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앤트러사이트 연희
무언가를 ‘정의’한다는 것은 어쩌면 정의롭지 않은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아니 어쩌면 인류 적응의 결과, 무의식적으로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고 그 특성을 성문화하고자 한다. 이는 한 인간이 평생을 투자해도 처리할 수 없는 양의 인지적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당연한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아무튼 그렇게 우리는 개별을 이해하는 복잡한 인지의 과정을 간소화하는 방법으로, 작고 개별적인 것들을 크고 덩어리진 단어에 뭉뚱그려 포함하고, 그 단어로 모든 개별을 정의하는 쪽을 택하곤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개인이 태어나면서부터 부단히 쌓아 올린 ‘덩어리진 단어’들의 성곽이 도저히 포함하지 못하는 존재들과 맞닥뜨렸을 때 대부분의 우리는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한다. 첫째, 그 존재들 또한 인지 가능한 성곽 안으로 밀어 넣으려 노력하는 것. 그리고 둘째는 그 존재들 자체를 없던 일로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강요 혹은 무시. 그렇다. ‘정의’라는 행위가 불러오는 암묵적 부작용은 생각보다 폭력적이다. 그렇기에 나는 정의할 수 없는 무언가, 혹은 정의하지 않으려는 누군가를 만날 때 무척이나 반가운 기분을 숨길 수 없다. 그러한 관점에서, 앤트러사이트 연희는 정의할 수 없는 대상임이 분명함과 동시에 정의하지 않으려는 주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where do I belong?
요즘은 공간도 꽤 쉽게 분류되는 세상이다. 소위 말하는 ‘인스타 감성’적 공간이나 ‘힙’하고 뉴트로적인 공간, 이와는 반대되는 낡았으나 정겹고 친근한 노포와 같은 공간, 혹은 아무도 그 공간에 대해 사유하지 않을 법한 무색무취의 공간 등이 그 대표적 부류인 듯 하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점차 공간들도 철저하고 빈틈없이 ‘정의’되기 시작했으며 그 탄생부터가 분류에 맞추어 이루어지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경향은 현재의 개인들에 따라 점차 견고해지는 중이다. 그 날 그 날 본인이 느끼고 싶은 감정을 불러일으킬 확실한 능력을 지닌 공간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개인들 말이다. 곧, 불확실성과 함께 미스터리한 간질거림도 함께 낮아지는 것이 요즘의 공간 생활의 특징인 것이다. 그러나 앤트러사이트 연희는 말하자면 그러한 분류의 여집합과 아웃라이어(이상점) 그 어디 쯤에 속한다. 아니, 속한다는 말은 취소다(분류가 폭력이라고 생각하는 나도 관성적으로 그리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냥 정의되지 않은 채 존재한다고 해 두자. 앤트러사이트, 그 이름이 주는 인상만큼이나 그 공간의 시청각적 첫 인상 또한 종잡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카페나 가게라기보다는 ‘공간’이라는 말이 훨씬 더 와 닿는 곳, 한 눈에 구석구석을 파악하기 힘든 곳, 갈 때마다 다른 구석을 바라보게 되는 곳, 그러면서 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곳, 그리고 2차원보다는 3차원, 혹은 그 너머에 가까운 그런 곳.

