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TO ZANCHI! · 신촌을 사랑하고, 추억하고,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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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CE 2020 · 04 · 22

129. 잠수

Editor 왕 잔치

  초유의 사태에 전 세계가 들썩인지 어언 세 달 째다. 병마(病魔) 그 자체도 문제지만 사람들을 가장 괴롭게 하는 건 사회적 거리두기일 것이다. 필자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제도적으로 시행되기 전부터 이를 실천했다. 겁이 많은 건지, 신중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천성이 둔하게 태어난 탓에 사소한 불편함과 좁아진 생활반경은 그럭저럭 견딜만 했다. 또한 상황이 심각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참했고 그 덕에 늘어난 격리의 기간도 감수할 수 있었다.
  한달이 좀 넘게 지났을까. 기대와 실망의 줄다리기에 지친 이들이 하나, 둘 씩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화부터 났다. ‘서로를 위한 약속이 아니었나?’를 반문하면서 혀를 찼다. ‘왜 저럴까? 하지 말라면 하지 말지…’ 그러던 본인도 시간이 지날수록 답답함을 견디기 어려웠다. 가끔은 무모한 이들이 부럽기도 하고, 너무 일찍부터 조심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SNS에서 현 상황을 누군가 팔벌려뛰기의 마지막 구호를 자꾸 외치는 수련회에 비유한 것을 보았다. 개인적으로는 잠수를 하는 기분이다. 다 같이 참기로 해놓고 누구는 먼저 물 밖으로 튀어 나가버리는, 그래서 걔네들이 밉기도 한데 부럽기도 한. 그리고 더 이상 할 이유도, 숨도 남지 않은 그런 잠수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숨을 참아야만 한다. 내가 올바르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둔해서 그런거다.

 


거봐, 너도 붕어지?
 

 

  이렇게 약 한달 반을 격리한 채로 생활하니 신촌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진다. 참 신기한 노릇이다. 꼬박 몇 년을 왔다갔다 하던 곳이 고작 몇 주만에 의식에서 희미해지다니! 나라는 사람의 기억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여하튼 그런 의미에서 신촌에 대한 기억을 의식적으로 되새겨보고자 한다. 만일 지금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모습이 신촌의 마지막이라면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긴 잠수에 흐릿해지려는 그 기억들을 한 번 끄집어 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시기의 끝에 무엇이 남을지 그려보는 의미에서 말이다.

 


이제는 묘한 감상을 자아내게 하는 백양로.
찾아올 이 없는 줄도 모르고 사람맞이할 채비를 끝낸 모양이다.

 

  1. 백양로

  연세대의 백양로를 가슴에 새긴 건 꽤 오래 전 일이다. 공사 중이었던가, 8년 쯤 된 논술고사의 그 혼잡함과 치열함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일 수도 있구나’ 싶으면서 ‘그래도 나는 붙겠지’라고 맘 졸이며 백양로를 터덜터덜 걸어 내려온 첫 만남 후, 2년이 지나서야 정식 인사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여차저차 새내기가 되어 입성한 백양로는 개선장군의 귀국행진 마냥 설레었다. 뒤늦은 성취의 단 맛이 다 빠지기 전에, 또 서로가 갈림길에 들어서기 전에, 동기들과 한데 섞여 놀았던 축제는 더욱 감상에 취하게 만들었다. 5월의 밤, 땀에 젖은 나를 마중나온 백양로의 친절함은 그렇게 영원할 것 같았다.
  그리고 1, 2년이 차곡차곡 지나 여느 길과 다를 바 없어진 백양로와는 낮에만 잠깐 얼굴을 비추는 그런 사이가 됐다. 과제라도 있어 밤 늦게까지 남는 날에는 이 지겨운 곳을 언제야 떠날 수 있을지 손꼽아 기다렸다. 캄캄하고 텅 빈 백양로를 따라 신촌 역으로 향했던 무거운 발걸음은 이렇게 학교를 가지 못하게 됨으로써 홀가분해졌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반대로 지금 내 기분은 자못 찜찜하다.

