으로 들어간 종이 케이스에 담긴 파우더이다. 과거 수입 화장품의 대명사였다. 나는 어린 시절 할머니댁에서 본 기억이 있다.

연희동에는 지난주에 아트 팀에서 소개한 연희문화창작촌 바로 옆에는 900억 원대 추징금 미납으로 경매에 부쳐졌던 전두환 가옥이 있다. 노태우도 연희동에 저택이 있다.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포함, 1970년대부터 정치인과 사업가 등이 단독주택을 짓기 시작하며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또한 1990년대 중구 소공동 일대의 화교 밀집 지역이 재개되며 대만계 화교 다수가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 정통 중화요리집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신촌 일대의 대학에서 강의하는 교수들도 이곳에 거주했다고 한다. 

우리네 부모님이 컬러 테레비를 동경하고 카세트에 녹음한 팝송을 돌려 듣던 시기, 해외 유학과 출장을 다녔을 이들이 형성한 취향은 이렇게 1층 초입부터 드러난다. 

 

마트의 문법은 어디를 가나 동일하다. 입구의 과일 및 야채를 지나면 벽면을 따라 생선과 정육 코너, 유제품과 음료 냉장고가 있다. 안쪽 공간에는 조미료와 가공식품, 공산품이 자리한다. 사러가의 구성도 마찬가지이지만 법칙 속을 채우는 알맹이가 남다르다. 없는 게 없고, 뭐든 고급만 있다. 

 

과일•채소

알알이 큰 이국적인 것들은 곧바로 백화점 식품코너를 연상시킨다. 과일은 전반적으로 비싼 편이다. 

 

직접 담근 과일청과 가지런히 손질된 과일은 통도, 내용물도 남다르다. 용과를 색깔별로 깎아서 파는 마트는 살면서 처음 봤다. 세 가지, 네 가지, 아홉 가지 과일 도시락을 받으면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다만 가격표가 문제다. 대학생에게 과분하다.

 

몇 번 드나들면서 생긴 규칙이 있다. 뭐든 저 빨갛고 동그란 딱지가 붙지 않으면 사지 않는다. 한 번은 세 가지 과일 도시락(정가 6천원 가량)을  3천원 정도에 산 적이 있다.

 

첫 방문 때 적잖은 충격을 안겨 준 것은 정작 과일이 아니다. 

식용 꽃과 허브를 이렇게나 많이 파는데 이곳이 ‘동네 마트’라는 것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자고로 미식가 지망생이라면 내가 먹은 맛을 집에서 재현해 보고 싶거나, TV에서 본 요리를 손끝에서 탄생시켜 보고 싶은 것이 당연한 욕구라 믿는다. ‘줄리 앤 줄리아’* 를 보고 뵈프 부르기뇽을 만들려고 할 때였다. 영화 속 레시피에는 샬럿이 들어가는데, 새끼 양파라고 해도 믿을 만한 크기의 양파 비슷한 것이다. 처음 보는 식재료가 신기했지만 당연히 구할 수 없으니 대체품을 찾아야 했다. 모히또 붐이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트에서 찾느니 차라리 동네 꽃집에 가서 애플민트 화분을 사 오는 게 빨랐다. 이제는 대형 마트에서도 로즈마리나 민트 같은 허브를 팩에 담아 팔지만, 여전히 유럽부터 동남아시아 향신채까지 샅샅이 섭렵하지는 못한다. 

* 프랑스 요리책 계의 바이블을 쓴 요리사 ‘줄리아 차일드’와, 책에 실린 레시피를 하나하나 해 보며 블로그에 후기를 쓴 ‘줄리’의 이야기를 담은 실화 기반 영화이다. 영화 속 요리책(Mastering the Art of French Cooking) 도, 뵈프 부르기뇽 레시피도 실존하니 궁금하다면 찾아보길.

‘흑백 요리사’ 1화에서 나폴리 맛피아가 플레이팅에 쓴 팬지꽃을 기억하는가? 음식 맛에 영향을 주지도 않는데 왜 썼냐며 감점 요인으로 꼽혔었다. 요리 경연도, 미슐랭 레스토랑도 아닌 일상을 떠올려 보자. 어차피 나 또는 가족이 먹을 한 끼일 뿐인데, 오직 장식적 기능을 위해 몇천 원을 들여 식용 꽃을 살 생각은 머릿속을 스친 적조차 없다. 보리지 꽃이니 금어초니 하는 이름도 사러가에서 처음 들어봤다.

