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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2016 · 04 · 14

40. 책바

Editor 희진 서

커티삭 하이볼  10.0

 

바텐더가 메뉴와 물수건을 들고 오자 남자는 메뉴는 볼것도 없다는 듯 스카치 하이볼을 주문했다.

“원하시는 브랜드가 있습니까?”

바텐더가 물었다.

“딱히 원하는 건 없어. 아무거나 괜찮아요.”

남자는 말했다. 조용하고 침착한 목소리였다. 간사이 사투리가 슬쩍 잡힌다. 그러더니 남자는 문득 생각난 듯 커티삭이 있느냐고 물었다. 있다고 바텐더는 말했다.

나쁘지 않아, 아오마메는 생각했다. 그가 선택한 게 시바스 리걸이나 까다로운 싱글몰트가 아닌 점이 마음에 들었다. 바에서 필요 이상으로 술의 종류에 집착하는 인간은 대개의 경우 성적으로 덤덤하다는 게 아오마메의 개인적 견해였다. 그 이유는 잘 모른다.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한 구절을 갖다놓은 게 아니다. 메뉴판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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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바에 들어선 순간, 가장 눈에 잘 띄는 건 브랜드 매거진 ‘B’다. 아마 사장님의 마케팅 경력 때문일 텐데, 사실 책바에는 조금 안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성 잡지가 어울릴 법한데. 그 외의 다른 책들 대부분은 여행 수필이거나 고전이었다. 읽고 싶은 책은 많았지만, 사장님이 작가인 책을 골라 들었다. 공간을 알려면 사람을 알아야 하니까. 그렇지만 책을 읽자마자 그 약간의 자신감이 한풀 꺾였다. 내가 이 곳에 관해 글을 쓰겠다는 생각이 부끄러워질 만큼의, 좋은 글들이 관심을 끌었다. 사장님의 20대를 정리하며 쓴 책은 상당히 깊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헬렌 켈러의 이야기다. 그녀가 말하기를, 사람들은 다들 눈을 가지고 있는데도 제대로 보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같은 산에 가서 헬렌 켈러는 새소리, 나뭇잎의 앞뒷면, 발에서 밟히는 낙엽 소리를 보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아무것도 못 보았다고. 똑같은 걸 보고도 다르게, 더 자세히 볼 수 있는 눈. 책바 사장님 역시 그런 눈을 가지고 아이템 창업에도 성공하셨다. 헬렌 켈러에게도, 창업자에게도, 또 웹진 에디터에게도 그런 눈은 필요할 것이다.

 

손님이 옆에 있는 줄도 잊은 채 책을 들여다보다가 전화가 울린 순간 독서에서 깨어났다. 어두움이 짙게 깔린 거리가 그제야 보인다. 생각보다 늦게 된 약속 시간도. “내일 꼭 투표하세요!”라는 사장님의 인사를 뒤로 하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책과 술이 전부인 아늑한 공간에서 허겁지겁 나오자 허무감이 든 건 어쩔 수 없었다. 책의 세계에서 나와 현실과 마주할 때는, 언제나 기분이 가라앉는다.

 

그렇지만 헬렌 켈러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생각을 다르게 해 보기로 했다. 나에게도 무라카미 하루키보다, 헬렌 켈러보다, 30대에 사장님이 되신 사장님과는 또 다른 세상이 있겠지.


주소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맛로 24 1층

OPEN : 19:00 ~ 25:30 (SUN : closed)

연락처 : 02-6449-5858

희진 서
AUTHOR PROFILE
희진 서

잔치의 시선으로 신촌의 장면과 사람, 장소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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