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치다, 빛이다
그런 단어가 있다. 자꾸만 적고 싶고, 말하고 싶고, 전하고 싶은 소중한 단어가 있다. ‘비치다’는 많은 뜻을 담고 있는 말이다. 다섯 가지 뜻의 ‘비치다’를 마주했을 때, 각각의 의미에 담고 싶은 이야기들이 스쳐 지나갔다.
‘비치는 것’은 사물이나 인물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다. 어떤 대상이, 그것을 온전히 담아내거나 통과시킬 수 있는, 다른 무언가와 만났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다른 곳을 거쳐 조금 느린 시선으로 나에게 포착된, 사소한 신촌 일기.
24시간 내내 환한 신촌이 아니라, 그 빛에 조금은 가려져 있던 신촌을 담았다.
비치다 [비치다]
[동사] 「…에」
비치다의 첫번째 의미는 ‘빛이 나서 환하게 되다’ 이다. 신촌이 어떻게 빛나고 있는지는, 비치는 것들을 통해 말해 보려고 한다.
- 빛을 받아 모양이 나타나 보이다.

_ 서대문구 창천동 52-151 2층, 바 틸트.
젊음, 청춘, 광란, 열정… 비슷한 결을 한, 그 모든 단어들을 포함하는 신촌의 시끄러운 뒷골목. 그곳에는 아직 ‘신촌러’들에게도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고 비밀스러운 바가 있다. 이제는 흐릿해진 기억이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다. 그래서 애틋한 곳이고, 나만 알고 싶은 곳이다. 그런 곳을 소개하고 싶은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한 밤이었다. 고요한 밤, 우리의 잔잔한 웃음소리만 이따금씩 울려 퍼지는 조용한 순간을 담았다. 작고 단단한 카메라 프레임 안에 그곳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담겼다.
오색 찬란한 조명이 내리쬐는 신촌의 뒷골목 한편에서, 그곳에서 새어 나온 빛이 조용히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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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체의 그림자나 영상이 나타나 보이다.

_ 서강대 남문과 후문 사이, 어느 골목길.
서강대 후문 거리는 한적하다. 사람으로 북적이는 신촌 로터리에서 약 10분 남짓을 걸어 내려오면, 사람에 치여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다. 비 내린 다음 날은 여전히 흐렸다. ‘날죽날사(날씨에 죽고 날씨에 산다)’를 추구하는 나는 입을 삐쭉 거리며 집을 나섰다. 멍하니 걷다 보니 물웅덩이에 비친 하늘이 보였다. 비 때문에 축 처져서 바닥을 마주했는데, 비는 오히려 내가 하늘을 올려다보게 만들었다. 흐린 봄도 봄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날씨 때문에’라는 변명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나의 핑곗거리에 불과했을 지도 모른다.
사계절이 지나고, 또 다른 해가 되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봄이 와 버렸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맞은 봄에도 꽃은 피어난다. 그저 쏟아지는 비에 충분히 잠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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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이대역 5번 출구, 염리동 소금길.
이대역 5번 출구에는 염리동이라는 작고 조용한 마을이 있다. 시끌벅적한 신촌의 변두리에 위치하기 때문일까, 이곳에 처음 가면 ‘별거 없네’ 하며 발걸음을 돌리기 쉽다. 하지만 이곳을 두어 번만 더 지나가다 보면 차츰 정을 붙이고 곳곳의 숨겨진 매력에 푹 빠진 자신을 발견한다.
의외의 장소에서 작은 책방, 카페, 펍, 공방들을 발견할 수 있는 염리동 골목길. 이곳에는 자기만의 색깔로 공간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좁은 골목길에서도 저마다 다르게 빛을 내고 있다.
빛나는 사람들 곁에 있으면, 내가 더 빛나고 싶다는 욕심보다 그들의 빛에 담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한순간에 반짝이진 못해도, 서서히 물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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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뜻이나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 보이다.