본가 근처 백화점의 식품 코너도 초반에는 이곳 같았다. 비건 반찬 코너에 온갖 이국적 식자재는 화려한 진열대는 잠시뿐, 사 가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내 특색을 잃었다. 반면 이곳의 매대가 여전히 다채로운 것은 연희동 주민들은 이 다양한 향신료들을 즐기고 자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겠다. 

 

자격지심만 있냐 하면 그건 아니다. 첫 방문에 세일 중인 네잎클로버를 만났을 때는 토끼풀 밭에서 횡재한 기분이었다. 요즘에는 행운마저 재배 가능하다는 것이 차이점이겠지만.

 

또 보통은 매대 한 켠에 해당하는 샐러드 채소 코너의 규모가 이곳에서는 꽤 크다. 라디치오, 프릴아이스, 양상추, 루꼴라 등은 모두 유기농이다. 가능한 모든 조합으로 판매하는 것도 모자라 소용량, 대용량 두 가지인 세심함이 보인다. 

알 사람은 알겠지만, 양배추는 단가가 낮아서 가성비를 챙기기에 참 좋은 식재료이다. 그런데 사러가의 샐러드 키트 속에는 양배추가 없다. 대놓고 ‘물가안정 프로젝트’ 같은 문구를 내거는 대형 마트와는 다르게 ‘안심할 수 있는 식자재, 건강한 먹거리’ 라는 모토를 곳곳에서 드러낸다. 오히려 그래서 자취생에게 특히 유용한 코너이다. 경험을 통해 터득한 것은, 샐러드 채소는 유기농이 비싸지만 오래 간다는 점이다. 대형 마트에서 4천원 주고 산 샐러드 믹스는 일주일이면 물러서 버리는데 사러가 제품은 이 주도 거뜬히 버텼다. 그런 연유로 여기에서 약간의 사치를 허용하곤 했다.

 

델리

델리 코너는 종류만큼이나 질로 승부를 본다. 외국인과 외국물 먹은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통큰치킨이 아니라 로스트 치킨을 판다. 기계로 찍어낸 원통형 밥에 얹힌 계란말이와 꼬리가 긴 연어 슬라이스 대신, 적당한 두께의 회를 올려 손수 쥔 비주얼의 초밥은 식당 못지않은 비주얼을 자랑한다. 

 

샐러드 또한 구성이 실하다. 부라타 치즈 한 알만 해도 소매가 기준 5천 원은 하는데, 이곳의 샐러드는 통크게 한 알을 다 올렸다. 거기에 삶은 계란, 방울토마토, 병아리콩, 수제 드레싱까지 탄단지 비중도 괜찮다.

 

이국적인 것들은 과일에 그치지 않는다. 한 번은 생망고에다 생화 난까지 올린 망고 스티키 라이스를 보았다. 세일 중임에도 안 샀던 몇 안되는 품목인데, 두고 두고 후회중이다. 시중에서 보기도 힘든 메뉴인데!

사진에 담지는 못했지만 자체 제작 ‘프리미엄 밀키트’도 스테디셀러인 듯하다. 제주 뿔소라 크림 리조또, 돌문어 감바스 알 아히요 파스타, 흑돼지 불고기버섯전골처럼 대중화된 음식들에 트위스트를 더했다. 2만원 언저리의 가격에다 스스로 프리미엄이라 부르는데 구성을 보고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수산 

마트에서 미학을 찾은 적이 없는데, 팔뚝만 한 생선들이 가지런히 누워 있는 모습은 감탄이 나온다. 꽃게철인지, 활꽃게들이 스테인리스 바트에서 허우적대며 절그럭 소리를 낸다. 

어릴 적 아파트 장터에서는 ‘고등어 한 손이요’ 하면 아저씨가 칼에 힘을 실어 탕, 탕 모가지를 떼어 내고 지느러미를 잘라냈다. 그 생생함 혹은 잔혹함이 현대에는 제조실 뒤로 숨었다. 심지어 생선에 뿌리는 소금도 히말라야 소금, 말돈 소금, 게랑드 소금 중에 선택한다. 

기숙사에 생선 냄새가 진동하게 할 계획은 없으므로 매번 구경만 했다. 사실 사러가 내에는 생선을 먼저 계산하면 구워 주는 서비스도 있어서, 이건 말도 안 되는 핑계이다. 취향뿐 아니라 좋게 말하면 편리함, 다르게 말하면 조리에 필요한 노동의 강도까지도 차이가 난다.