흑백의 건물이 투영하는 색채들
이제와 돌이켜 생각해보면, 앤트러사이트 연희는 내가 자주 방문하는 카페 중 유일하게 아무와도 함께 가지 않았던 카페인 것 같다. 공간을 온전히 느끼고 오롯이 혼자 사유하고 싶을 때 무겁지만 가볍게 방문하는 곳이 바로 앤트러사이트 연희였으며 그러할 때마다 완벽한 사유의 환경을 마련해주는 공간도 바로 그 곳이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러한 느낌을 주는 데에는 앤트러사이트 연희의 공간적 모호함과 오묘함이 큰 몫을 했던 것 같다. 언뜻 보면 박물관인 듯도 보이는 그 공간은(실제로 카페를 바깥에서만 본 친구는 그 곳을 ‘박물관 카페’로 불러버리기도 했다) 크게 두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은 주문을 하고 커피 원두를 살 수 있는 공간과 더불어, 이 곳의 시그니처 심볼인 긴 테이블 겸 의자(곧 자세히 설명하겠다)가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이 곳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2층을 이용하곤 하는데, 주문을 마친 후 들어왔던 문을 다시 열고 나가서 올라가야 하는 2층은, 놀랄 만큼 어두운 계단이라는 미션 아닌 미션을 통과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이다. 그러나 그렇게 암흑 체험을 방불케 하는 두려움의 계단을 지나면 통과의례와의 그것과는 정 반대의 풍경이 펼쳐진다. 한 쪽 벽이 완전히 통유리로 이루어진 2층은 연희동의 고즈넉한 풍경과 정겨움을 담고 있으며, 아침의 상쾌한 파랑, 오후의 나른한 노랑, 저녁의 묘한 청보라, 그리고 그 사이 어디쯤 되는 모든 시간들의 색들을 품고 있는 팔레트라고도 할 수 있겠다. 1층도 물론 좋지만 많은 이들이 앤트러사이트의 2층을 사랑하는 이유는 영화보다도 생생하고 소설보다도 여운이 남는 통유리 팔레트의 스토리 때문일 것이라 자부한다.

이 어둠 끝에서 마주할 눈부신 색채는 과연.

“색깔은 색깔을 만날수록 검은색에 가까워집니다. 세상에 완전한 검정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단지 모든 빛을 흡수한 검정의 고요를 가늠하고 싶을 뿐입니다. 우리는 앤트러사이트 연희점에 이 검정을 넣었습니다. 어두운 통로를 지나 넓은 창으로 쏟아지는 빛을 마주하면, 잠시 시간은 아득해집니다. 이 여백은 어떤 감각으로 남게 될까요. 발자국 소리와 그림자의 움직임이 익숙한듯 낯설게 다가오는 이곳에서, 새로운 한 순간을 기대해봅니다.” – 앤트러사이트 연희
통유리 너머의 풍경을 바로 앞에서 바라보고 싶다면, 아까 1층에도 놓여있다고 잠시 언급했던 ‘긴 테이블 겸 의자’에 앉는 것을 추천한다. 잠깐. 여기서 당연히 생기는 의문점 하나가 있을 것이다. 긴 테이블이면 테이블이고 의자면 의자지, 긴 테이블 겸 의자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 여기에서 앤트러사이트 연희의 비규정적 상징성은 정점을 찍는다. 2층 전체를 쭉 가로지르는, 낮은 선반 혹은 평상 같기도 한 나무 색의 곡선 조형물. 사람들이 어떠한 방향으로든, 어떠한 자세로든 자유롭게 아무렇게나 앉을 수 있게, 그냥 툭 놓여진 ‘그 것’. 그리하여 내가 무엇을 보고 어떻게 앉을 지 찬찬히 고민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그 것이 앤트러사이트 연희가 주는 사유의 공간의 핵심인 것이다. 누구에게도 “어떻게 앉아.” 혹은 “어떻게 먹어.”라고 강요하지 않는, 그럼으로 하여 이 공간을 즐길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는 이 조형물에 걸터 앉아 나는 비로소 ‘정의되지 않고 정의하지 않는’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살짝의 곡선이 주는 무언가 모를 유연함도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겠다. 다양한 사람들이 어떻게 앉아 있느냐에 따라 매일 다른 그림을 만들어내는 이 공간 자체가 하나의 또 다른 예술작품으로 탄생되는 마법은 덤. 그러나 혹 등받이나 책상이 필요하거나 딱딱한 바닥에 오래 앉아있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다. ‘긴 테이블 겸 의자’ 뒤쪽에 수평으로 펼쳐진 ‘긴 테이블과 의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노트북을 사용하거나 공부를 할 때는 테이블이 있는 것이 더욱 편안할 수 있으므로, 필요에 따라 그 공간을 이용해 보는 것도 좋다.

