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 푸른 굴뚝: 이 글은 여느 기억처럼 선명한 사진이 없습니다.
2025년 11월 1일 신촌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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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빡 졸았다. 화들짝 놀라 밖을 바라보니 누런 벽돌이 가득한 역 안이었다. 신촌이다. 다행히 제때 잠에서 깬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종종 이런 적이 있었다. 몸이 알고 있는 건지…
동창회. 동문회? 동문 행사? 이름이야 어떻든 그것이 나를 14년 만에 신촌으로 불렀다. 술을 먹을 테니 지하철을 타고 왔다. 출근했으니, 정장이야 어쩔 수 없지만, 지하철에서 졸며 신촌에 오니 괜히 마음이 설렌다. 과거의 일상도 이제는 체험 수준의 일이 되었다니 슬프기도 하면서.
출구로 걸어 올라온다. 11월이 되었는데, 이상하게 풀들이 싱그럽고 푸르다. 하늘은 기분 좋게 파랗고 시원하다. 코가 간지럽다. 푸른, 파란, 파랑…. 그러고 보니 내 20대는 참 푸르렀다. 새파란 과잠을 입고 이곳을 돌아다녔고, 20살이 되자마자는 무슨 바람인지 파란색으로 염색하고 다녔다. 그뿐인가. 물이 질투할 정도로 퍼마신 소주조차 푸른 병이니. 낯간지러워 품 안에 넣고 다녔던 단어 청춘도 푸른 봄이다. 내 20대를 그리라면 분명 시퍼런 놈일 테다.
별 쓸모없는 생각들을 하며 신촌 한복판으로 걸어간다. 빨잠, 야 저게 아직도 있네. 빨잠 앞에서 보자, 그땐 그게 우리의 암호였으리라. 거리의 곳곳이 머리에 생생하다. 오래된 일기의 먼지를 털어내는 기분. 오늘 분명 신날 거야 생각하며 술집으로 향한다. 늘 가던 곳, 지도는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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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동문의 밤.
반갑다. 늘 변화를 바라면서 살아왔지만 별수 없이 붙어있는 눈이나 코 같은 것들에 우리들은 서로를 무리 없이 알아볼 수 있었다. 좋았던 기억인지 나빴던 기억인지도 모르게 뭉뚱그려진 기억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반가워해도 되겠지 싶은 마음으로 자리에 앉는다. 맥주를 집어 든다. 몸도 마음도 더 어렸을 적에는 배덕감의 상징과도 같았던 이놈의 뚜껑을 이제는 누가 더 멋있고 능숙한지 자랑이라도 하듯 딴다. 안주가 다 떨어져 가자, 우리는 준비라도 해 온 듯 각자가 기억하는 서로의 모습을 안줏거리로 꺼낸다. 나는 기억도 못 한 내 모습을, 나만 알고 있던 네 모습을 꺼내 술과 함께 다시 삼킨다. 지금 보니 참 어리고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던 차, 10년 뒤에 나도 지금의 나를 보며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괜히 10년 전 나를 우습게 보는 것을 멈춘다.
열심히 지난 시간을 기름 삼아 시간을 달렸다. 나는 이제 술도 먹고 나이도 먹었겠다. 진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책상 위 단어 시험같이 인생에서 수도 없이 있었던 ‘기억을 더듬는 행위’ 말고, 답도 모르고 눈에 선하지도 않지만, 우리가 늘 바라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생각만 해도 눈이 푸르게 반짝이는 그런 것들. 그랬는데…
오늘은 가을이 오긴 했었는지 의심이 들 만큼 추운 11월의 어느날이다. 날씨 탓인지 사람들의 마음이 차가워진 것 같았다. 드러내기보단 가리기에 급급한 것은 비단 시린 몸만이 아니구나 싶었다. 나는 오늘 사실 그 시린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줄 연료가 될 시간을 찾아왔다. 나는 그저 겨울이 온다고, 나이를 먹는다고 어딘가 인색해지고 싸늘해지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차가워진 날씨에 붕어빵을 품에 넣고 애인에게 달려갈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란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우리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던 건 언젠가 나눴던, 혹은 나눌 꿈 이야기 같은 것들이 아니라, 별수 없이 붙어있는 눈이나 코 같은 것들 때문이었다. 반가움은 솜사탕처럼 금세 사라졌고, 어제에 기댄 안주는 동났다. 뭐지 이게, 재미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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