 

축산

어느 날 낮에 방문했더니 햇볕에 벌겋게 익은 백인 부부가 불고기 매대 앞의 직원에게 영어로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직원은 당연히 못 알아들었다. 그들은 더 크고 또박또박한 영어로 물었고, 번역기는 쓰지 않았다. 지나가던 중년의 아저씨가 영어로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또 물었다. 이거 무슨 부위에요? 부채살… 아저씨는 부채살이 영어로 뭔지는 몰랐다.

축산 코너도 구성이 범상치 않다. 고급 스테이크하우스에나 걸려 있는 드라이에이징된 고깃덩이를 만날 즈음이 되니, 롤러코스터 낙하 구간을 한 여섯 번은 지난 기분이라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수입 소고기의 경우 호주 농장과 직영계약해 들여오고, 한우와 한돈은 설성목장 출신이다.

 

그냥 이쯤 되면 인정하기로 했다. 사실 너무 부러웠어요. 

 

가공식품

‘사러가 슈퍼마켓은 세계의 음식을 조리할 수 있는 각종 식재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라는 소개문구가 충실하게 구현되고 있다. 그래도 백화점이 아니라 마트임을 증명하듯 가공식품 코너의 비중이 꽤 크다. 정신없이 고급품들을 보다 보니 이제는 보고 싶을 지경인 오뚜기, 백설, 샘표처럼 친숙한 브랜드들도 만날 수 있다. 그래, 이 사람들도 까나리액젓이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선식품 코너도 즐겁지만 조미료와 소스 진열대도 다른 가게와 비교해 틀린 그림 찾기를 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마트 CM송 대신 흘러나오는 사브리나 카펜터와 빌리 아일리시 노래를 흥얼거리며 선반 위 물건들을 하나 하나 뜯어봤다.

 

생선에 뿌려 주던 말돈소금을 비롯해, 스페인의 향신료 브랜드인 카르멘시타 제품들도 보인다. 검은 머리 여자 모양 로고를 찾아보라. 

스프레이 타입 올리브 오일은 이탈리아 브랜드 만토바 제품을 가져다 두었다. 저렴한 엑스트라버진 올리브 오일이 500ml에 만 원 중반대라면, 이 제품은 200ml에 만 원 후반대 가격표를 달고 있다.

 

보통은 품목 채우기용으로 한두 가지만 갖다 두는 수입 홀토마토와 파스타 소스 가짓수가 남다르다. ‘본토의 맛’을 위해서는 한국 토마토보다 감칠맛이 강한 로마 토마토가 필수이다. 

이 선반에서 발걸음을 멈췄던 것은 다른 이유도 있다. O Organics는 허리띠를 있는 대로 졸라맸던 미국 교환학생 시절에 본 상표이다. 미국 마트 체인의 자체 브랜드인데, 이곳에서 나온 토마토 소스를 연희동에서 다시 만날 줄은 몰랐다. 한편으로는 사러가의 능력에 놀라면서도 별로 달갑지 않은 친구를 마주친 기분이었다.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소세지 손가락 세계를 보고 한동안 입맛이 뚝 떨어졌었는데, 딱 그렇게 생긴 소시지를 팔고 있다. 독일에서 건너 온 손가락들이다.

 

시기와 질투를 지우고 보자면, 50년 된 단일 점포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을 ‘올드 머니’ 주민 덕으로 돌리기에는 아쉽다. 트렌드에 그만큼 민감하고 끊임없이 쇄신하는 노력이 있어 가능하다는 증거도 곳곳에 있다. 새로이 연희동으로 이사 오는 젊은이들이나 나 같은 인근 대학생도 고객으로 인정해서일지도 모르겠다. 2020년대에는 20대 소비자들도 장인약과를 사기 위해 몇 시간씩 줄을 서고, 편의점에서 약과 쿠키를 팔기 시작했으며, 유명 힙합 뮤지션이 런칭한 증류식 소주 유행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사러가에서 판매하는 정일품 모약과와 손약과는 2-3년 전 일었던 ‘약과 붐’때만 해도 인당 구매수량 제한이 걸렸다. 지금도 인기 품목이다. 

근본없는 신도시 출신은 때때로 뿌리 반쪽에서 자부심을 찾는다. 강원도가 친가인 덕에 명절 때마다 할머니 댁 방문 겸 강원도 구석구석을 다녔다. 그 중 정선 오일장에서 먹은 갓 튀긴 모약과는 잊지 못하는 간식이다. 사러가의 모약과를 부모님께 사다 드렸더니 단박에 정선 이야기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선은 아니지만 약과 공장이 강원도에 있었다. 