 


M.ade O.f L.ong L.asting I.rreplaceable S.cent

 

  1. 골목 – 1, 몰리스

  신촌의 매력 중 하나는 골목 구석구석에 숨겨진 각자만의 공간일 것이다. 친구가 알려준 이 작은 카페는 나에게 몇 안 되는 애정의 장소이다. 1년 여의 기숙사 생활을 끝내고 신촌 통학생활을 하게 되자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혼자가 된 자신이 어색해 일부러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원체 그랬다는 듯이 남과 있는 시간이 불편해졌다. 나아가 다른 누군가와 한 공간에 같이 있다는 사실이 거북스러워졌다. 그렇게 사람이 많은 곳을 기피하던 시기의 내게 몰리스는 피난처가 되어준 고마운 곳이다.
  나무를 중심 소재로 한 내부 공간의 디자인은 포근한 느낌을 주고, 몇 자리 없는 좌석은 나만의 공간이란 느낌을 물씬 풍긴다. 공간 자체가 작은 것도 한 몫을 할 것이다. 창가 쪽에 난 일인석들이 유달리 기억에 남는다. 신촌 골목이 오밀조밀하게 담긴 창문 너머를 보고 있으면 비가 오지 않아도 비가 오는 것 같은 아늑함에 잠긴다.  커피와 길티 플레져인 케잌을 나란히 내 앞에 두면 그들의 향기만으로도 감히 하루가 완성됐다고 자신할 수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어쩔 수 없이 밖에서 맘편히 커피도 마시지 못하는 요즘이기에 더욱 그리워진다.

 

이쪽, 아니면 저쪽?

 

  1. 골목 – 2, 곳곳의 추억

  비록 지금은 혼자있는 걸 즐기는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친구들과 함께 호기롭게 술을 마시며 이 골목 저 골목을 들쑤셨던 날들도 분명히 있었다. 음주를 즐겼다기보다 술자리의 분위기에 이끌려서, 무리에 동화되어서 그랬다. 왁자지껄 떠들어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색한 사이에서도 쉽게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던 자리들은 분명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한 번은 과 MT를 기획하는 자리였는데, 동기들 중 가장 어색한 조합의 다섯 명이 모였다. 집에 가버릴 수도 있었을텐데, 서로를 위한 나름의 책임감으로 자리를 지켰던 그 때가 귀엽게 느껴진다.
  아쉽게도 내가 갔던 곳들이 어디 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거의 친구 손에 이끌려 간 곳들이라 입구를 뚫어져라 쳐다본 들 알 수가 없다. 그러한 까닭에 신촌 어느 골목을 가든지 그 곳이 그 곳인 것 같은 오묘한 기분이 든다. 좋게 생각하면 신촌 곳곳에 나의 추억이 깃들어있다고 볼 수 있겠지. 어쩌면 신촌 일대가 추억이 되버린 건 아닐까?

 

 

  1. 신촌로터리, 그리고 마무리

  등교 시에는 늦지 않기 위해 안전하게 지하철을 탔지만, 집에 갈 때는 언제고 버스를 고집했다. 늦게 가도 좋으니 내가 어디를 거쳐 집으로 가는건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심산이었다. 이를 위해선 신촌 로터리를 거쳐가야했는데 그 네 갈래길을 보면 이따금씩 다음과 같은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나와 다른 길을 가는 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걸까’, ‘내가 떠난 신촌은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나는 어디로 가는걸까’
  하지만 한 시간 정도의 거리조차 속속들이 알고싶던 나도 실은 빨리 감기를 원했다. 신촌을 떠나 집으로 향할 때마다 삶의 한 페이지를 훑어제낀 듯 했다. 겨우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가는 길에선 어서 결말로 넘어가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혹시 쫓기듯이 책을 읽어본 적이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읽었다’는 행위만이 남은 공허한 감상도 잘 알 것이다. 돌이켜보니 고대하던 신촌의 마지막은 내 삶의 한 장(chapter)을 ‘살았다’는 감상만을 남긴 체 나를 떠나지는 않을까싶다. 

  우리는 지금 의도치 않게 일시 정지 상태에 놓여있다. 우리를 집에 가두고 열쇠를 삼켜버린 역병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일상의 소중함을 뉘우치듯 깨닫고 있다. 나의 경우는 끝나기만 바랐던 대학이 아쉽게 느껴졌다. 마음 한 켠의 조급함에 미처 보지 못한 현재의 미덕을 뒤늦게 배운 것이다. 골목에 추억들이 숨어있었듯이 내가 아직 모르는 그리움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시국이 종식되는 그 날, 모두가 새해를 맞이한 것처럼 기뻐할 것이다. 마침내 되찾은 일상의 첫 숨(breath)은 몰리스의 케익보다 달콤할 것이다. 미세먼지가 좀 있으면 어떤가, 마스크 없이 신촌 거리를 활보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상쾌해질텐데. 이쯤되니 물 밖으로 달아난 사람들이 이해가 된다. 당장이라도 숨 막히는 잠수를 끝내고 싶은 심정을 어찌 모를까. 단지 필자는 서로를 위해 약속의 시간까지 조금 더 참으려 한다. 그렇게 다시금 자유로이 신촌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 때는 매 순간을 고마워하며 그의 모든 얼굴을 기록해야겠다.

왕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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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잔치

잔치의 시선으로 신촌의 장면과 사람, 장소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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