유연하고도 단단한, 사유의 공간이자 오롯한 예술 작품

사유의 주체는 누구라도 될 수 있다!
앤트러사이트 연희의 분위기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삼차원적 요소는 바로 음악이다. 대부분의 카페에서 멜론 차트 혹은 유튜브 플레이리스트에 포함된 노래들을 쭉 틀어 놓는 것과는 사뭇 다르게, 이 곳의 음악은 상당히 신선하다. 흘러나오는 음악 자체도 신선하지만, 그 음악을 전달하는 방식 또한 굉장히 신선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신선함이 시작되는 곳은 바로 통유리의 가운데 쯤. 펼쳐진 통유리 바로 앞에는 긴 테이블 겸 의자와 마주보게 놓여져 있는 나무 의자가 하나 있는데, 그 의자 위에는 앰프와 연결되어 있는 아이패드가 하나 올려져 있다. 대부분의 공간에서 스피커나 앰프는 숨겨져 있기 마련인데, 이 곳에서는 그 아이패드가 마치 주인공인 것처럼 정 가운데에, 굉장히 포스 있게 앉아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물론 방문할 때마다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이 곳의 음악에는 거의 가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때로는 무겁고 때로는 고즈넉하게 느껴지는 정적인 멜로디만이 사람들을 감싸 안는다. 마치 백색 소음 같기도 한 이 곳의 음악은 그저 개인들 각자가 만들어 내는 소리들을 가만히 포용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도화지의 역할을 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서로의 대화에, 혹은 깊은 내면의 목소리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된다. 특정한 유행가를 듣고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 아닌, ‘내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음악. 이 곳의 음악 또한 무엇이라 정의 내리기 어려워 비유와 설명으로 한 문단을 채웠다. 만질 수 없는 부분까지도 모호하고 특별한 곳. 내가 앤트러사이트를 사랑하는 이유다.

큰 공간을 가득 채우는 작음, 그리고 모호함
사랑. 나에게 사랑하는 것들을 꼽아보라고 했을 때 커피는 무조건 그 리스트에 포함될 만큼 나는 커피를 참 좋아한다. 계절 혹은 날씨와 상관 없이, 조용히 내려 마시는 따뜻한 모닝 커피가 없다면 인생에서 느끼는 행복감이 절반으로 줄어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래서인지 맛있는 커피를 찾아다니는 것도 무척이나 좋아하고 맛있는 커피를 내리는 카페를 찾았을 때 느끼는 희열 또한 무척이나 즐긴다. 그런 점에서 앤트러사이트는 10점 만점에 12점을 주고픈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곳은 직접 원두를 블렌딩 해 총 여섯 가지 종류의 원두를 만들어 사용하는데, 블렌딩 원두의 이름들에서부터 특별함이 뿜어져 나온다. ‘공기와 꿈’, ‘나쓰메 소세키’, ‘버터 팻 트리오’, ‘파블로 네루다’, ‘윌리엄 블레이크’, 그리고 ‘미스터리 히스토리’가 그것이다. 이 이름들에는 공통점이 존재하는데, 이를 찾는 것에 성공했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문학 애호가일 것이다. 그렇다. 앤트러사이트는 문학 작품 혹은 작가에게서 받은 영감을 토대로 원두를 블렌드하고 이를 커피의 맛과 향에 담아 사람들과 나누는 특별한 작업을 해가고 있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이란 이런 것이다. 가히 완벽한 스토리, 완벽한 조합
이 여섯가지 블렌드는 문학도 좋아하고 커피도 좋아하는 나에게는 그야말로 완벽한 조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앤트러사이트 연희를 방문했을 때, 이를 한 번에 모두 경험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그 날 그 날 사용하는 원두가 다르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아메리카노의 원두는 두 가지 블렌드 중 하나를 고를 수 있게끔 메뉴판에 표시해 두고, 라떼와 같은 경우에는 그 날 초이스된 블렌드 하나만을 맛 볼 수 있다. 이 곳의 단골이 되어버린 후라면, 본인이 좋아하는 블렌드가 나오지 않는 날에는 살짝쿵 슬퍼질 수는 있겠다. 그러나, 매번 어떤 조합의 원두가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하며 방문할 수 있다는 일상의 사소한 짜릿함이 주는 행복감은 분명 그 슬픔보다 클 것이다. 가장 비슷한 기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포춘쿠키를 열기 직전의 마음 정도라고 답할 수 있겠다.. 포춘쿠키를 열기 전 설레고 몽글거리는 마음은 사실 그 쿠키 안에 나에게 분명 힘이 되어줄 문장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데에서 나오지 않는가. 앤트러사이트의 원두들도 마찬가지이다. 무슨 블렌드가 기다리고 있건 간에 모두 각자의 개성대로 아주 맛있을 것을 알기 때문에 기꺼이, 망설이지 않고 그 곳으로 발걸음을 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여섯 가지 개성을 모두 느끼고 싶다면 앤트러사이트에서 판매하는 원두, 혹은 드립백을 구매해보자! 원두를 사 들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훨씬 행복해질 것이니. 아! 그리고 혹여나 연희점이 너무 멀어 방문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전국에 7개 존재하는 앤트러사이트의 지점들 중 가까운 곳을 찾아 방문해보는 것도 좋겠다. 만약 이도 어려울 경우라면, ‘마켓컬리’에서 앤트러사이트 드립백의 샘플러 6종을 판매하고 있으니 부담 없이 주문해서 마셔 보기를 권한다. TMI 이기는 하나, 우리 가족은 여행을 다닐 때도 커피가 필수이기 때문에 항상 드립백을 챙겨 가곤 하는데, 이번 여름에 다녀온 제주도 여행의 모닝커피를 책임져 준 것도 이 앤트러사이트 드립백 샘플러였다. 가족들 모두가 각기 다른 맛의 커피를 마셔보고, 서로 바꾸어 가며 맛과 향을 느껴보는 경험은 의외로 오랫동안 남는 추억이 된다. 물론 다들 백 퍼센트 만족!

