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역에 9번 출구를 뚫는 일
“형, 나 안경 쓸까 벗을까?”
K가 꺼진 휴대폰 화면 너머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평소 잘 입지 않던 니트가 이토록 더울 줄 몰랐고, 2호선엔 사람이 많았다. 땀에 젖어 흐트러진 앞머리를 만질수록 약하게 남아 있는 파마약 냄새가 손끝에 묻었다. K는 한 달 전, 인생 첫 개강을 맞이했다. 자유에 서투른 사이 일 년을 허망하게 보낼 순 없었기에, 하고 싶은 것들을 곰곰이 떠올려 가며 버킷리스트까지 작성한 K였다. 그는 오늘 버킷리스트의 한 줄을 지우기 위해 부지런히 신촌까지 온 것이었다.
1. 6과목 전부! A+ 받기
2. 장학금 받기
3. 미팅 나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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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좋은 사람 만나기

수업이 일찍 끝난 K 일행이 신촌역에 도착한 건 미팅 2시간 전이었다.

“너무 대책 없이 일찍 왔나?”
“근데 너네 신분증은 다 챙겼지?”
2번 출구로 나와 연세로를 따라 걷던 셋은 빨간 잠망경 앞에 멈춰 섰다.
“신촌 오면 애들 다 여기서 사진 찍던데.”
쪼르르 선 남자 셋이 커다란 조형물에 대고 브이를 하는 모습이 우습다 생각할 때쯤, 누군가 어깨를 톡톡 쳤다.
“안녕하세요! 저희 사이비 이런 거 절대 아니고, 신촌 연합 동아리에서 나왔습니다. 인터뷰 응해주시면 커피 쿠폰도 드리고 있어요!”
SG, H.
말을 걸어 온 두 명의 소속을 드러내는 각 학교의 과잠은 K로 하여금 의심을 덜어내 주었다. 학교는 달라도 같은 대학생 신분이라는 사실에 묘한 동질감도 느꼈다. 작년까지만 해도 동경하기 바빴던 옷차림으로부터 소속감을 느끼다니. 괜히 입꼬리가 올라간 K는 “그럼요!” 하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K는 홍대 학생과, 같이 온 두 명은 서강대 학생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들은 언젠가, K가 어렴풋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대학생의 모습이었다. 패기와 열정으로 자신만의 길을 갈고 닦는 모습.
(거기다 웃는 모습이… 말갛고 예뻤다.)
이런저런 이유로 성심성의를 다해 인터뷰를 마친 K였다.
이름, 소속 대학, 전화번호.
쿠폰을 받기 위해 인적 사항을 적는 동안 자연스레 스몰토크가 오고 갔다. 처음 보는 사람과 자연스레 말을 섞는 자신의 모습이 어색하면서도 나쁘지 않았다. (묘하게 뿌듯하기도 했다.) 미팅에서도 이렇게 말을 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근처 학생이 아니시네요?”
오늘 공강이냐며, 신촌까지는 어쩐 일이냐는 물음에 K는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고 답했다. 미팅 때문이라고 말했다간 힘을 준 것이 무색하게 흐트러진 자신의 앞머리가 민망해할까봐 그랬다. 낯선 사람과 이렇게나 편하게 이야길 나눌 수 있다니. 이 역시 K가 생각해 온 이상적인 대학생의 모습이었다. 그 관념에 한 발짝 다가선 것만 같았다.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전하는 그녀를 보며,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응원하게 된 K는 자신의 답변이 작게나마 도움이 되길 바랐다.

정작 미팅은 싱겁게 끝났다.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는데, K 일행의 소개를 들은 상대편이 난처한 듯 보였다. 알고 보니 주선자가 나이를 잘못 전달한 것이었다.
“어떡해, 내 남동생보다 어려서!”
재미는 있었다. 정말 남동생이라도 앞에 앉혀둔 양 인생 조언을 해주는 누나들의 이야긴 유익하기까지 했다. 마음을 비우니 편하게 떠들 수 있었고, 줄곧 동갑과의 연애를 꿈꿔온 K는 연상과의 연애도 나쁘지 않겠다고 문득 생각했지만 이곳에서 이루어질 일은 아니었다. 테이블에 남은 건 빈 술병과 동난 안주, 누나들에게 배운 몇 가지 교훈뿐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이성적 텐션’은 없었다. 나름 즐거운 시간이라 생각했지만 돌아가는 길이 이상하게 공허했다. 어쨌거나 예상했던 분위기는 아니었고, 미팅에서 인연 찾기 어렵단 얘기야 숱하게 들었지만 내심 기대했던 K였기에.
버스 정류장에 다다른 그는 의자에 털썩 앉아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연상에게 어필하는 법을 귀 기울여 듣느라 미처 챙겨 보지 못한 오늘 경기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틀었다. 개막 이후 줄곧 패배하던 히어로즈의 개막 첫 승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왠지 모르게 가라앉은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 히어로즈의 정규 이닝 마지막 공격, 2 아웃. 주자는 2, 3루.
“K님?”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캐스터의 해설을 뚫고 들어왔다.
들은 적 있는 목소리였다.
– 카운트는 풀 카운트. 쳤습니다! 주자 뜁니다!
“K님! 이제 집에 가세요?”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에 귀에 꽂은 이어폰을 빼고 돌아봤을 때, 빨간 잠망경 앞에서 보았던, H가 적힌 과잠을 손에 든 그녀가 서 있었다. 말갛게 예뻤던 그 미소와 함께.
잠시만.
근데 내 이름은 어떻게 기억하는 거지?
“아, 안녕하세요…”
“친구분들하곤 재밌게 노셨어요? 뭐 보고 계셨어요? 노래 듣고 계셨나?”
– 아, 비디오 판독 요청이 들어왔네요. 한번 볼까요.
이름 여기 적어주세요!
…
감사합니다 K님! 쿠폰은 이번주 중으로 보내드릴게요. 오늘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아… 그…”
“어! 히어로즈 좋아하세요?”
– 네, 판정이 번복됩니다. 세이프입니다! 히어로즈, 승부를 다시 원점으로 돌립니다!
개강으로부터 한 달이 지난 그날 저녁, K의 새학기는 이제 막 시작되려던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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