로컬 양조장과 협업한 ‘사러가 탁주’ 는 이 지역 특산품이다. 레몬 딜 버터에서 착안한 시그니처 제품은 합정에 위치한 같이양조장에서 탄생한다. 약간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레몬향을 은은하게 딜이 감싼다. 아, 입에 침 고인다. 

 

#7 마트 계산대

계산대에 가기 직전, 10여 년 전에 그렇게나 궁금해했던 젤로 가루를 만났다. PB&J에 특화된 땅콩 버터와 젤리 단지도 옆에 있다. 미국에서 살다 온 꼬맹이나 이 동네의 서양인 가족을 위한 것이겠지. 이걸 집어들고 나가면, 나는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다. 아니면 때를 놓친 것일 수도.

 

#8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이 동네는 어쩌면 이리 평화로워 보이는지. 마당 깊은 집의 담장 너머로는 감나무가 가지를 드리우고, 뉘엿뉘엿 지는 해는 노을을 만든다. 무언가를 놓칠까 뛰는 사람도, 인상을 찌푸린 사람도 없었다. 외지인의 착각일 수 있지만 말이다.

잔치가 다루는 신촌은 넓은 의미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행정구역상 신촌이 아닌 지역들도 조금씩 넘봐 왔기 때문이다. 매번 신촌역 일대만을 다루기에는 새로운 사건과 장소가 무한정 솟아나지는 않는다는 이유도 있지만, ‘우리 학교는 신촌에 있어’ 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생활 반경은 신촌동보다 약간 넓기 때문이다. 

연희동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은 그래도 신촌역, 가까운 백화점도 신촌 현대백화점이다. 서대문구 한복판에 있는데도 도보로 지하철역까지 최소 30분은 잡아야 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연세대학교는 연희동과 신촌동에 걸쳐 있고, 서문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는 앞서 언급했듯 사러가 마트가 꼽힌다. 

그럼에도 연희로를 사이에 둔 두 동네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빼곡한 하숙집과 원룸 빌라들 사이를 지나 대로를 건너면 비교적 평탄한 지대가 등장한다. 걸어서 고작 오 분 정도의 차이인데 가성비 백반집은 온데간데없고, 여유를 강요하는 카페와 와인바나 유서 깊은 가게가 점점이 박혀 있다. 10평도 안 되는 좁은 방에 몸을 누이면서도 길만 건너면 그 분위기라도 들이마실 수 있는 것은 대학생 신분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나와 같은 학생들도 종종 사러가 마트에서 마주친다. 그들은 장바구니를 가득 채우는 대신, 물건 한두 개만 계산하고 나와 책가방에 담는다. 빈틈없어 보이는 연희동-신촌 자취촌의 토박이 마트는 학생들도 스며들 구석을 조금 내어 준다. 그 틈새를 알아서 파고들기 위해서는 빨간 세일 스티커를 찾아 헤메거나 오후 여덟 시 반이 지나서야 방문하는 것처럼 노력이 필수이지만. 매번 구경이라도 갈 때마다 드는 위화감보다 보고 듣기만 하던 재료들을 만날 때의 짜릿함 때문에 이곳을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다. 

소비 100%가 아니더라도 동경과 질투, 행인1의 역할, 어쩌면 바쁜 대학 생활에서의 도피처로서 사러가 마트는 젊은 신촌 사람들의 경험과 취향에 묻어나고 있다. 잔치가 담아 온 신촌의 경계가 흐릿한 것에 내 나름의 이유를 붙이자면, 이 지역에 발붙이고 사는 개인마다의 몸에 축적된 신촌 일대는 단호하게 선 그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번외

마트 말고, 사러가 쇼핑센터는 오묘하다. 예의 전통시장 같은 분위기가 2층에서도 느껴지는데 영 휑하다. BYC 난닝구 및 속옷가게 주인분은 돋보기를 걸치고 핸드폰을 하고 있다. 그 와중에 오브젝트에서 운영하는 와펜 및 DIY 가게인 옵젵상가도 새로 입점했다. 세대 조화라고 봐야 할까? 

사러가 쇼핑센터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맛로 23

영업시간: 오전 10시~오후 10시

https://www.saruga.com/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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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잔치의 시선으로 신촌의 장면과 사람, 장소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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