커피, 공간, 그 이상
공간에서부터 음악, 커피 그리고 문학까지. 앤트러사이트 연희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아우르는 꽉 찬, 그러나 동시에 텅 빈 공간이다. 단순한 구조가 품고 있는 복합적인 관념과 아이디어들은 방문하는 이들로 하여금 개인적인 것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그래서인지 주기적으로 전시가 바뀌는 전시회장 혹은 박물관처럼(박물관 카페라고 했던 친구가 사실은 혜안을 지녔을 수도), 들를 때마다 다른 마음으로, 다른 생각들을 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나는 이 글을 마치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 중 하나이자 앤트러사이트의 블렌드 중 최애라고 할 수 있는 ‘나쓰메 소세키’적인 시선에서 이 공간과, ‘개인적인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문장을 좋아하는 이유를 두 가지만 꼽아보라면 첫째는 그가 가진 독특하고 새로운 시각, 그리고 둘째는 간결하고 따뜻하며 이해하기 쉬운 문장에서 나오는 번뜩이는 예리함과 이에 따른 흡입력일 것이다. 이는 그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데, 그 내용은 제목이 귀띔하는 바와 같이 고양이 한 마리가 그야말로 고양이의 시선에서 인간들을 바라보고 정의하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인간들이 서로에게 붙이는 꼬리표 혹은 특징이 고양이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는 엉터리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점잖고 젠틀한 영감님으로 알려지고 판단되며 곧 정의되는 사람도 사실은 옹졸하고 치사한 습관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고양이는 안다. ‘나’라는 인간의 한정된 시선에서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정의하고 그 정의를 강요하는 것, 또 그 정의에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 그 것 자체가 오류이자 폭력이라는 것도 고양이는 알까. 거대한 분류기준들 속에서 개인적인 것들이 복원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다양성과 똘레랑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르고, 각자의 체계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 뿐이라고. 또, 우리 한 명 한 명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다양성과 변화의 가능성은 쉽게 정의될 수 없으며, 정의되지 않아야 한다고. 통유리 너머 초등학교에서는 벌써 하교를 알리는 종이 치고, 아이들은 따스한 오후의 햇살 아래 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뛰어나간다. 다시 그 긴 테이블 겸 의자로 돌아가 따뜻한 나쓰메 소세키 한 모금을 머금고 생각한다. 문득, 저 아이들만은 정의되지 않은 채, 판단되지 않은 채 그냥 하나의 개인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다라는.

똘레랑스를 품은 따뜻한 나쓰메 소세키 한 모금

앤트러사이트 연희
서울 서대문구 연희로 135
평일 08:00~22:00, 주말 09:00~23:00
050713287991
anthracitecoff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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