_ 이화여자대학교 정문 X 대만에서 만난 친구, 다중 노출.
친구와 나는 칼 단발에 안경을 썼던 중학생으로 만났다. 벌써 8년이 지난 지금은 둘 다 타지에서 각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올해가 되어서야 드디어 미루고 미뤄 두었던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오래된 친구와 함께한 시간을 더 오랫동안 남겨 두고 싶어서 끊임없이 사진을 찍었다. 한 장 한 장에 소중한 순간을 담았는데 막상 필름을 감아보니 감기는 느낌이 전혀 나지 않았다. 그래서 한 롤에 담긴 36개의 이야기들이 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아쉽지만 그대로 *미노광이 뜨면 아까우니, 필름 꼬리를 다시 꺼내어 다시 처음부터 내 시선을 담았다.
그 후 두 달이 지나서야 필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처음에 찍은 모습이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한 타이베이 여행과 신촌에서의 내 일상, 이 두 가지 모습이 동시에 나타났다. 사진 하나에 늘 밝은 친구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기억 위로 내 청춘을 담을 이화의 모습이 새겨졌다.
내 일상의 순간에 친구의 미소가 환하게 번졌다. 나에게도 늘 옆을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걸 떠올리면 평범한 일상도 특별하게 다가온다.
*미노광 : 노광이란 사진에서 렌즈로 들어오는 빛을 셔터가 열려 있는 시간 만큼 감광(感光) 재료에 비추는 일로, 미노광은 노광이 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즉, 필름을 다 찍었다고 생각했지만 현상해 보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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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명하거나 얇은 것을 통하여 드러나 보이다.

_ 신촌로 YBM 어학원 앞, 버스정류장.
신촌 버스정류장에는 늘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른 아침에는 덜 잔 잠을 제쳐두고 출근하는 사람들로, 늦은 밤에는 아쉬운 만남을 뒤로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버스 정류장의 투명한 벽 너머로 신촌의 소란스러운 거리가 비쳤다. 그리고 그 위에는 전단지를 붙였다 뗀 얼룩덜룩한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때론 우리의 낮과 밤이 별거 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지워지지 못한 흔적들이 남아있다. 보이진 않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떼어지지 않는 접착제처럼 진한 기억들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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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치다 [비치다]
[동사] 「…에」
- 빛이 나서 환하게 되다.

_ 신촌로 뒤쪽, 마포구 대흥동.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니 어디서 찍은 거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신촌 자취방에서 본 모습이라 답하니 다들 뜻밖이라며 놀랐다. 신촌과는 멀리 떨어진, 00동 같다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누구에게도 신촌의 이미지를 가진 사진은 아니었다. 사실 나에게도 아직 완전히 익숙하지는 않은 풍경이다. 원래도 밖을 바라보는 걸 좋아하지만 이곳으로 이사하고 나서 그 시간이 더 길어졌다.
환한 실내에 있던 내 시선이 어두운 바깥을 향했다. 정확히 말하면, 어둠 속에서도 주변을 밝히는 빛 줄기를 바라봤다. 밖을 바라보고 있으니 따스한 색감에 눈을 편안해졌다. 마음을 휘감던 불안감도 가라앉았다.
짙게 드리워진 어둠 속에서도 작은 빛들이 그 주변을 비추고 있었다. 신촌 로터리의 번쩍이는 조명이 닿지 않아도 온전히 혼자 힘으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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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도록 빛이 사라지지 않는 복잡한 공간, ‘신촌’.
우리는 신촌에서 어떤 존재로 비칠까. 조명을 받기도 하고, 반영으로 담기기도 하고, 투명한 것 너머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면서 우리 마음 속에 있던 것들이 조금씩 드러난다. 때론 누군가에게 비치는 것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내가 다르다면, 그것이 상처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가끔 빛에 가려져 암흑과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는, 한 번쯤 떠올렸으면 좋겠다.
‘비치다’의 첫 번째 의미는 ‘빛이 나서 환하게 된다’ 라는 것.
빛나는 것이 많으면 빛에 가려지는 것들도 많다. 하지만 하나의 강한 빛 줄기가 아니라, 무수한 반짝임이 모여서 더욱 환하게 빛나는 공간. 그곳이 바로 신촌이고 우리는 모두 각자의 빛을 품고 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그 자체로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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